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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대 중반까지만 해도 청첩장을 꽤 많이 받았다. 몇 년 사이 자연스레 연락이 뜸해졌던 대학 친구나 혹은 오래전 같은 직장에서 근무했던 동료들이 뜬금없이 밥이나 먹자, 하기에 나가보면 십.중.팔.구 다소 늦어진 결혼을 알리면서 신랑 신부가 이마를 맞대고 있는 사진이 프린트된 청첩장을 수줍게 내밀곤 했다.

장례식장을 다녀와서 알게 된 것
 
ⓒ elements.env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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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청첩장을 받는 횟수가 급격히 줄었다. 대신 초상을 알리는 문자를 더 많이 받게 되었다. 사실 나는 스무 살 무렵 외할머니의 장례를 치른 것을 제외하고는 아직 나와 가까운 주변 사람을 떠나보낸 적이 없다. 그래서일까, 어쩌다 장례식장에 가야 할 일이 생기면 식장 앞에서부터 바짝바짝 입이 마른다.

그렇게 식장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 순간 장내에 침울하게 가라앉은 공기가 은은한 향연과 함께 코끝을 스치고 나도 모르게 숨이 턱 막혀온다. 주눅이 든 탓에 내 깐에는 눈치껏 남을 따라 빠릿빠릿 움직인다고 하는데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쭈뼛쭈뼛 시간만 때우다 오기 일쑤다. 그럴 때면 내가 나이만 먹었지 어른이 되려면 한참 멀었다는 생각에 슬그머니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최근 8개월간 총 두 번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우선 첫 번째 장례식에서 나는 꽤 많이 울었다. 상주는 막 아버지를 잃은 상태였는데 나와는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일로 만나서 적당한 선의 친분을 쌓아온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한산한 식장에서 상주 자리에 늙은 어머니와 나란히 선 초췌한 여자의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나왔다. 누군가 "형제라도 있었음 좋았을 텐데" 하고 속삭이듯 말했을 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두 번째 장례식은 친한 언니의 시부상이었다. 이 년간에 걸친 항암의 끝이라 가족들의 애통함이 컸고 무엇보다 병원 수발을 내내 도맡아 했던 언니의 얼굴이 몰라보게 해쓱해서 짠했다. 오랜만에 만난 터라 언니와 나는 육개장 그릇을 앞에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내가 언니에게 어른을 어디 모셨느냐고 묻자, 언니는 지인을 통해 괜찮은 봉안당(납골당)을 소개받았다고 대답했다. 경치 좋은 바닷가 근방인 데다가 추모 공원까지 잘 꾸며져 있어 아이들을 데리고 소풍 삼아 다녀오기도 좋은 곳이란다.

자연스럽게 장례비용과 봉안당 안치 비용에 관한 주제로 이야기가 흘렀다. 그런데 그 비용이 생각보다 비싸서 깜짝 놀랐다. 천만 원이 훌쩍 넘는 돈이었다. 순간 머리가 띵하면서 마음 한구석이 복잡해졌다.

이대로 결혼하지 않고 죽는다면

내가 이대로 결혼하지 않고, 들여다봐 주는 사람 없이 혼자 죽게 된다면 과연 내 장례식에 드는 돈은 누가 낼 것인가? 여태껏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가, 내게 얼른 답을 내놓으라 재촉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장례 비용에 딱 맞는 액수의 돈을 통장에 넣어 놓고 그 앞에 "발견하신 분은 이 돈으로 내 장례를 부탁합니다." 쪽지라도 써놓고 죽어야 하나 생각이 들었다. 문득 몇 해 전 아버지와 나누었던 짧은 대화가 떠올랐다.

십여 년 전에 아버지는 시골 본가 근처에 작은 산을 샀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묘를 이장해 그곳에 다시 모셨다. 나도 언젠가 한 번 아버지를 따라 산에 간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벌써 어머니와 함께 묻힐 자리를 보아두셨다고 자랑하듯 말씀하셨다.

"저기가 나랑 네 엄마 들어갈 자리다!"

내가 "그럼 나는?" 하고 물으니 아버지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결혼해서 신랑 옆에 묻히면 되지. 그때는 분명 가볍게 웃고 넘겼는데, 육개장 그릇에 숟가락을 넣고 휘휘 젓다 말고 갑자기 아버지 그 말이 귓가에 맴돌면서 서운한 마음이 마구 치솟기 시작했다. 혼자 사는 사람은 돈벌어 땅부터 사야하나.

마음 같아선 '1인 가구 장례 품앗이 회원 모집' 공고라도 띄우고 싶다. 회원끼리 돌아가며 서로의 장례를 치러준다면, 1인 가구로 사는 내내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혼자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나 마땅히 장례 절차를 밟아줄 누군가가 없다는 서글픔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지 않을까.

죽음과 삶은 멀지 않고, 오히려 평생의 단짝처럼 혹은 혈육처럼 그렇게 가까운 사이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열심히 살다가 제대로 잘 죽는 것, 이 단순한 인생사의 순리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무겁게 와 닿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이제야 나도 철이 좀 들려는 모양이다.

태그:#1인 가구 장례식, #잘 죽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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