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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링스(Earthlings) 지구생명체 기록 프로젝트'는 지구생명체들이 있는 현장으로 가 그들의 삶을 글, 사진, 영상으로 기록합니다. 다양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희생당하는 인간 외 종들의 현실을 고발한 2005년 미국의 영화 <지구생명체>(Earthlings)에서 이름을 가져왔습니다. 농장, 바다, 동물원, 펫샵, 동물실험 연구소 등 인간의 목적을 위해 희생되거나 삶터를 빼앗긴 이들을 찾아가 기록원들이 보고, 듣고, 맡은 현실을 기록하여 연재합니다. [기자말]
서로의 몸에 기대어 실려 온 돼지들
 서로의 몸에 기대어 실려 온 돼지들
ⓒ 서울애니멀세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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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돼지를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처음으로 살아있는 돼지를 보았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나는 '돼지'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불판 위 선홍빛 삼겹살을 떠올렸다. 혹은 어린이 그림책에 나오는 귀여운 돼지 캐릭터를 떠올렸다. 하지만 2019년 어느 여름날, 수도권 외곽에 위치한 한 도살장에서 마주한 '실제 돼지'는 내가 알고 있던 돼지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그들은 돼지라고 느껴지기보다는 엉망으로 엉켜져 있는 커다랗고 뜨거운 살덩이들로 보였다. 그들은 살인적인 더위에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이 헐떡였고, 트럭 밖으로 그들의 열기가 느껴졌다. 가슴이 쿵쿵 뛰고 무서웠다.

사실 실제로 돼지들을 만나기 전, 영상과 글로 그들의 처지를 알고 왔지만, 찢겨진 귀, 잘려진 꼬리, 염증으로 뒤덮인 피부, 충혈된 눈 모든 것이 낯설었다. 외관만 보아도 그들은 태어나서 단 한 순간도 존중된 적이 없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은 겨우 6개월이 된 아기 돼지들이었다. 나는 예상하지 못한 첫 만남에 압도되어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돼지들의 주변만 맴돌다 도시로 돌아왔다.

살아있는 돼지를 처음 본 뒤에 나는 도시로 돌아가서 친구, 가족, 직장동료 등 주변인들에게 내가 본 눈물과 죽음을 증언했다. 하지만 "그래도 어떡해. 어쩔 수 없잖아",  "알고 싶지 않아", "도덕적인 척 하지 마", "더 중요한 일이 있어"라는 대답을 들었다.

말끔하게 동물의 죽음이 지워진 사회에서 동물의 고통을 이야기하면 종종 나는 외로워졌다. 성가신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아 말하는 걸 포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꽤 많은 시간이 지나고 외로운 나에게 필요한 건 동물에 대한 더 많은 언어와 경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트와 펜을 들고 도살장을 다시 가다
 
도살장 앞에서 돼지를 기다리는 모습
 도살장 앞에서 돼지를 기다리는 모습
ⓒ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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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이 지난 2021년 5월 21일, 나는 또다시 같은 도살장을 찾았다. 이번에는 그곳의 이야기를 기록할 사람들과 함께 갔다. 우리는 농장동물, 전시동물, 실험동물, 야생동물 등 인간에 의해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동물답게 살지 못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위해 모였다.

우리는 가장 먼저 '고기'로 태어난 동물들을 만나기 위해 노트와 카메라를 챙겨 도살장을 갔다. 코를 찌르는 오물 냄새와 도살장에서 생업을 이어가는 노동자들, 창문 하나 없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공장, 모두 2년 전 그 때 그대로였다. 우리가 도살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많은 돼지들이 계류장에 계류되어 있었다. 도살장 직원은 우리에게 "오늘 들어갈 트럭은 거의 다 들어갔다"고 전해주었다.

날이 더워지면 농장에서 도살장까지 수송되는 과정에서 돼지들이 폐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주 이른 새벽부터 도살장에 돼지들이 들어찬다. 이미 수십, 수백의 돼지들의 마지막을 애도할 기회를 놓쳤지만, 우리는 비 오는 도살장 앞에서 하염없이 돼지를 기다렸다.
   
도살장에 들어가기 직전 돼지에게 물을 주는 모습
 도살장에 들어가기 직전 돼지에게 물을 주는 모습
ⓒ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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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살아있는 돼지들을 실은 트럭이 도착했다. 빽빽하게 실려 온 돼지들은 속절없이 도살장으로 빨려 들어갔다. 돼지들은 이미 비명소리와 피 냄새로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는지 트럭에서 내리기를 주저했지만 직원은 쇠막대기로 찌르며 돼지들을 도살장 안으로 유도했다.

