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청춘선거> 고은영 인터뷰 이미지

ⓒ 아이엠(eye m)

 
"고은영의 실패, 고은영의 좌절이 우리의 좌절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정당 지지율 0.8%, 후보 지지율은 1%. 지방선거 한 달을 앞둔 시점, 초라했던 지지율로 시작해 기적을 써내려갔던 청년 후보가 있었다. 비록 선거에서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이들의 도전은 보는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전했다.

17일 개봉한 영화 <청춘 선거>는 제주도 첫 여성 도지사 후보로 출마한 만 32세 고은영의 좌충우돌 선거운동기를 담았다. 지난 9일 서울 마포구 모처에서 그 주인공 고은영씨를 만났다.

2017년부터 당원들과 함께 지방선거를 준비해온 고은영씨는 녹색당원, 시민 경선인단의 투표를 통해 도지사 후보로 선출됐다. 그는 제주도지사 투표용지에 이름을 올린 첫 여성이고 청년이자, 이주민이었지만 순전히 본인의 뜻에 의한 건 아니었다. 영화에도 선거운동원이 "고은영은 스스로 후보가 되는 걸 싫어했다"고 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에 대해 그는 "제 정체성을 아주 빠른 속도로 바꿔야 하는 시기여서 고통스러웠다"고 설명했다.

"저는 원래 언론홍보대행사에서 일하는 직장인이었다. 그러던 제가 플레이어로서 거기 앉아있게 된 거다. 머리로는 상황을 이해하고 있지만 정치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갑자기 생길 수는 없지 않나. 몇개월 동안 그 과정이 몹시 고통스러웠다. 너무나 빨랐고. 영화에서 '(후보가 되는 걸) 굉장히 싫어했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선거운동 후반부에는 인정했지. 이제 앞으로의 삶이 달라지겠구나. 도민들의 반응, 언론 주목도를 저도 피부로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 같다."

영화를 통해 선거 과정을 다시금 돌아보게 된 고은영씨는 스크린 속 자신에게 여러 번 "그만해"를 외치고 싶었다며 웃었다. 선거에 점점 몰입했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선거운동 기간 후반을 떠올리며 "오수경 비례대표 후보의 도 의회 진입이 가시화됐었고 실제로 들어갈 뻔 했다. 그때 고은영을 불태워서 (오수경이) 의회에 들어간다는 마음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캠프원들이 선거 끝나고 이야기하더라. 그때 (고)은영님 눈이 이글이글 했다고. 미쳐가지고(웃음). 살짝 미친 듯한 얼굴이 영화에 되게 많이 나온다. 보면서 울었다가 발차기를 했다가 그러고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입으로 뱉은 말에는 힘이 있다"
 
 영화 <청춘선거> 고은영 인터뷰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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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영화에서 그는 "만 32세 여성 청년이 제주도지사가 되어서 제주도청 집무실에 들어갈 겁니다"라고 확신에 찬 모습으로 선언한다. 당시 고은영 후보와 녹색당 지지율은 TV토론 등 여러 활약을 통해 크게 올랐음에도 5% 내외에 불과했는데도 말이다. "입으로 뱉은 말에는 힘이 있다." 고은영씨는 그 확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저는 말이 가진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말이 언론으로 보도되는 사람은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당시엔 제가 민주당이나 다른 당의 후보들과 통합할 거라는 예측도 많았다. 민주당에서 만나고 싶다는 연락도 왔었고. 생방송 인터뷰에서 '완주하실 겁니까? 통합에 대한 여지는 없으십니까?'라는 질문도 받았다. 제주도지사 후보로 낸 기탁금만 5천만 원이다. 저는 350만 원짜리 연세에 사는데. 그때 눈을 똑바로 뜨면서 대답했다. 저의 목표는 완주가 아니라 당선이다. 누군가가 물어보면 '집무실에 들어갈 겁니다, 관사 들어갈 겁니다'라고 말하고 다녔던 것 같다. 그런 말이 만들어내는 상상이 있지 않나. 그런 상상을 사람들한테 심어주는 역할을 마땅히 제가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 말이 가진 힘을 사실로 만들어내는 것. 이 다음에는 또다른 여성들이, 청년들이 도전하고 나처럼 말하겠지. 그래야 다음이 생기니까."

2018년 제주도지사 지방선거는 원희룡 지사의 압승으로 끝이 났지만, 고은영 후보는 3.5%의 득표율로 제1야당을 제치고 전체 3위를 기록하는 쾌거를 이뤘다. 아쉽게 도 의회 입성에는 실패했지만 정당 지지율도 4.87%를 기록하며 가능성을 남겼다. 그러나 현재 고은영씨는 제주녹색당을 탈당하고 완전한 자연인으로 돌아온 상태다. 그는 "여전히 지지하는 정당은 녹색당이 유일하고 여전히 당을 사랑한다. 후원회원이 되어서 당비보다 더 많은 후원금을 내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플레이어(정치인)로 나설 생각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비례연합정당 논란, 당내 성폭력 사건 등 지방선거 이후 녹색당은 거센 후폭풍을 겪었고 당시 고은영씨는 2020년 총선에서 선거대책본부장으로 나서 수습을 도모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 대해 그는 "제가 녹색당을 사랑하는 방식이 구식이었다"고 표현했다. 

