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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엔 형제가 만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란 영화가 있다. 노인 복지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미국 텍사스의 건조하면서도 광활한 사막을 배경으로, '빼앗은 걸 지키려는' 자와 '지킨 걸 빼앗으려는' 자 간의 긴장된 게임을 다룬다. 마약 거래상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진 현장에서 카우보이 르웰린 모스는 우연히 이백만 달러가 들어있는 가방을 얻는다.

그러나 이 가방을 찾는 또 다른 이가 있었으니 바로 살인청부업자 안톤 쉬거다. 그는 산소통을 무기처럼 사용한다. 그는 우연의 논리를 믿는 듯, 상대방의 목숨을 살릴지 죽일지 판단할 때 '동전 던지기'를 한다. 그리고 이들의 뒤를 쫓는 보안관 벨까지 합세, 목숨 건 추격전이 벌어진다. 특히, 나이 든 보안관 벨은 과거의 필연성이나 확실성 논법과 달리 날이 갈수록 급격하게 변화하는 범죄와 폭력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서 가슴 깊이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낀다. 우연성과 불확실성이 현실을 더 많이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단순히 늙은 노인이 이 시대의 희생자나 약자가 되었다는 의미를 넘어, 그 모든 인물들이 함께 속해 있는 사회의 도덕과 윤리, 정의, 규범 등을 천연덕스럽게 보여주는 가운데, 그 어떤 완전한 희생자나 폭력, 정해진 규칙조차 없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말하는 것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포스터.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포스터.
ⓒ CJ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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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 영화는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코맥 매카시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그는 변모하는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다양한 역작을 발표했는데, 특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치밀한 긴장감과 곳곳에 숨겨진 블랙코미디를 통해 무법적이고 폭력적인 현실 세계의 선과 악에 대해 심오한 질문을 던진다.

달리 말해 행운과 불운, 효익과 비용, 합법과 불법, 평화와 폭력, 선과 악, 필연과 우연, 확실성과 불확실성 등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진 현실, 즉 현실은 이 모든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음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과거의 흑백논리나 이분법 논리로 정확한 현실 파악이 어렵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엘리스가 벨에게 한 말, "세월은 막을 수 없는 거야. 너를 기다려주지 않을 거고. 그게 바로 허무(인생무상)야"라는 말이나, 살인마 안토 쉬거가 한 말, "인생은 매순간이 갈림길이고 선택이지"라는 말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이제 이 영화를 염두에 두면서도 대한민국 상황을 한번 살펴보자. 1960년대 이래 한국은 경제성장 가도를 달리면서 '근면과 성실은 곧 빈곤 탈출'이라는 믿음을 갖게 했다. 특히 1980년대 중반 이후 민주노동운동의 성장과 더불어 이러한 믿음은 더욱 강고해졌다. 흥미롭게도 이 시기는 한국 경제가 가장 잘 나가던 시기로, 1986년부터 1996년까지의 약 10년간이었다. 돌이켜보건대 그 시기는 1987년 7-9월의 노동자대투쟁, 1991년의 전노협 결성, 1995년의 민주노총 설립이 이뤄지기도 한 때이면서, 경제성장률 역시 계속해서 10% 이상을 달렸다. 따라서 노동운동의 활성화와 더불어 높은 임금인상이 이뤄졌고, 또 임금인상이 되고 노동조건이 개선될수록 노동자의 근로의욕도 높아져 노동생산성도 덩달아 높아졌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이후로도 25년 이상이 흘렀다. 바야흐로 저성장, 마이너스 성장, 성장 정체, 축소 경제 시대다. 이제 1970~80년대의 20~30대 노동자들은 60~80대 '노인'들이 되었다. 과연 이들에게 '노인을 위한 나라'가 있는가?

물론, 기존 노동자 중에 집과 자동차 등을 소유하고 어느 정도 중산층의 삶을 영위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더 많은 이들은 지금도 허덕거린다. 게다가 어느 정도 성공한 노동자들, 이들은 과연 삶의 재미와 의미를 얼마나 느끼는가? 나아가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의 자신감 만만하던 '민주 노동운동' 정신을 일관되게 유지하며 사는 노동자는 얼마나 있는가?

