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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새벽 시간은 도대체 누가 보낸 거지? 무엇을 먹고 이렇게 힘이 좋은 거야. 밤새 천근만근이던 몸이 저절로 일어나네."

텃밭에 가보자고 깨우는 남편 말에 중얼거리니, "우리 각시가 요즘 시화엽서 만든다고 필사만 하더니 시인이 다 됐네 그려"라고 응수했다.

예전 텃밭 자리에는 작은 저수지가 있어서 물 걱정을 안 했는데, 새로 자리 잡은 곳은 그렇지 않아서 텃밭 가족들의 밭자리마다 물통들로 경계를 두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파종이나 모종을 한 다음 날은 꼭 비가 왔고, 물통들은 아직도 경계선 보초로만 서 있다.

올해도 감자, 고추, 대파, 가지, 고구마, 호박, 토마토, 오이 등을 포함해서 열매 작물로만 10여 종을 심었다. 상추, 쑥갓, 깻잎 등의 잎채소들은 지인들의 밭에서 따다 먹고, 내 밭에서 나오는 열매들은 '잘 수확해서 올해도 바자회 기금을 모아야지'라고 텃밭 가족들이 응원해 준다.

텃밭에 작물을 심고 수확해서 나온 수익금으로 겨울철이면 연탄이나 쌀을 사서 어려운 가정에게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다. 물론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니고, 학생 동아리 가족들과 많은 지인들의 봉사와 협조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작물의 첫 번째 수확물은 적은 양이나마 그분들에게 먼저 주고 싶어서 마음을 쓴다.
 
텃밭에 갈 때마다, 누구에게 무엇을 줄까 생각하는 즐거움에 빠진다.
▲ 오이 텃밭에 갈 때마다, 누구에게 무엇을 줄까 생각하는 즐거움에 빠진다.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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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전부터 부쩍 열매들이 부산스럽게 모습을 보였다. 가장 먼저 얼굴 내민 오이는 농약 한번 안 쳤는데, 어느새 내 팔뚝만 하게 자라서 혹시 변종이 아닌가 했다. 싱싱하고 풋풋한 오이맛과 향이 참 좋았다. 친정엄마에게 첫 번째로 작물을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오이 모종 5개 3000원을 주고 심었는데, 아마도 한 여름 내내 건강한 식단의 주인으로 나올 것이다. 특히 엄마의 오이냉채는 여름 과일과 함께 어울려 텃밭에서 흘리는 땀의 몇 배를 보충하고도 남을 것이기에 얼른 엄마에게 아부차 가져다 드렸다.

어느 날은 상추 아욱 등 갖가지 잎채소를 담으면서 필사시화엽서를 함께 만들며 봉사하는 이숙자 작가님을 생각했다. 일부러 쌈채소 백반도 사 먹으러 나가는데 이 쌈을 가져다 드리면 한 끼 정도 맛나게 드시겠다 싶었다. 요즘 치아 진료를 받으시느라 고생하신다고 했던 말도 생각났고, 언제나 삶의 연륜으로 보여주는 작가님의 아름다운 모습에 눈도장을 찍고 싶었다.

또 어느 날은 두 번째 거둔 오이와 잎채소를 가지고 오랫동안 바자회기금을 모으는데 후원해주는 후배의 집에 도착했다. 텃밭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후배 얼굴도 보고, 직접 설명도 하며, 올해도 많은 도움을 부탁하려는 속셈을 그 후배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며칠 전에는 남편이 열심히 대나무 어린 죽순을 캐고 있길래, 먹을 것 있으니 나중에 하자고 했다. 죽순의 부드러움이 사라지기 전에 골고루 나눠야 한다고, 요즘 당신 일을 가장 많이 도와주는 사람에게 선물하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작물은 한 후배에게 주어야지 싶었는데, 맛난 죽순까지 주게 되어서 다행스러웠다.

남편의 배려심은 나를 한층 더 빛나게 해준다. 이 밖에도 텃밭에 갈 때마다 생각나는 지인들에게 한 줌의 쌈이라도 선물을 하니, 내 마음에 넘쳐나는 이 축복은 과연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분명하다.
 
