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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도서관에서 아이들과 수업을 한 지 어언 3년째가 되었다. 말 한마디 지지 않으려고 아웅다웅 거리던 초등학생 아이들은 어느덧 훌쩍 자라 서로 인삿말조차 나누기 쑥쓰러워하는 사춘기의 청소년들이 되었다.

방과 후에 진행되는 인문학 수업, 하루 종일 수동적인 수업을 받던 아이들에게 생동감 넘치는 지적 자극의 기회를 줄 수 있을까가 수업의 화두였다. 교과서 종이책과 씨름하던 아이들에게 또다시 종잇장을 들이밀며 무언가를 읽고 쓰게 만든다는 건 어쩐지 고문 같았다.

그래서 함께 요리를 하고 레시피를 적어보기도 하고, 재미를 찾는 데 익숙해진 인터넷의 세계에서 지적 탐구의 퍼즐을 함께 풀어보려고도 했다. 오합지졸이라도 연극도 해보고, 갖가지 게임으로 왁자지껄했던 시간, 하지만 코로나는 그마저도 장기 휴면 상태에 빠지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다시 시작된 수업, 그런데 '줌'이라는 낯선 환경이었다.

역동적인 수업 과정을 평면적인 화면에서 어떻게 풀어내야 할까? 그 고민의 답을 '그림책'에서 찾아보았다. 글씨는 있지만 글자 책에 비해 많지 않다. 대신, 사춘기 아이들의 감수성을 한껏 북돋워 줄 아름다운 그림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두꺼운 철학책도 도서관에서 빌려 간다는 아이들이 그림책을 시시해 하면 어쩌나 걱정도 되었다. <첫 번째 질문>으로 시작된 그림책 수업, 지금까지와는 다른 질문들에 아이들은 낯설어했지만 감사하게도 그 생소한 질문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줬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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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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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 보훈의 달의 그림책, <전쟁>

그렇게 시작된 수업, 6월을 맞이하여 함께 본 책은 아나이스 보즐라드의 <전쟁>이었다. 지금의 청소년들에게 호국 보훈의 달 6월은 생소하다. 아니 '전쟁' 자체가 낯설다. 그런 아이들에게 6월을 맞이하여 '전쟁'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림책이 무엇이 좋을까 하고 고민했다. 과연 청소년들과 '전쟁'이란 주제를 가지고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학교에서 역사를 배운다는 학생들에게 요즘 배우는 걸 물어보았다. 세계사에서 백년 전쟁을 배우는 중이라는 답이 왔다. 
 
'전쟁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남자들은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저녁이면 그들은 사망자들과 부상자들을 짊어지고 돌아왔습니다. 
너무 오래전부터 전쟁을 하고 있는 중이라 
전쟁이 왜 시작되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림책 <전쟁>은 이렇게 시작된다. 학교에서 지금 배우는,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 전쟁'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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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속에는 빨강 나라와 파랑 나라가 나온다. 매일 매일 전쟁을 벌이던 빨강 나라의 국왕 빅토르 2세는 결국 군인이 80명밖에 남지 않았다. 파랑 나라의 아르망 12세 역시 마찬가지의 처지였다. 그런데 빨강 나라의 왕자 쥘은 파랑 나라의 왕자 파비앙에게 편지를 보낸다.
 
우리 아버지들에게는 이제 군인들이 별로 없다. 그러니 사나이답게 
무기를 들고 말에 오르라. 내일 아침 전쟁터에서 너를 기다리겠다. 
우리 둘이 결투를 해서 이긴 쪽이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하자 .

그림책 <전쟁>의 주인공들은 수업을 하는 학생들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파비앙과 쥘이었다. 그래서 수업은 한 장씩 읽어가며 뒷이야기를 생각해 보는 식으로 진행했다. 내가 쥘이라면, 내가 파비앙이라면, 이런 식으로 상상이지만 스스로 전쟁의 운명 속에서 던져져 '전쟁'을 생각해보고, '운명'의 결정권을 가지도록 해보았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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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롭게 결투를 신청했던 쥘, 반면에 전쟁에 관심도 없던 파비앙, 하지만 운명은 아이러니하게도 파비앙의 손을 들어준다. 말을 타기 싫어 암양을 타고 결투 장소에 나갔던 파비앙, 그런데 파비앙이 타고 나간 말에 쥘의 말이 놀라는 바람에 그만 쥘이 죽어버리고 만 것이다. 해프닝 같은 장면, 하지만 결국 전쟁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거기엔 정의도, 논리도 없다. 그저 애꿎은 죽음만이 있을 뿐. 

하지만 전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용감하지 않았다고 파비앙은 쫓겨났고, 80명밖에 남지 않은 군인들은 다시 전쟁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걸 보고 전쟁에 무심하던 파비앙은 결심을 한다. 뭔가를 해야겠다고. 그리고 두 통의 편지를 쓴다. 
 
저는 바빌 4세가 다스리고 있는 노랑 나라로 왔습니다. 
제게는 이제 굉장한 군대가 있습니다. 
자, 사나이답게 무기를 들고 말에 오르십시오. 
내일 아침 전쟁터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다음날 빨강 나라와 파랑 나라의 군대는 전쟁터로 향했다. 그리고 두 나라의 군대는 마주쳤다. 서로 받은 편지를 비교해 본 두 나라의 국왕, 노랑 나라의 전력을 모르는 두 나라의 국왕은 동맹을 맺기로 했다.

첫날, 노랑 나라를 기다리던 두 나라 군인들은 함께 샌드위치를 먹었다. 다음 날 천막을 치고 모닥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솥과 냄비를 들고 와 요리를 하고, 여자들이, 아이들이, 소가, 닭이, 돼지가 오고, 큰아이들은 장사를 시작했다. 열흘이 지나자 전쟁터는 마을이 되었다. 

그렇게 군대도 없던 파비앙은 전쟁을 끝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필요했던 건 더 많은 군인이, 더 용맹한 군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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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주는 교훈

그림책 <전쟁>을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교훈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이 그림책을 통해 깨닫게 되는 건 애초에 전쟁을 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도 없는 전쟁을 하기 위해 빨강 나라와 파랑 나라는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목숨을 희생시켜왔던 것이다. 

전쟁의 무용함을 함께 공감한 학생들과 함께 세계 지도를 펼치고 지금도 전쟁 중인 나라들을 찾아보았다. 아시아, 아프리카, 중앙 아시아 등등 찾아보니 끝이 없었다. 그 이유도 제각각이지만, 그림책을 함께 본 우리는 이제 안다. 거기엔 정말 전쟁을 꼭 해야 할 이유가 없음을. 세상에 해야 하는 전쟁은 없다. 그저 지금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 있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https://blog.naver.com/cucumberjh 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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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이스 보즐라드 (글), 아나이스 보즐라드 (그림), 최윤정 (옮긴이), 비룡소(2001)


태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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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그리고 그림책, 다시 길을 떠나봅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너만의 '달'을 만나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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