특히, IMF 외환위기 이후 사람들의 일반적 정서는 '언제 잘릴지 모르니 아직 남아 있을 때 최대한으로 벌자', '노동조합조차 고용을 확실히 지켜준다는 보장이 없으니 한 시간이라도 더 일하자', '나 혼자 살아남기도 버거운데, 더 어려운 사람들과 연대하여 투쟁하는 것은 너무 힘들다.' 이런 식이다. 심지어 60대에 퇴직하고 70대나 80대가 되어도 이런저런 일자리를 찾아 돈을 벌려는 노인도 많다. 국가가 나서서 '노인 일자리'까지 마련해줄 정도다. 그렇다고 해서 '노인을 위한 나라'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다음 질문도 가능하다. '과연 청년을 위한 나라는 어디 있는가?' 실제로,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 노동력을 위한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드는 반면, 기존 노동자들은 노동시장을 잘 떠나지 않고 한사코 자기 자리를 오래 고수하려 한다. 중장년이나 노년들이 '옛날에는 말이야...'라든지 '나 때는 말이야...'는 식으로 긴 이야기를 풀 때마다 청년들 귀에는 대개 '꼰대' 소리다. 특히, 연공주의(나이나 경력을 기준으로 임금, 승진 등을 결정하는 방식)는 청년들에게 '무능하면서도 돈만 많이 받아가는' 논리로 비치기 쉽다.

"오늘날 20대는 집단적으로 억울하다"는 것이 최근 '공정성' 담론에 나오는 1990년대생 이야기다. 일자리만이 아니라 소득, 자산, 주거 문제 등 여러 지표에서 이들은 가장 낮은 곳을 차지한다. 이전 세대들에 비해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지만, 더 이상 '인적자본론'이 먹히지 않는다. 오랜 기간 취업준비생으로 세월을 보내고 힘겹게 취업해도 비정규직이 대다수다.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양질의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하다. 부동산 폭등은 '내 집 마련'의 꿈조차 포기하게 한다. 이팔청춘 젊은 시절에 해야 할 연애 시기도 놓친다. 부모인 586세대만 해도 사회적 지위 상승이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이제는 부모의 지위가 거의 그대로 대물림된다. 그러니 만사가 '심히 불공정하다'고 보는 것이다. '사다리 걷어차기'의 결과다. 그렇게 올라 탈 사다리 자체가 사라지니 사회적 불만이 속으로 쌓이면서 불특정 다수 내지 사회 전반을 향한 분노 또는 증오가 급증한다.

그렇다고 '사다리 자체' 즉, 사회구조가 만들어낸 모순이나 구조 자체를 바꾸려는 집단의지가 성숙해지는 것도 아니다. 사회 문제를 대개 '개인화'하기 때문이다. 2030 청년들이 주식이나 비트코인(가상화폐)에 쉽게 빠지는 것, 또 중장년이나 노년들에 대해 '라떼는 말이야' 식의 '꼰대'라며 비아냥거리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물론 2030 청년들의 '공정성' 담론에는 일리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다른 편에서는 자본의 논리에서 나온 '비용 대비 효익' 원칙을 내면화한 공정성이란 비판도 있다. 또 이주민, 동물, 생명, 소수자, 장애인, 여성, 노인 등에 대한 배려심이 빠진 '선택적 공정성'이란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결론적으로 '청년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명제를 부정할 수 없다.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
 
평택항에서 일하던 중 숨진 고 이선호 청년노동자 49재가 6월 9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앞에서 열린 가운데 참가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평택항에서 일하던 중 숨진 고 이선호 청년노동자 49재가 6월 9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앞에서 열린 가운데 참가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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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리를 해보자. 좋은 나라,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 그것은 남녀노소를 불문,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좋은 사회다. 남녀는 서로 존중하고 평등하게,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야 좋은 사회다. 청춘은 나름의 꿈을 키우면서도 진리, 정의, 자유의 정신으로 패기 있게 살아야 좋은 사회다. 노인은 마을마다 서 있는 고목나무처럼 가족이나 마을의 지킴이 역할을 하면서도 온 사회에 지혜와 경험을 풀어 사회를 더 풍요롭게 일굴 때 좋은 사회가 된다.

