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화려한 액션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영화가 있다. 그런가 하면 심장을 조여오는 사건이 전개되지 않아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등장인물이 없어도, 긴 여운을 남기는 영화가 있다. 소시민의 평범한 일상을 잔잔하게 전하며 감동으로 다가온 특별한 영화가 내게도 있다. 일본에서 2014년 첫 개봉한 <리틀 포레스트>는 앞으로도 내 기억에 오랫동안 남을 영화다. 

이 영화는 일본의 작은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아름다운 사계를 담고 있어 한 장면 한 장면 놓치고 싶지 않을 만큼 영상미가 뛰어나다. 영화 전반에 걸쳐 소개되는 계절 요리들 또한 관객의 몰입도를 높인다. 산과 들과 강에서 제철에 얻거나 저장한 식재료로 만든 요리는 이 영화를 접한 관객이라면 쉽게 매료되어 한 번쯤은 따라 해 보고 싶어진다.
 
6월 초부터 빨갛게 익기 시작한 보리수나무 열매가 탐스럽다.
 6월 초부터 빨갛게 익기 시작한 보리수나무 열매가 탐스럽다.
ⓒ 박진희

관련사진보기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 여름 편에 세 번째로 소개된 요리는 수유나무 열매로 만든 잼이었다. 이 영화에서 수유나무 열매라고 소개한 것은 우리나라의 보리수 열매를 말하며, 충청도에서는 흔히 '보리똥'이라고 부른다.

보리똥은 5월 중순부터 연두색, 노란색, 주황색 순으로 예쁘게 익어간다. 6월 초순이 되자 농염한 빨간 열매가 가지마다 대롱대롱 매달려 여간 탐스럽지 않다. 다른 과일과 비교해 시고 떫은 맛이 강해 좋아하는 사람이 적은 과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며칠 전, 검은 봉지 가득 보리똥을 따던 이웃집 아저씨가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다.

"우리 집사람이 직장을 다녀요. 거기 동남아시아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이 많은데, 이걸 그렇게 좋아한다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냥은 못 먹는 청매실도 뽀개서 (자기네 나라에서 갖고 온 ) 소스 찍어 그냥 먹는다대. 이게 개량종이라 시금털털하잖여유? 그런데도 그냥들 맛있다고 한대서 따 보낼라고."

풍문에는 공주시에서 심었다고도 하고, 몇 년 전 동네 뒷산 인근에 이사 온 할머님 댁에서 심었다고도 하는데, 산어귀에 여남은 그루의 개량종 보리수가 심어져 있다. 이 사람 저 사람 따먹으라고 심은 나무에 씨알 굵은 열매가 익어가니, 오가는 사람들이 한두 개씩 따서는 먹어 본다. 동네 주민들 중 더러는 바구니나 비닐 주머니를 챙겨와서 한참을 까치발 서가며 따가기도 한다.

일 년에 몇 번씩 리플레이하며 일본판 <리틀 포레스트>를 보는 터라 그간 몇 차례 '올여름에는 하늘이 두 쪽 나도 보리똥잼을 만들겠노라' 각오를 다져왔다. 지난 6월 초, 산에 올랐다가 할머님 댁 잘 익은 보리수 열매를 발견하고 한 바구니 그득 따와 봤다.
 
보리수나무 열매인 '보리똥'은 시고 떫은 맛이 강해서 잼으로 잘 만들어 먹지는 않는다.
 보리수나무 열매인 "보리똥"은 시고 떫은 맛이 강해서 잼으로 잘 만들어 먹지는 않는다.
ⓒ 박진희

관련사진보기

 
영화 주인공의 내레이션을 통해 보리똥으로 잼을 만들 때 씨 제거에 손이 많이 간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마음의 준비는 해뒀지만, 잘 익은 보리똥은 씨를 바르려니 얼굴이며 바닥으로 과즙이 튀기 일쑤여서 애를 좀 먹었다.

영화에서는 거론하지 않았지만, 주인공이 서두르지 않고 면이 넓은 나무 주걱으로 열매를 으깨가며 씨를 빼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예쁜 영상이나 사진으로 남길 요량이 아니라면 SNS 요리 고수들이 알려주는 대로 비닐장갑을 끼고 체에 문대가며 조몰락거리면 눈 깜짝할 새에 끝나는 작업이다.

