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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릇한 밤꽃 향기가 살며시 스며들어오기 시작하는 때가 왔다. 시골마을에서는 꽃이 피고 새가 우는 소리 등으로 별미를 먹을 때나 밭일을 할 때를 가늠하곤 한다. 뻐꾸기가 울고 밤꽃이 피기 시작하면 바쁘게 돌아갔던 모내기가 끝나가고 농부들은 잠깐 한숨을 돌리는 때이다.

부여는 전국 밤 생산량의 22%를 차지하는 곳이라 눈길을 돌리는 곳마다 밤나무가 있다. 밤꽃이 필 무렵이면 천지가 누렇고 기다란 밤꽃이 피어나고 밤꽃 향기는 세상을 지배한다.

밤나무는 가시투성이의 열매도 그렇지만 밤꽃도 일반적인 꽃의 모양이 아니다. 하얀 구미호의 꼬리처럼 기다란 꽃이 아래로 늘어지며 피어난다. 이 기다란 꽃이 어떻게 동그란 가시뭉치 열매가 되어 그 안에서 매끈한 밤톨이 나오는지 매번 궁금해서 올해는 밤의 생태를 파헤쳐보기로 했다.

한 알의 알밤이 되기까지
 
전국 밤 생산량의 22%를 차지하는 부여에는 산 하나가 통째로 밤나무가 심어진 곳이 많다.
▲ 밤꽃이 활짝 핀 밤나무 과수원 전국 밤 생산량의 22%를 차지하는 부여에는 산 하나가 통째로 밤나무가 심어진 곳이 많다.
ⓒ 오창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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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꽃은 구미호의 꼬리처럼 길고 부드러운 털이 북실북실하게 난 수꽃이 먼저 피어난다. 이때 특유의 밤꽃 향기가 진동하게 된다. 일주일쯤 수꽃이 천지에 향을 진동시키며 피어 있으면 털이 없는 긴 꼬리가 슬쩍 수꽃 옆에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암꽃이다. 암꽃과 수꽃이 나란히 피어있는 동안 알밤의 탄생 신화가 써진다.

밤꽃 향기에 벌들이 모여들고 일벌들은 암꽃과 수꽃 사이를 날아다닌다. 꿀벌이 수꽃에서 화분을 묻혀 암꽃에 앉으면 암꽃은 꿀을 내어주고 부지런히 꿀을 모으는 사이 밤꽃이 수정이 된다. 이 시기에 나오는 밤꿀은 특유의 향기와 쌉쌀하고 달큰한 맛이 난다. 밤꽃에서 그런 맛과 향이 나기 때문이다.
 
밤나무는 수꽃이 먼저 핀 다음에 암꽃이 핀다. 이 후에 꿀벌과 바람에 수정이 되어 밤송이가 맺힌다.
▲ 여우꼬리처럼 털이 빛나는 밤꽃 밤나무는 수꽃이 먼저 핀 다음에 암꽃이 핀다. 이 후에 꿀벌과 바람에 수정이 되어 밤송이가 맺힌다.
ⓒ 오창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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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꽃이 먼저 피고 암꽃이 나중에 피어서 수정이 되어 살짝 손톱보다 작은 밤송이가 맺혀있다.
▲ 수정이 되고 있는 밤꽃 수꽃이 먼저 피고 암꽃이 나중에 피어서 수정이 되어 살짝 손톱보다 작은 밤송이가 맺혀있다.
ⓒ 오창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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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꽃 향기가 더 진해질수록 밤나무의 잎은 더 풍성해지고 색깔도 진해져서 밤나무의 수형도 점점 웅장해진다. 기다란 밤꽃이 밤송이로 키워지기 위해 영양을 온전히 나무에 농축하는 시간이다. 밤나무에게는 열매를 수확하는 시기보다 암꽃과 수꽃이 나란히 피어 있는 이때가 가장 전성기일 수도 있다.

