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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3가 단성사 건너편 도로변에 있는 6.10독립만세운동 표지석
 종로3가 단성사 건너편 도로변에 있는 6.10독립만세운동 표지석
ⓒ 이동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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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중앙총부는 일제에 맞서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6.10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고자 6월 10일 오전 11시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기념식을 거행한다.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에서 제2의 3.1운동이라고 일컬어지는 6.10독립만세운동 기념식이 열린다. 올해는 95년 만에 처음으로 정부에서 주관하는 기념식이 열리는 뜻깊은 해이기도 하다.

6.10독립만세운동은 3.1운동, 11.3학생독립운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국내 3대 독립운동의 하나로 꼽혀왔으나 그동안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지 못하고, 정부 차원의 기념식도 열리지 않다가 지난 2020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6.10독립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서울의 중앙고보, 중동학교, 연희전문, 보성전문 등의 학생들이 순종황제 인산 행렬이 지나가는 단성사, 관수교, 을지로, 동대문 등지에서 펼친 독립만세 운동으로 1926년 6월 10일 일제의 수탈과 식민 교육 정책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으며 사회주의자들과 학생들이 서로 시위를 계획했으나 사회주의자들은 발각되면서 학생들이 격문을 살포해 중심으로 시위를 주도했다.

6.10 만세운동의 의의는 청년, 학생들이 조국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자각으로 이루어졌으며, 동맹 휴학의 활성화, 신간회 결성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6.10독립만세운동은 3.1운동과는 성격이 다른 것으로, 당시의 심각한 사회불안에 의해 조선의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운동이었으며 3.1운동 이후 일제의 한국 지배정책이었던 문화정책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에서 나타났으며, 민족주의전선의 3.1운동에 이어 이념을 초월한 운동으로 평가된다. 3.1운동은 정치문제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정치 상황에 초점이 쏠렸지만, 6.10독립만세운동은 상대적으로 정치가 아닌 경제상황을 중심으로 부각되었다고 할 수 있다.

3.1운동 이후 조선의 토지 현황은 대부분 일본인의 소유이거나 담보로 잡혀있어 실권이 일본인에게 있었다. 또한 미곡증산 계획과 수리조합 계획으로 소작농민은 물론 땅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도 점차 몰락하는 등의 사회불안이 날로 심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인 1926년 5월 1일 메이데이에 대중시위를 전개하려고 계획하였던 천도교와 조선공산당 및 학생들이 연대하여 4월 25일 승하한 순종의 장례식에 맞춰 기념시위를 만세운동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은 서로 이념이 다른 천도교와 조선공산당이 이념을 초월하여 통일전선운동을 시도한 것이다.

일제에 맞선 항거, 자주독립만세

천도교중앙총부 산하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은 일제의 강제 병합과 식민지 지배에 항거해 자주독립 의지를 밝힌 독립 만세운동인 6.10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고자 이번 기념식을 거행한다.

천도교종학대학원 이동초 교수에 따르면, 천도교와 조선공산당이 제휴하여 계획한 6.10독립만세운동은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에서 계획 초기부터 천도교를 가장 유력한 제휴세력으로 간주하고 거사를 위해 상호 연대를 모색하였으며 이러한 양측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 것은 고려공산당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과 천도교청년동맹의 박래원이었다. 박래원은 천도교청년동맹에서 간부로 활동할 뿐 아니라 박래홍의 후원하에 사회주의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박래원은 1921년부터 대동인쇄회사 문선공으로 일하면서 1925년 3월에는 권오설의 지시로 경성인쇄직공조합 및 경성인쇄직공청년동맹을 조직하였으며, 경성양말직공조합(1923.7), 조선노농총연맹(1924.4), 조선인쇄직공조합총연맹(1926.3)등에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 활발하게 하고 있었다. 1925년 4월 김동명의 권유로 고려공산당 청년회원이 되었고, 5월에는 이준태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하였다. 그리고 제2차 공산당에서는 경성 야체이카의 언론기관 프랙션에서 활동을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공산당원인 권오설과는 깊은 동지적 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천도교가 조선공산당과 연계하는데 있어 주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인내천 정신과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사와 깊은 관계가 있는 천도교의 역사가 만난 역사적 순간을 기억하고 기념하고자 이번 기념식을 개최한다.

천도교와 6.10독립만세운동

한편 천도교는 6.10독립만세운동의 격고문 인쇄뿐 아니라 격문과 선전문의 지방 배포, 지방 교인들의 동원 등을 맡았으며 권동진, 박내원 등의 천도교인이 6.10독립만세운동의 주도 인물로 알려져 왔다.

1926년 당시 천도교에 대한 탄압이 극심하여 전국 각 지방 종리원과 청년동맹은 대대적인 검색과 검속을 받았다. 당시 신문에 보도된 전국 각 지방의 6.10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일제 탄압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 6월 6일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천도교인으로 평남의학강습소 학생 김병걸이 가택을 수색 당하였는데 조선공산당과의 관련문서를 은익하였다는 협의로 수색. <東亞,1926.6.11.⑴>

◇ 6월7일 /대구경찰서에서 사회단체 7명, 예수교 장로와 목사 5명, 개인요시찰 인물 6명 등 20여명을 검거, 가택 수색하여 다수 증거품 압수 서울과 연된 것으로 보인다는 경기도경찰부의 통보를 받음, 6월 13일 대부분 풀려남 <東亞,1926.6.9.⑵>