"문제를 외부에 알리지 않고 해결하려고 하고 이해하고 넘어가려고 하고 그랬던 것 같다. 그런 방식은 적폐를 낳는 '올드 스쿨'과 다름 없었다. 제가 30대, 젊은 여성 청년인 것과 상관 없이 제게 그런 기제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당에서 역할을 더 이상 할 수 없다. 녹색당에겐 리부트가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했고 그걸 나같은 사람이 하면 안 된다고 느꼈다. 굉장히 처절한 자기 반성이 있었다. 그럼에도 저는 여전히 사회가 진전되길 바란다. 타인에게 신뢰를 회복하는 사회가 빨리 왔으면 좋겠고. 저는 아직도 사회를 낙관하고 정치를 긍정한다. 언젠가 누군가(새로운 정치인)를 도와주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

여전히 제주도민으로 살고 있다는 고은영씨는 이날 인터뷰를 시작하며 '동네 백수 건달'이라고 쓰인 명함을 건넸다. 생계를 위해 하고 있는 일은 있지만 지인들에겐 "나 백수잖아"라고 늘 얘기한다는 그는 동네에 꼭 백수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한참 강변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겐 언제나 다음 인생이 있고 나는 다음 페이지를 잘 열기 위해서 지금 숨을 고르는 시간"이라고 강조했다. 

"제주에서 최근 미래 사회에 대해 발제를 한 적이 있었다. 제가 꼭 소개말로 동네 백수를 적어달라고 요청을 드렸거든. 전직 제주도지사 후보 이런 거 말고. 그런데 주최 측에서 차마 그렇게 못 쓰겠다 싶으셨는지 시민이라고 쓰셨더라(웃음). 이게 뭐야, 생각했다. 공동체를 유지하는 사람은 백수다. 동네의 누나, 형이 아이들에게 놀이를 전수하고 생존 방식을 전수하던 게 과거의 전통적인 집단 육아였다. 백수라는 말은 하얗게 빈손이라는 뜻인데, 그건 뭐든 할 수 있다는 거다. 지금 그렇게 지낸다. 그래서 저한테는 동네 백수건달이라고 하는 게 되게 큰 의미다. 제가 그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고 갚아드릴 시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동네의 SOS를 다 수용하고 조력하는 중이다. 그러면서 앞으로 다가올 40대의 10년을 어떻게 살 건지 고민하고 있다."

"우려되는 건, 조직의 압력"
 
 영화 <청춘선거> 고은영 인터뷰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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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년간 존재감을 입증한 30대 청년 정치인들이 여럿 등장했고, 지난해 총선에는 20대, 30대의 젊은 국회의원들도 13명이나 탄생했다. 최근에는 헌정사상 최초로 30대 정치인이 제1야당 대표로 선출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정치권 세대교체 바람이 시작됐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에 대해 고은영씨는 "이준석 당 대표가 (역할을) 잘했으면 좋겠다. 물론 작정하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지금 그러고 싶지 않다"면서도 "다만 우려되는 건, 조직의 압력을 겪게 될 거다. 제가 올드 스쿨이었던 것처럼. 그 안에서 일을 하고 부딪히지 않고서는 예측하기 힘든 거다. 사회의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하지만, 그게 쉽지 않은 건 구조가 가진 압력이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기성세대의 압력 속에서 이준석 대표가 정말로 본인이 원하는 걸 잘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우려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청년 정치인들이 당을 넘어 연대하는 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저는 청년 정치인들이 어느 순간에 연대하고 흩어지는 포인트들을 잘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의당이 대선 연령대 하향 법안을 류호정 의원, 장혜영 의원과 발의하겠다고 밝혔지 않나. 방향성 제시를 했는데, 이런 사안에는 (당에 관계없이) 몰려들었음 좋겠다. 지금 청년 정치인들이 유연하게 굴 수 있어야 한다. 2019년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의회 연설하던 날, 여성 의원들이 당에 관계 없이 모두 흰옷을 맞춰 입고 온 적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여성혐오적 발언들을 자주 하니까 그에 대한 항의 표시였다. 그리고 여성 일자리 문제에서 진전된 정책이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여성 의원들이 일동 다 기립해서 박수를 쳤다. 쇼맨십의 일부겠지만 그런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이 중요하지 않을 때가 있다. 고 노회찬 의원이 외계인이 들어오면 자유한국당이랑도 손을 잡아야지라고 말하지 않았나. 청년 정치인들이 그래야 할 때가 온다고 생각하거든. 외부의 압력에 함께 저항해야 하는 때에 힘을 합쳐 잘 대항했으면 좋겠다."
청춘선거 고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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