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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집엔 마스크 나무가 있다.
 부모님 집엔 마스크 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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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집엔 마스크 나무가 있다. '병원 갈 때는 꼭 새 마스크를 쓰고 가셔야 한다'라는 나의 강력한 어필에 엄마와 아빠는 병원에 갈 때마다 새로운 마스크를 꺼내 사용하셨다. 하지만 한번 쓴 마스크는 버려지는 대신 거실에 놓인 화분의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다음번의 외출을 기다리고 있다.

잠깐 쓴 것을 왜 버리냐며, 동네 산책이나 시장 나들이를 갈 때 몇 번은 더 사용할 수 있다는 엄마와 아빠의 굳건한 의지는 그렇게 나뭇잎보다 마스크가 더 눈에 띄는 마스크 나무를 탄생시켰다.

'한 개를 다 쓰면 버리고, 다시 새 걸 꺼내라'는 나의 백 번째 잔소리가 무색하게 병원 나들이가 잦은 엄마 아빠는 지난번에 사용한 것을 미처 버리기도 전에 새 마스크를 꺼내 병원을 다녀왔다. 그렇게 하나둘 세상 밖으로 나온 마스크들이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려 거실의 나무에는 마스크 풍년이 들었다.

처음엔 마스크가 나무에 달려있는 모양새가 심히 눈에 거슬렸지만, 계속 보고 있으니 크리스마스 트리의 그로테스크한 버전 같기도 하고, 참 희한한 광경이다 싶었다. 그러다가도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엄마 아빠의 방식인 것 같아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다.

그런데 하얀 마스크들 속에 유독 검은색 마스크 하나가 눈에 띈다. 검은색 마스크는 왠지 어색하다며 흰색 마스크만 고집하셨던 아빠의 '최애템(가장 애정하는 아이템)'이란다. 얼굴이 작은 아빠는 웬만한 성인 마스크는 사이즈가 커서 헐렁거리기 일쑤였는데 이 마스크는 아빠 얼굴에 빈틈없이 딱 붙어 내려오지도 않고 쓰기가 편해서 요새 자주 사용한다고 했다.

지난해 공적마스크 제도 시행 때부터 하나둘 모아놓은 마스크에, 자식들이 보내준 마스크가 한가득인데 그 중에서 아빠의 선택을 받은 '최애템'이라니 브랜드 이름을 고이 적어뒀다. 안 그래도 다른 마스크들은 아빠한테 사이즈가 커서 맘이 놓이질 않았는데 마침 잘 됐다 싶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아빠가 사용하던 검은색 마스크와 평소에 좋아하던 색깔인 흰색 마스크를 일단 10매씩 구입했다. 색상별로 사이즈가 다른 마스크도 있어서 우선 사용해보고 사이즈나 사용감이 좋으면 그때 더 구매할 요량이었다. 하긴 엄마 아빠의 사용 속도로 보면 저 20개의 마스크만으로도 찬바람이 불기 전까지 거뜬히 사용할 수 있을 거 같기도 하다. 그래도 주문을 완료하고 나니 왠지 마음이 놓였다.

이상하다, 검은색 마스크가 없다 

며칠 전, 아빠가 화이자 2차 백신 접종을 했다. 아빠의 화이자 1차도, 엄마의 아스트라제네카 1차도 모두 아무런 부작용 없이 무사히 넘어갔지만, 친구의 엄마가 백신 부작용으로 한참을 고생하셨다는 이야기에 그냥 쉽사리 넘길 수가 없다. 혹시 모를 부작용이라도 생기면 당황해서 발을 동동 구를 부모님 생각에 이번에도 시골집에서 하룻밤 자기로 했다.

집에 도착하니 마스크 나무는 여전히 그 요상한 자태를 뽐내며 대여섯 개의 마스크를 매달고 있는데, 검은색 마스크가 없다. '응? 왜 그 마스크 안 쓰시지?' 의아하긴 했지만 워낙 달려있는 마스크들이 많으니 저것들을 먼저 쓰고 나중에 쓰시려나 보다 생각했다. 

다행히 백신 접종 후 이상증상 없이 무사히 한 고비를 넘긴 아빠에게 '혹시 평소와 다른 증상이 있으면 꼭 전화해야 한다'는 신신당부를 남기고 내 짐을 챙겨 서울로 바삐 돌아왔다. 분명히 시간이 많았던 것 같은데 고속버스 탈 시간만 되면 정신이 쏙 빠지게 바쁜 이상한 상대성 이론의 물리법칙을 몸소 체험하며 정신없이 시골집을 나와 터미널로 향했다.

조만간 또 내려올 시골집이지만, 늘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헛헛하다. 아쉬움에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는 엄마 아빠도 눈에 밟히고, 한동안 못 먹을 엄마의 한 끼 밥상도 벌써 그립다.
 
나의 가방 안에는 아빠가 몰래 넣어둔 마스크 10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의 가방 안에는 아빠가 몰래 넣어둔 마스크 10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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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와 서울. 그리 멀지도 않은 길이건만 세상 누구보다 저질 체력을 가진 나는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기진맥진이다. '아, 빨리 씻고 누워야지' 일단 짐을 정리해야겠다 싶어 짊어지고 갔던 가방을 열었더니 이게 웬걸, 아빠에게 사 준 마스크 10개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아, 이건 또 왜 넣어놨어' 짜증이 슬그머니 올라오려는 순간, 당신이 제일 좋아하고 다른 무엇보다 좋은 제품이라고 생각한 마스크를 딸에게 주고 싶어, 나 몰래 가방에 마스크를 넣어둔 아빠의 마음이 느껴져 짜증이 스르륵 사그라든다. 막내딸이 좋은 마스크를 쓰고 건강하게 이 시대를 무사히 견뎌내길 바라는 그 마음이었겠지. 왠지 모를 먹먹함이 가슴에 내려앉는다.

사랑을 담아, 서울과 청주를 오가는 마스크 

나는 다음 시골길에 다시 아빠에게 마스크를 가지고 가기 위해 차곡차곡 정리해놓는다. 쌓아놓은 마스크 위에는 엄마와 아빠도 좋은 마스크를 쓰고 이 어수선한 시기를 건강하게 거뜬히 이겨내길 바라는 나의 바람도 살포시 얹어놓았다. 이 마스크가 부디 엄마와 아빠를 지켜주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도 담아본다.

'사이좋은 형제'의 부모 자식판이랄까. 내 형제 가족이 배부르게 밥을 먹길 바라는 마음으로 서로의 집 앞에 쌀부대를 밤새 옮겨놓던 그 형제들처럼, 서로의 평안과 건강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은 마스크가 청주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다시 청주로 왔다 갔다 뱅뱅이를 치고 있다. 사랑을 가득 담은 뱅뱅이, 아마도 그 뱅뱅이 덕에 나와 우리 부모님은 오늘도 건강히 하루를 버티고 있는가 보다.

태그:#마스크, #마스크나무, #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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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에도 여전히 꿈을 꾸는, 철없는 어른아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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