텃밭 작물들에게서 피어난 꽃들로 치유되는 일상
▲ 자주꽃은 자주감자, 하얀꽃은 하얀감자 텃밭 작물들에게서 피어난 꽃들로 치유되는 일상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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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비로 오늘은 가을날 하늘 마냥 청명하기 그지 없었다. 유월이면 본격적으로 얼굴 내미는 감자들의 세상. 감자 싹을 심을 때부터 감자의 매력은 매 순간 끊임이 없었다.

옆에 있는 고추 모종도 살펴봐야 하는데, 시기가 있는지라 감자에만 눈길 주고 마음주는 정성을 더했다. 언뜻 언뜻 표토 위로 올라온 어린 애기 손등 모양의 볼록한 감자알이 보였다. 햇빛을 맞으면 금방 시퍼렇게 멍이 들까봐 일일이 흙으로 덮어주며 조금만 더 영글어라 하고 달래주었다.

시를 필사 하니, 동시 하나쯤은 암기하고 있어야지 싶어서 오늘은 동요시인 권태응(1918-1951) <감자꽃>을 큰 소리로 읽어보았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


딱 맞는 말이다. 내 밭의 감자도 자주 꽃을 핀 것은 자주 감자일 것이고, 하얀꽃을 핀 것은 하얀 감자일 것이다. 감자 씨를 살 때 상자 위에 수미산 감자라고 써 있었으니, 포슬포슬하고 껍질이 얇아 혀에서 살살 녹을 만큼의 부드러운 살결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올 것이다.

작년에는 코로나 와중에도 첫 양파의 수확을 알리니 무려 10만 원이나 불우이웃 기부금으로 모였다. 올해는 아마도 감자의 첫 수확물을 거두어서 지인들에게 홍보할 것이다.

"여러분들이 사시는 이 감자가 겨울철 독거노인과 불우이웃의 연탄과 밥쌀의 씨앗이 될 거예요. 따뜻한 기운을 받고 하지에 태어난 감자의 기운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주는 시간입니다."

여섯 두렁을 돌아다니며, 남편은 풀매기에 땀을 흘리고, 나는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찍사 노릇만 하고 다녔다. 말로만 농사를 짓는 것 같아서 중간중간 남편에게 미안하다고 하니 "당신이 없으면 내가 왜 여기 있겄는가. 열심히 살피고 따뜻하게 좋은 글도 쓰소"라고 답했다. 참으로 멋진 동반자이다. 나와 아이들에게 따뜻한 말과 행동을 보여주는 바른 사람이다.

오늘부터 당분간 비 소식이 없다고 한다. 밭 경계에 서 있는 물통들이 제 역할을 할 때가 왔다. 부지런한 텃밭 가족들이 너나 없이 서로 물통을 채워 놓고, 서로 자기 열매 갖다 먹으라 한다. 요즘 봉사 활동을 포함해서 여러 가지 일을 하다보니 뜬금없이 며칠 사라졌다 왔으면 좋겠다 싶을 때가 많다. 그런데, 유월의 새벽 시간 텃밭으로의 발걸음은 내 온몸을 푸른 샤워장으로 이끌어 준다.

텃밭 일을 노동으로 보면 스트레스라고 할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겐 텃밭이 최상의 힐링 장소이다. 씨앗의 위대함을 아는 지혜, 생명을 키우는 기쁨, 수확을 나누는 행복, 함께 잘 살자는 따뜻한 지인들과의 공동체적 삶. 내게 주어진 이런 일상을 그 어디에서 얻을 수가 있을까!

태그:#텃밭일기, #나눔바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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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희망은 어디에서 올까요. 무지개 너머에서 올까요. 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임을 알아요. 그것도 바로 내 안에. 내 몸과 오감이 부딪히는 곳곳에 있어요. 비록 여리더라도 한줄기 햇빛이 있는 곳. 작지만 정의의 씨앗이 움트기 하는 곳. 언제라도 부당함을 소리칠 수 있는 곳. 그곳에서 일상이 주는 행복과 희망 얘기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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