조심스레 씨를 골라내려니 시간이 지날수록 손목이며 손가락 마디마디가 저려왔다. '너무 욕심내서 많이 따왔나?' 후회가 됐다. 그러나 힘들게 씨를 골라내고 났더니 과즙이 반, 씨가 반이었다. 어설프게 따왔으면 일은 일대로 하고, 한 사람 코에 붙일 것도 없을 뻔했다.
 
보리수나무 열매즙을 끓이면 하얀 거품이 생기는데, 잘 걷어내야 떫은 맛이 줄어든다.
 보리수나무 열매즙을 끓이면 하얀 거품이 생기는데, 잘 걷어내야 떫은 맛이 줄어든다.
ⓒ 박진희

관련사진보기

 
사투 끝에 얻은 보리똥 과즙을 냄비에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끓일수록 하얀 거품이 올라왔다. 보리똥이 가진 떫은 맛을 줄이려면 이 하얀 거품을 걷어내고 자주 젓지 말아야 한다기에 불 앞에 지키고 앉아 거품이 생기는 족족 걷어내고 또 걷어냈다.

흰 거품이 덜 보이자 설탕을 넣어 봤다. 영화 주인공은 강한 단맛이 싫어서 과즙 중량의 60%만 설탕을 넣었는데, 나는 1:1을 고수했다. 처음 만들어 보는 데다 이제껏 수고한 게 억울해서라도 절대로 실패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고도 불안하여 끓이는 중간중간 설탕을 찔끔찔끔 추가해서 넣기도 했다. 요리 고수들은 설탕을 줄이고 대신에 꿀을 첨가하기도 한단다.

같은 재료로 만든 잼인데... 빛깔과 맛이 왜 달라졌지?
 
같은 재료로 만든 잼인데, 색이며 맛이며 전혀 다른 보리똥잼이 결과물로 나왔다. 사진 왼쪽은 처음 만들어 봤지만, 온 정성을 다한 보리똥잼이다. 빛깔이 그럴싸한 오른쪽 병에는 딴청을 피워가면 만든 잼이 담겨 있다.
 같은 재료로 만든 잼인데, 색이며 맛이며 전혀 다른 보리똥잼이 결과물로 나왔다. 사진 왼쪽은 처음 만들어 봤지만, 온 정성을 다한 보리똥잼이다. 빛깔이 그럴싸한 오른쪽 병에는 딴청을 피워가면 만든 잼이 담겨 있다.
ⓒ 박진희

관련사진보기

 
정오를 넘겨 시작한 잼 만들기는 밖이 어둑해질 무렵 끝났다. 씨를 뺄 때만 해도 너무 많이 따왔다며 자책했는데, 다 만들고 났더니 380g짜리 병으로 2개 반 밖에 나오질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영화 주인공은 빵에 잼을 발라 먹자마자 미간을 찌푸리며 "아이, 셔!"란 대사를 쳤지만, 내가 만든 잼은 새콤달콤 입에 쫙쫙 달라붙는 게 너무 맛있게 완성됐다.

자신감이 붙어 3일 후에 보리똥잼 만들기 2차전에 돌입했다. 요령이 생기니 전보다 시간은 훨씬 단축됐다. 보리똥잼 만들기의 최대 장점은 여타 잼과 달라 자주 저어주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그래서 안심하고 시간 맞춰 둔 인덕션에 냄비를 올려놓고 딴청을 피운 게 화근이었다.

단맛이 부족하지 않도록 전보다 훨씬 많이 설탕을 넣었는데도 완성된 잼은 한쪽 눈이 전자동으로 감길 만큼 신맛이 강했다. 일전에 만든 과정과 달랐던 건 흰 거품을 덜 걷어낸 것뿐이었는데 말이다.

"한 가지 맛만 먹으면 물릴텐데, 번갈아 먹으면 되니 그럴 일은 없겠네." 

두 가지 맛의 잼을 먹어본 식구들 평이 후해서 그나마 위안이 됐다.
 
"요리는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야." -'리틀 포레스트' 엄마의 대사 中

이 여름, 즐겨 보는 영화에 등장한 요리 레시피를 따라 하다 나는 문득 깨닫는다. 주인공의 엄마가 딸에게 일러주고 싶었던 것은 실패하지 않을 요리 레시피가 아니었다는 것을.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기본자세는 요리에 임하는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태그:#보리수나무 열매, #보리똥, #리틀 포레스트 여름, #요리는 마음을 비추는 거울, #시고 떫은 과일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보고 듣고 느끼는 소소한 일상을 욕심껏 남기고자 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