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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의 원작은 전남 완도군 금일도 출신 소설가 임철우의 소설이다. 소안도, 당사도, 보길도 등지에서 촬영한 영화 덕분인지 당사도를 보면 그의 소설 속 영화의 한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시대적 상황이 약간 다르겠지만 소안도 일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각별하다. 그곳은 항일의 섬 그 자체로서 충분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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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도 등대 습격사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는가

이맘때면 소안도에서 중요한 행사가 열린다. 나는 거의 6년 동안 행사에 참여하려고 대한, 민국, 만세호를 번갈아 타고 소안도에 갔다. (사)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항일운동을 기념해 전국 백일장 대회를 연다. 벌써 30회째.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작년에는 아쉽게도 행사를 중단했지만, 올해는 온라인으로 6월 30일까지 작품을 공모한다.

지난 10일은 소안도 항일운동 기념탑 앞에서 늦게나마 3.15 만세운동을 기념해 학생들이 당사도 등대 습격사건을 재현했다. 올해로 102주년 기념일이다. 소안중학교 학생들은 무대에서 그동안 준비한 시대극을 통해 선조들이 지켜낸 우리 강산과 항일정신, 일제의 잔혹함을 만천하에 알리고 있었다.

지금의 당사도는 항문도, 자지도 등으로 부르다가 세 번씩이나 이름을 바꿨다. 1909년 그곳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일제가 생각한 당사도는 바로 항구의 관문이었다. 한반도 수탈을 목적으로 일제는 이곳에 안전한 항로를 열어 줄 등대를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설치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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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수탈의 역사가 전남지역에도 집중됐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부터 일본의 농업자본들이 본격적으로 내륙에 진출했다. 전남 목포권에 진출한 일본은 1912년 농업 관련 정보를 교환한다는 취지로 목포농담회(木浦農談會)를 설립했다.

 1920년 자료를 살펴보면 목포농담회의 회원은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 목포지점, 조선실업주식회사 목포지점, 가마타(鎌田)산업주식회사 목포지점, 조선흥업주식회사 목포관리소, 합명회사 쿠니타케(國武)농장, 후쿠다(福田)농사주식회사, 목포식산주식회사, 도쿠다(德田)양행 목포지점 등 8개 회사였다.

이 중에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한 회사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동양척식주식회사였고, 조선실업, 조선흥업, 도쿠다양행, 가마타산업 등의 순으로 이들 8개 회사가 소유한 토지는 모두 2만 정보(1정보는 3,000평)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었다. 식민지 조선에 공장을 세울 정도로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못했던 일본은 토지나 거기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수탈하는 일을 주로 했다.

일제가 1910년부터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했던 가장 큰 목적은 토지를 강탈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일본 정부 소유였던 동척, 1930년대 들어 41만 정보의 토지에 50여만 석의 쌀을 수확하는 가장 큰 규모의 농장이자 식민지 조선의 최대 회사였다.

동척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총독부와 결탁한 일부 일본인들도 비슷한 이름으로 농토 획득에 나섰다. 그 결과 1920년대 초반에 이미 1천 정보 이상의 농지를 소유한 조선실업, 조선흥업, 불이(不二)흥업, 구마모토(熊本)농장, 사이토(齋藤)농장과 같은 기업형 농장이 전국 각지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난다.

일제 탄압에 맞서 소안도 의거는 분연히 일어났다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구도심 곳곳에 적산가옥이 보이는 것은 일제의 조선 침략 흔적이다. 일제는 자국민을 대륙의 침략 계획에 철저히 이용했다.

당사도에 세워진 등대는 1876년 병자수호조약 이후 일본 상선의 항해를 돕기 위해 조선 정부가 설치했다. 등대로 인해 일본제국주의의 한국 어업침탈 강도는 가속화됐다.

정부는 당사도 등대 시설이 항해하는 선박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공익시설이라 했지만, 소안도 사람들은 아무도 이를 믿지 않았다. 일본은 우리 영토에서 수산물과 쌀, 면화 등을 수탈해 갈 목적으로 조선 정부에 압력을 넣어 당사도에 등대를 세웠다.

이에 1909년 2월 24일 소안도 비자리 출신 이준화 외 5명이 등대를 습격하여 일본인 등대수 4명을 처단하고 당사도 등대를 파괴하는 의거를 감행한 것이다. 소안도는 애국지사를 많이 배출한 섬이다. 이처럼 항일운동이바로 완도의 소안도 주민들에 의해 분연히 일어났다.

정지승/다큐사진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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