그러나 현실은 일(고용)과 돈(소득, 자산)을 둘러싸고 남녀노소가 경쟁과 투쟁을 벌이는 식으로 간다. 이런 현실에서 과연 노인을 위한 나라, 청년을 위한 나라는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과연 누가 이런 현실을 만들었는가? 그런 현실은 가까이는 재벌과 보수 권력층이 만들었고, 멀리는 일제 이후 대지주, 자본가, 독재 권력이 만들어 왔다. 이것을 나는 '재벌-국가 복합체'라 부른 바 있다. 결국, 자본이 문제다. 자본이 돈벌이를 위해 만든 사회적 틀(사다리 내지 피라미드 질서) 자체는 문제 삼지 않고, 오직 그 틀 안에서 서로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는 구성원들끼리 '내로남불' 식으로 싸우면 절대로 '공정'한 세상은 열리지 않는다.

따라서 남녀 구분을 넘어, 노인을 위한 나라뿐 아니라 청년을 위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선, 상호 경쟁과 타자 희생 위에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의 게임 자체를 넘어 새로운 세상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상상력의 출발점은 가족이나 마을 공동체다.

가족을 보라. 어느 구성원 하나 소중하지 않은 이가 있는가? 마을 역시 남녀노소가 어우러지는 공간이다. (서아프리카 라이베리아와 가나 사이에 있는) 코트디부아르의 격언 중엔 '노인 한 분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불에 타는 것과 같다'는 얘기가 있다. 따지고 보면, 전통적인 농어촌엔 노인들이 그 지혜로움으로 온 마을과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성과 사회는 노인보다 팔팔한 청년 노동력을 좋아하고, 그것조차 이윤에 더 많이 기여하는, 유능하고 충실한 청년 노동력을 더 좋아한다. 그러니 핵심 노동력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들은 자본에게 '기생충'으로 보일 뿐이다. 이러한 능력주의와 성과주의가 온 사회를 지배하게 되면, 하다못해 길에 나가서조차 속도 빠른 자동차를 방해하는 존재는 위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처럼 가차 없는 죽임을 당하기 쉽고, 보험금이나 돈 때문에 죽어야 하는 생명체가 된다. 나중에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조차 불가한 상황이 된다. 그런 상황이니 2018년 한국의 80대 이상 노인 자살율이 10만 명 당 70명(그 중 남성은 139명)으로 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반면, 이런 사례들도 있다. 하나는 충남 태안의 만수동 마을 (56가구, 126명) 사례로 굴, 바지락 등을 채취해서 거둔 수입금으로 80세 이상 고령자, 장기 입원자, 장애자 등에 연 300만원의 마을연금을 주는 사례다. 이들은 젊을 때 일하고 나이 들면 마을로부터 부양을 받는다. 두 번째는 경기도 포천의 장독대 마을 사례다. 이곳은 한탄강댐 수몰민 등 25가구가 모여 사는데, 연 2만 명의 관광객이 몰리는 체험마을, 음식마을이다. 그 수익 중 일부를 노인 7명에게 연금으로 주고 있다. 이 역시 온 마을이 한 식구처럼 사는 사례로, 노인이 되면 온 마을로부터 지원과 사랑을 받는다.

요컨대 청년을 위한 나라가 되어야 노인을 위한 나라도 되고, 역으로 노인을 위한 나라가 돼야 청년을 위한 나라도 되는 셈이다. 그러니 청년 세대와 노인 세대를 구분 짓고 대결 구조로 파악하여 상호 불신과 갈등을 조장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달리 말해, 자본의 논리인 성과나 능력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고 그 가치에 따라 대우하는 시각 자체를 탈피하여, 인간의 논리인 우애와 연대로 사람의 존재와 관계 자체를 존중하는 시각을 가질 때, 비로소 개인이나 사회 구조 전반이 사람 냄새 나는 공간으로 재편된다.

문제는 이미 우리 각 개인이 자기 심성과 습속 안에 단단히 내면화한 자본의 논리를 어떻게 털어낼 수 있는가이다. 이는 결코 쉽지도 않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 출발점은 정직한 성찰과 꾸준한 실천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대전충남인권연대 뉴스레터에도 실립니다.


태그:#노인, #청년, #대전충남인권연대 , #자본의 논리, #사회구조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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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충남인권연대는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소중한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 세계평화의 기본임을 천명한 세계인권선언(1948.12.10)의 정신에 따라 대전충남지역의 인권현실을 개선시키기 위해 인권상담과 교육, 권력기관에 의한 인권 피해자 구제활동 등을 펼치는 인권운동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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