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변덕스럽다. 전에 기억하던 여름날에 비해 비가 내리는 시기도 부쩍 이르다. 봄과 가을은 짧아졌고 무덥거나 매섭게 춥거나, 두 가지 계절로 바뀐 것 같다. 지구는 병들어간다.

지구가 게으른 우리를 언제까지 견뎌줄 수 있을까. 언젠가 코로나 같은 전염병이 아니더라도 또 다시 인류를 위협하는 지구의 공격이 오지 않을까. 우린 그만큼 무례했고, 어리석었고, 또 편익만을 생각하는 존재이기에.
 
카타부치 스나오감독의 작품 <이 세상 한구석에>(2016)를 관람했다. 원작 만화 코노 후미요의 작품을 영화화 한 것인데, 2차 세계대전 때 '태평양전쟁'의 전 후 상황을 중점으로 다룬 작품이다. 스즈라는 개인을 내세워 전쟁 당시 일본의 상황을 보여준다. 작화는 제법 따뜻하고 다채로우며 인물들 또한 여느 시골마을을 연상시킬 수 있도록 정답다.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는 주인공 '스즈'는 어딘가 약간 어리바리하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따뜻하기도 하다. 욕심이 있는 인물도 아니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물론 극 초반, 어렸을 적 본 적 있는 사람이지만 기억하지 못함) 결혼을 하게 돼도 불평 하나가 없다.
 
말 그대로 '무해한' 인물인 스즈. 작품은 그를 앞세워 전쟁의 참혹함과 큰 대비를 이루게 한다. 일본이라는 국가가 행한 무자비한 폭력과 학살, 무모한 전쟁에의 탐욕같은 것들이 주인공 스즈로 인해 잠시 잠깐 그저 평온한 일상들로 뒤덮인다. 별일 아닌 듯, 큰일이 일어나는 게 아닌 듯, 잠깐 반짝하고 터지는 불꽃 정도로 그치는 듯, 그렇게 전쟁은 흘러갔다.
 
하지만 스즈의 오빠가 죽어 유골로 돌아오고, 국가의 전쟁으로 인해 희생되는 개개인들이 점점 더 많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극은 이때까지도 큰 슬픔을 담아내지 않는다. 인물들이 오열하는 장면도, 극적으로 배경음이 깔리는 순간도, 없다. 따뜻한 하늘과 바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스즈의 평범한 일상, 먹을 것이 없어 몇 가지 찬을 가지고 부풀려 상을 내놔도 그저 허허 거리며 웃는 가족, 이런 것이 전부다.
 
중반부까지, 사실 이게 전쟁영화인가? 싶었다. 일본이 일본의 전쟁을 담아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그것을 작품적으로 승화하기 위해 어떤 세심함을 기울였는지 의심이 들었다. 사실 영화가 따뜻하고 무결하다는 느낌 외엔 많이 와닿지 않은 것도 그 이유였다. 전쟁미화까진 아니더라도 그저 묵묵히, 은근하게만 담아내는 작화와 대사가 사실 좀 불편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는 전쟁의 끝을 보여주기 위해 초중반부를 그렇게 그린 것이 아닌가 싶었다. 스즈처럼 일본 개개인의 국민들을 무해하고 무지한 인물로 그려 넣은 것이다. 아니, 사실 무지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거대한 국가들의 전쟁행위에 비해 무력하고 연약한 개인들은 무지했다고 믿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스즈는 정말, 무지했다. 자신의 오빠를 죽이고, 아끼던 조카(시누이의 딸)을 죽이고, 히로시마에 남은 가족마저 덮쳐버린 전쟁을 그때까지도 믿은 것이다. 그런 무자비한 전쟁이 옳은 것이 아니었다면, 그저 아무 의미도 없이 무식한 힘겨루기에 불과했다면, 스즈가 겪은 희생이 너무 큰 장난이 되어버리니까. 더 나아가 울부짖는 스즈의 옆에 꽂혀있는 태극기에 서린 당시 조선인들의 눈물 또한 '별거'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작품은 후반부에 무해한 개인들이 더이상 무해한 인간이 되지 못하도록, 내 힘으로 저지른 일도 아니지만 그저 그것만으론 면죄부가 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끔 내버려둔다.
 
스즈를 어리숙한 인물로 묘사한 것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좀 더 착하고 좀 더 따뜻하고 좀 더 이성적이지 않은 인물로 그려야만 했다. 스즈가 일본을 대표하는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일본과 전쟁에 희생당할 수밖에 없던 존재들에게 반성과 후회를 보여주는 인물로 적합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가해를 저지른 곳은 일본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전하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피해자가 됨과 동시에 가해자일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함을 보여주는 인물이 스즈가 아니었을까 싶다.

좀 더 복합적으로 보자면 스즈는 일본인이었기에 완벽한 피해자는 될 수 없다. 나 또한 무해한 개인이었다는 것만으로 전범국의 가해행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래서 작품은 스즈를 단순히 희생자로 담아내려는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스즈가 전쟁 당시 풍족하진 못하더라도 먹고 지낸 쌀과 콩이, 일본이 수탈한 조선에서 건너왔다는 것을, 자신이 신봉하던 나라가 그저 폭력으로 다른 나라를 희생시켜 국민들의 신념을 유지해온 것이라는 점 또한 인정하게 만든다. 결국 스즈는 자신의 나라가 행한 그 대단한 행위가 그저 폭력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폭력에의 굴복(미국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물론 원작에 비해 스즈의 내면묘사 장면이 더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비판은 있다.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과 작품 사이에서 한 개인이 느끼는 주관적인 생각을 담아내야 하는 한계가 예술엔 있다고 본다. 작품이 가진 한계에 이유를 만들어주려는 것은 아니지만 중반부까지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태극기 게양된 장면과 스즈의 대사로 인해) 달래지기는 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남은 생각은 전쟁은 다시는, 절대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는 점이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전쟁은 반드시 없어야 한다. 나라를 불문하고 이유를 막론하고 희생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도, 환경도, 지구도.
 
이런 인간을 벌 할 수 있는 존재가 지금은 지구이지 않을까. 비단 전쟁뿐만이 아니라 편익때문에 많은 오염과 악행을 저지르는 인류로 인해 지구는 아프다. 이 모든 것을 견뎌온 지구가 더이상 얼마나 더 인간을 감내해줄지 모르겠다. 나조차도 그 어리석은 대상의 선두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부끄럽지만 나의 자유와 편리라는 이유로 다른 무언가를 괴롭히고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알고 있음에도 저질렀을 것이다. 스즈가 일본의 행위를 알고 있었음에도 허무하게 끝나버린 전쟁에 그제야 반성 아닌 반성을 하게 되는 것처럼. 우린 모두 우리의 행동을 알면서도 묵인한다. 귀찮고, 불편하고, 부끄럽다는 이유로.
 
남아있는 모든 인간이 무해한 개인처럼 살면서 어리석은 신념(타인에게만 피해를 안 주면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된다는 생각)을 신봉하는 존재가 되질 않길 바란다. 그 끝에 남는 건 우리에게 돌아오는 피해와 어디에도 분출할 수 없는 분노뿐일 것이다.
이세상의한구석에 영화 세계대전 일본 태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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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기사와 문학 그리고 영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저의 부족한 생각과 관찰을 통해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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