뒤이어 온 트럭은 도살장 안에 돼지들이 꽉 차 도살장 밖에서 한참을 대기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긴 시간을 달려왔을 돼지들은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우리는 조심스레 그들에게 다가갔다. 서로의 살을 맞대고 있던 돼지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몇 돼지가 코를 벌렁거리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꼭 호기심이 많은 어린이의 얼굴이었다.
 
눈이 마주친 돼지
 눈이 마주친 돼지
ⓒ 홍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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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 이리 와봐."

나는 눈으로 돼지에게 말을 걸었다. 나를 동그랗게 쳐다보던 한 명의 돼지가 뚜벅뚜벅 걸어와 야무지게 내가 건넨 물을 마신 뒤, 이빨이 다 뽑힌 잇몸으로 잘근잘근 페트병을 씹었다. 그리고 내 손등의 냄새를 맡으며 더운 숨을 내뿜었다.

나와 함께 사는 고양이, '여울'이가 내게 하는 행동 같았다. 여울이는 내가 집에 돌아오면, 내 손에서 새로운 냄새가 나는지 한참을 킁킁댄다. 나는 여울이의 배를 쓰다듬듯이 돼지의 따뜻한 피부를 만졌다. 다른 곳에서 우리가 만났더라면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부르고 반길 지 아주 잠깐 상상했다.

"이제 출발할게요. 나오세요."

5분도 채 안되게 머물다 트럭이 출발했다. 짧은 시간 동안 내가 그 돼지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부디 죽임을 당하는 과정에서 의식을 차리지 말아 달라는 당부뿐이었다.
 
도살장 입구에서 소독되는 트럭
 도살장 입구에서 소독되는 트럭
ⓒ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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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약 세 시간 동안 빗소리에 섞인 돼지들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끊이지 않는 비명 소리에 그것이 돼지의 목소리인지, 기계 소리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차가운 기계들과 쓰러지는 돼지들을 떠올렸다. 아마 영상으로 숱하게 보았던 어느 도살장의 도축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리라.

돼지들은 보통 가스실에서 질식되거나, 감전을 통해 정신을 잃거나, 가축총을 맞고 뇌가 마비된다. 그리고 거꾸로 매달린 채 목이 베여 피를 쏟은 후 뜨거운 물에 담긴다. 불운한 돼지는 죽음의 과정에서 제대로 의식을 잃지 못해 모든 고통을 오롯하게 느끼기도 한다. 공포영화보다 낭자한 그들의 피는 어디로 흘러갈지 한참을 생각했다. 그곳은 분명 지구에서 가장 슬픈 장소였다.

끊임 없이 단절되는 세상 속 어떤 연결

나는 절대 지워지지 않는 오물 냄새를 달고 집에 가 여울이를 쓰다듬었다. 여울이는 나에게 인간 외의 수많은 존재들 또한 고유한 '느끼는 존재'임을 알려준 소중한 고양이 선생님이다.

내가 도살장에 다녀온 날 밤, 여울이를 입양했던 나의 언니 '순진'은 여울이가 도살장 트럭 안에 갇힌 돼지로 변신한 꿈을 꾸었다. 그녀는 꿈속에서 만난 그 돼지는 분명 여울이었다고 했다. 소심하고, 겁이 많은 여울이가 죽게 되는 것이 너무 슬퍼서 꿈속에서 엉엉 울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 날 순진은 고양이를 먹지 않듯이 다른 동물 또한 먹지 않기로 결심했다.

꽁꽁 숨겨져 있는 도살장의 돼지가 우리의 삶에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돼지는 언제나 '고기'로 존재하는 것이 당연했고, 냉장고 속의 고기에서는 살아있는 돼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숨겨진 돼지의 모습을 드러내자 그가 살아 숨 쉬는 동물, 지금의 집단적인 학살과 폭력을 당해서는 안 되는 동물로 다시 존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수많은 연결됨을 기도하며, 다양한 생김새의 동물들을 만나고자 한다. 삶터를 빼앗기고, 유흥과 오락을 위해 감금당하며, 매분 매초 죽임을 당하는 가장 낮은 존재들에 대한 우리의 기록이 많은 인간 동물들에게 가닿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비질(vigil)은 폭력의 증인이 되어 기억하고 기록하여 공유하는 활동입니다. 철야 농성, 밤샘 기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로 도살장이나 공장식축산 농장, 수산 시장 등에 방문하여 폭력을 경험하는 동물들의 삶을 마주합니다. 토론토에서 시작되어 지금은 전 세계적인 애니멀 세이브 챕터가 비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태그:#어스링스, #돼지, #비질, #도살장, #서울애니멀세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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