◇ 6월7일 /평양경찰서에서 천도교 간부들의 집을 수색, 6월 8일에는 사상단체인 노동연합회, 청년동맹, 면옥노동조합 등의 사무소를 수색 <東亞,1926.6.10.⑸> <東亞,1926.6.13.⑸>

◇ 6월7일 /신천경찰서 천도교종리원을 엄밀 수색 <東亞,1926.6.10.⑸>

◇ 6월7일 /원산경찰서에서 엄중경계를 펴며 천도교당을 수색, 교인명부와 청년회원 명부를 압수 <東亞,1926.6.11.⑴>

◇ 6월7일 /함남고원경찰서에서 천도교종리사 김태일, 등을 검속,

◇ 6월 8일/종리원을 두차례 수색 <東亞,1926.6.11.⑴>

◇ 6월7일 /진남포경찰서에서 천도교종리원 엄중 수색, 종리사 및 교도의 가택수색하고 철야 경계 <東亞,1926.6.12.⑴>
◇ 6월7일 /강경경찰서에서 천도교가택 수색 <東亞,1926.6.14.⑵>

◇ 6월8일 /안주경찰서는 서울의 운동계획과 관련하여 천도교부속학교 등 수십 처의 가택을 수색, 동아, 조선. 시대일보 및 호외 압수 <東亞日報,1926.6.9.⑵>

◇ 6월8일 /순창경찰서에서 천도교신자 조동환 등의 가택 수색 <東亞,1926.6.11.⑴>

◇ 6월8일 /신의주경찰서에서 주의자들을 검속, 천도교종리원 김성옥 등 다수 검속, 만주로부터 조선으로 들어오는 사람마다 주소 성명을 조사하고 몸까지 수색하여 물샐 틈없는 경계 <東亞,1926.6.10.⑸>

◇ 6월8일 /전북 남원에서 천도교종리원 및 교도 수명의 가택수색. 조선일보를 수색 <東亞, 1926.6.12.⑵>

◇ 6월8일 /의주경찰서에서는 천도교종리원과 천도교청년당 사무실을 일일이 수색 <東亞, 1926.6.11.⑴>

◇ 6월8일 /창령경찰서에서 천도교종리원과 종리사 하상준(河尙俊)및 청년회 간부 하만호(河萬浩)의 가택을 수색 <東亞, 1926.6.12>

◇ 6월8일 /당진에서 천도교관계 인사들 가택 수사<東亞,1926.6.14.⑵>

◇ 6월8일 /홍성경찰서에서 손병희 댁과 방정환 댁을 수색, 모종의 서류압수<東亞,1926.6.12.⑵>

◇ 6월8,9일 /통영에서 천도교종리원 수색, 백지 5백장을 압수, 농민사 지부장 양재완(梁在完), 개벽사지사장 강성호(姜性鎬), 종리원간부 등을 검거 <東亞, 1926.6.13.⑵>
 

거사는 실패했지만

이와 같이 6.10독립만세운동은 비록 거사 직전에 계획이 발각되어 결국 실패로 끝이 났지만, 인산일인 6월 10일 경성과 일부 지방에서는 실제로 만세 시위가 이루어졌다. 일제는 6월 10일 황제의 국장일을 맞아 과거 삼일운동을 거울삼아 매우 민감하게 경비에 대비하였다. 당시 용산에 주둔하고 있는 조선군사령부에서는 종로 파고다 공원에 임시사령부를 설치하고 보병과 기병 및 포병 등 일본군 5000명을 시내의 각 요소에 배치하여 삼엄한 경계를 하였다.

그렇지만 이날 오전 8시경 황제의 상여가 창덕궁 돈화문을 떠나 황금정(단성사앞) 거리를 벗어나 8시 40분경에 관수교를 지나자 보성전문학교 학생 수십명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활판으로 인쇄한 격문 수만 매를 뿌리자 격문은 상여 주위까지 날아갔다. 그러자 삼엄한 경계를 하던 경찰과 기마대가 즉시 달려와 학생들을 제지하자 대열 속에 있던 연희전문학교 학생들이 호응하면서 엄숙하던 인산행렬이 크게 소란하게 되었다. 특히 상여 뒤를 따르던 기마의장대의 말들이 놀라 뛰는 바람에 군중들이 우왕좌왕하는 혼잡한 가운데 현장에서 학생 30여 명이 체포당했다.

인산행렬이 지나는 곳마다 군중들의 호응이 커졌는데, 9시경 돈화문 부근에서는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이선호 당시 중앙고등보통학생 외 다수) 전단을 뿌리며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여 50여 명이 체포당했다. 9시 20분경에는 황금정 도립사범학교 앞에서도 군중들이 만세를 부르며 격문을 뿌려 수명의 청년이 체포되었다. 그 밖에 동대문, 관수교, 황금정 3정목(3가), 훈련원, 동대문 동묘, 청량리에 이르는 가두에서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다시 부르짖는 격고문

한편 6.10독립만세운동을 위해 만든 인쇄물은 박래원이 만든 '격고문'과 상해에서 만들어 국내로 가져 온 '喪에 服하고 哭하는 민중에게 激함'이 있다. 빼앗긴 조국을 되찾고 민초들의 자주 독립을 외쳤던 격고문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1926년 6.10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고 94년만인 지난 2020년 6.10독립만세운동일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면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국권을 수호하고자 했던 독립정신의 현재적 의미와 4.19혁명, 5.18민중항쟁, 1987년 6월 항쟁, 그리고 촛불혁명에 이르는 민중혁명의 미래적 가치를 되새기는 뜻깊은 자리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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