수꽃의 꽃가루가 암꽃에 수정이 되면 암꽃이 피었던 자리마다 손톱보다 작은 밤송이가 맺힌다. 꽃가루로 풍성했던 수꽃은 어느새 노화해서 징그럽고 기다란 곤충 모양으로 변신한다. 그 갈변한 꽃마저 땅에 떨어져 거름으로 산화되고 만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밤꽃의 수정 과정이 영웅의 일생처럼 비장해 보이기까지 한다. 암꽃과 수꽃의 결정체인 밤송이가 만들어진 밤나무는 가을까지 100여 일 간의 비바람과 장마, 태풍, 병해충을 견디며 대장정의 성장 과정에 돌입한다. 가시로 온 몸을 방어하며 계절과 기후를 견뎌야 한 알의 알밤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밤꽃 향기에 갇혀버린 부여
 
암꽃에 맺힌 밤송이들이 커지면서 수꽃은 갈변해 땅에 떨어져 거름이 된다.
▲ 아래쪽에 털이 북실북실한 것이 수꽃, 위에 작은 밤송이가 맺힌 암꽃 암꽃에 맺힌 밤송이들이 커지면서 수꽃은 갈변해 땅에 떨어져 거름이 된다.
ⓒ 오창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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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라는 이탈리아의 노래가 있다. 향기가 바람에 날려 뭔가 로맨틱한 감성을 일으키는 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밤꽃만한 것이 있을까? 동네에 사는 50, 60대 지인들에게 어릴 적 밤꽃에 관한 어떤 추억이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우리 어릴 적에는 밤나무가 지금처럼 흔하기는 했었간디.... 밤나무 구경하려면 산에 올라가야 했는디...."

그 당시에는 대규모로 밤나무를 재배하지 않아서 밤꽃 향기가 지금처럼 천지에 진동하지도 않았다. 나무를 연료로 때고 살던 시대라서 나무 삭정이를 주워오려고 동네 야산에 오르면 아릿한 밤꽃 냄새가 풍겨오는 곳을 향해 코를 벌름거리곤 했었다.

감나무에서 피는 감꽃도 같은 시기에 핀다. 감꽃은 땅에 떨어진 꽃을 주워서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며 놀기도 하고 먹기도 했지만 밤꽃은 별 효용 가치도 없이 사춘기가 다가오는 소년들의 가슴만 설레게 했다고 했다.

가을이 오면 아이들은 밤을 줍기 위해 이른 새벽 경쟁적으로 밤나무가 있는 산을 올랐다고 한다. 다른 아이들보다 한 톨이라도 더 줍기 위해 졸음을 참아가며 어두컴컴한 산에서 망태기 한가득 밤을 주워왔다. 가끔은 산주의 아들인 친구 녀석이 텃세를 해서 주웠던 밤을 빼앗기기도 했단다.

어머니들이 산에 도토리를 주우러 갔다가 산밤까지 주워온 보따리에서 밤만 골라내서 까먹었던 달디 달았던 밤 맛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밤나무 재배가 규모화 되어 대단위로 밤을 재배하고 가공 시설까지 갖춘 세상이 되었어도 어릴적 추억담으로 떠오르는 맛은 평생의 입맛을 지배한다.

아이들이 산에서 어렵게 주워온 밤의 일부는 식구들과 먹고 나머지는 부엌 한쪽 나뭇간 아래를 파고 묻었다. 옛날 부엌은 맨땅에 부뚜막을 만들고 밥을 짓는 가마솥을 걸었다. 불과 30여 년 전에도 시골에는 이런 부엌이 남아 있었다. 나뭇간 아래 땅 속은 어머니의 곳간이며 냉장고였다. 제례를 모실 때 쓰는 식재료들은 대부분 그렇게 숨겨졌다.

산의 다람쥐들도 한 입 가득 도토리며 야생 밤들을 주워서 자신만이 아는 땅에 묻고는 잊어버려 해가 지나면 거기서 싹이 터서 번식을 한다. 어머니의 곳간은 인간의 생존과 종족 보존의 또 다른 공간이었다.

밤은 뾰족한 부분에서 싹이 올라오는데 오랫동안 밤 껍질이 그대로 달린 채 싹이 자라서 줄기가 된다. 그래서 조상들은 근본을 잊지 않는 나무라고 해서 제례상에 반드시 밤을 올리고 사당이나 위패를 만들 때 밤나무 목재를 써왔다. 밤은 다산과 부귀를 상징해 전통혼례와 폐백상에 올리고 대추와 함께 신부에게 던져준다.

지금 부여는 산 전체에 밤나무를 심은 곳도 많아서 밤꽃 향기에 갇혀버린 것 같다. 바람이 살랑 불 때마다 코끝을 파고드는 밤꽃 향기에 기분마저 향긋해진다. 후각은 사람의 기분을 가장 많이 좌우하는 기관이라서 그렇다. 초여름 이른 새벽 현관문을 열면 훅 들어오는 밤꽃 향기와 '휘휘' 하며 우는 휘파람새 소리에 나는 시골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태그:#밤꽃, #밤나무, #부여 밤, #충남 부여 특산품, #밤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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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조근조근하게 낮은 목소리로 재미있는 시골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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