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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최태원 SK 그룹 회장(왼쪽 두번째),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왼쪽 네번째), 구광모 LG 그룹 회장(왼쪽),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 등 4대 그룹 대표와 간담회에서 앞서 환담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최태원 SK 그룹 회장(왼쪽 두번째),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왼쪽 네번째), 구광모 LG 그룹 회장(왼쪽),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 등 4대 그룹 대표와 간담회에서 앞서 환담하고 있다.
ⓒ 청와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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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을 사면해달라는 재계의 요구가 집요하다. 4월 16일에는 경제 5단체인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대한상공회의소·한국무역협회·한국중견기업연합회·중소기업중앙회의 단체장들이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을 만나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사면을 건의했다. 이 자리에서 손경식 경총 회장은 "글로벌 반도체 경쟁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차세대 반도체 사업에 과감하게 투자하기 위해서는 이 부회장이 경영을 진두지휘해야 한다"며 협조를 요청했다.

경제 5단체는 11일 뒤인 4월 27일에는 사면 건의서를 청와대에 제출했다는 사실을 언론에 공개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현재까지 검토한 바 없으며, 현재로서는 검토할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경제 5단체는 6월 2일에는 청와대 오찬 자리를 빌려 사면을 건의했다. 이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은 "공감하는 국민이 많다"고 발언했다. 단체장들은 다음날에는 김부겸 국무총리에게도 동일한 건의를 했다. 행정부 최고위층을 잇달아 면담하고 언론 홍보전을 펼치는 등의 방법으로 꽤 적극적인 사면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재계는 이재용을 사면해야 세계 반도체 시장의 급변 상황에 대응할 수 있다는 논리를 개진하고 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경제를 살리려면 재벌 총수를 풀어줘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익숙하지만 증명된 적 없는 논리
 
전직대통령 박근혜씨와 '비선실세' 최서원씨에게 뇌물을 준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월 18일 오후 서울 서초구 고등법원에서 열린 파기환송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전직대통령 박근혜씨와 "비선실세" 최서원씨에게 뇌물을 준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월 18일 오후 서울 서초구 고등법원에서 열린 파기환송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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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정권 때인 1995년, 광복절 특사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 박기석 삼성건설회장, 정태수 한보그룹 명예회장, 황경로 전 포항제철(포스코) 회장 등이 혜택을 받았다.

광복절 특사가 발표된 다음날 나온 8월 12일자 <경향신문> 기사 "정부·재계 '신협력시대'"에 따르면, 황정현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부회장은 이 조치를 영단(英斷)으로 치켜세우면서 "정부의 영단이 경제인들의 활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한 뒤 "이를 계기로 투자 등 경제 활동이 활성화돼 국가경쟁력 강화에 기여할 것으로 본다"고 평했다.

이런 발언에서도 나타나듯이 재계 단체들은 재벌총수가 법의 심판을 받을 때마다 '사면이 투자 활동 등을 촉진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런데 이런 주장과 대비되는 사실이 있다. '사면이 경제 활성화에 이롭다'는 논리를 앞세워 사면 운동을 펼치면서도, 사면과 경제 활성화 사이의 인과관계를 실증적으로 증명한 적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특정 재벌총수가 사면을 받은 뒤에 기업의 투자 활동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매출액이 얼마나 늘었는지, 주요 그룹의 재벌총수들이 한꺼번에 사면을 받은 뒤에 한국 전체의 수출입과 경제성장률이 어떻게 변했는지 등은 실증적으로 통계화될 수 있는 사안이다.

이런 자료들은 재벌그룹의 비서실 직원들도 얼마든지 작성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런 자료가 제시되지 않고 있다. '재벌총수 사면은 경제 활성화에 유리하다'고 수십 년간 외쳐온 재벌 기업들이 아직까지 그런 통계를 내놓지 않았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만하다.

재벌총수를 사면해야 경영이 잘된다는 주장은 엄밀히 말하면 기업의 약점을 스스로 드러내는 일이다. 최대 주주가 자리를 뜨면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주장은 전문경영인 체제가 확립되지 않았음을 자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경제활성화가 이유라면 노동자를 사면하라

사실, 경제 활성화를 위해 사면을 해야 한다면, 노동자 사면만큼 확실한 것도 없다. 감옥에 있는 노동자들을 일터에 복귀시키거나 노동자들의 벌금 부담을 덜어준다면, 이로 인한 생산성 증가는 단기간에 가시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에 대한 뇌물공여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비롯한 재벌총수들이 1997년 개천절 사면을 받았을 때였다. 이때 '경제회생을 위해 재벌 회장들은 사면하면서 노동자들은 왜 사면하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한 전직 안기부장(국가안전기획부장·국정원장)이 있었다.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 출신의 재선 국회의원인 박세직(1933~2009)이 바로 그이다. 그해 10월 27일자 <한겨레> '구속 노동자는 왜 사면 안 하나'는 이렇게 보도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들어 있는 박세직 의원(신한국당)은 올 노동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국민적 대통합 차원에서 구속된 노동자들이 새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노동부 장관은 대통령에게 이들의 대사면을 건의할 용의는 없느냐'는 내용의 서면 질의서를 냈다.

대통령이 경제 활성화를 위한 격려 차원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재계 인사들에 대한 특별사면을 단행한 만큼, 이런 국가적·사회적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구속된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정책적 배려가 있어야 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실제 발생한 사실관계와 법정에서 인정되는 사실관계가 100% 일치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변호사나 검사의 능력 혹은 수완에 따라, 또 법리 공방의 전개 양상에 따라 두 사실관계의 차이가 벌어질 수도 있다.

재벌총수들은 유능하고 명망이 높을 뿐 아니라 재판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호인단을 어렵지 않게 구성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재벌총수가 피고인이 된 재판에서는 두 사실관계의 차이가 벌어질 가능성이 더 커지게 된다.

그런데도 재벌총수가 유죄 선고를 받았다면, 이는 범죄가 확실할 뿐 아니라 죄질도 상당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재판부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유죄 선고를 내렸을 이런 사안에 대해 행정부 수반이 경제 활성화를 명분으로 사면권을 행사한다면, 정의에 대한 국민들의 믿음은 한층 더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죄 선고를 받아야 할 사람이 재판 단계에서 무죄로 풀려나도 정의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지만,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사면을 받고 풀려나는 경우에도 그런 신뢰가 크게 떨어진다. 명백하게 유죄로 인정된 사람이 재벌총수라는 이유만으로 사면을 받고 풀려난다면,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지배하며 국가가 가진 자를 편드는 사회적 모순이 한층 명백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평범한 사람들의 박탈감은 어쩔 것인가
 
전국민중행동 소속 진보단체들이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이재용 사면 반대!'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농단 범죄자, 특정경제가중처벌법을 위반한 이재용 사면 시도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전국민중행동 소속 진보단체들이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이재용 사면 반대!"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농단 범죄자, 특정경제가중처벌법을 위반한 이재용 사면 시도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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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사면권은 사법부의 기능을 보완해주는 쪽으로 행사돼야 한다. 법률제도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사법부의 재판 기능으로는 정의를 실현시킬 수 없을 경우에 대통령의 사면권이 보완적 기능을 해줘야 한다.

법조문만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거나 변호인의 조력을 받기 힘들어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에게 대통령의 사면권이 집중되는 게 마땅하다. 재판 단계에서 제대로 보호받기 힘든 사람들을 위해 사면 제도가 운영돼야 정의로운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재벌들은 대개 다 재판 단계에서 충분히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변호인단의 조력을 받을 뿐 아니라 자기 기업과 관계있는 관료·학자 또는 언론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 대통령 사면을 통한 혜택까지 입게 된다면, 사회 정의나 공정에 대한 대중의 믿음은 한층 더 약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회를 이끄는 경제단체 지도자들이 '누구든 죗값을 치르는 공정한 세상을 만들자'고 말하지 않고 '회장님들을 풀어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회에 대한 국민들의 애착을 떨어트리는 일이다. 정말로 경제를 위해 사면을 건의하는 것이라면, 1997년의 박세직처럼 노동자 사면을 건의하는 편이 훨씬 더 사리에 맞을 것이다.

태그:#이재용 사면, #재벌 사면, #대통령 사면권, #대통령 특사, #공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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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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