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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동 89번 버스 여성노동자들의 파업(1970. 11. 30) 이들의 요구에 등장하는 심한 몸 검사 문제는 당시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심각한 상황이었다. 당시 버스 회사들은 승객이 납부한 버스요금에 대한 ‘삥땅’을 적발한다면서 버스 여성 노동자에 대한 ‘몸수색’을 당연한 듯이 해댔다.
▲ 사당동 89번 버스 여성노동자들의 파업(1970. 11. 30) 이들의 요구에 등장하는 심한 몸 검사 문제는 당시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심각한 상황이었다. 당시 버스 회사들은 승객이 납부한 버스요금에 대한 ‘삥땅’을 적발한다면서 버스 여성 노동자에 대한 ‘몸수색’을 당연한 듯이 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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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번 버스(범진여객) 여성노동자들의 파업, 1만명의 발이 묶이다 

1970년 11월 30일 범진여객 소속 89번 버스 여성 노동자 159명은 파업을 단행했다. 당시 이들은 '버스 안내양' 또는 '여차장'으로 불렸다. 이들은 일시에 행방을 감추어 사당동~신흥사간 52대의 버스 운행을 중단시켰다.

합숙소의 급식대우 시정, 임금인상, 심한 몸 검사 시정 등을 요구하며 전원 합숙소를 떠났던 것이다. 이들의 파업으로 1만 명의 사당동 주민들이 한 때 사당동 버스 종점에서 추위에 떨어야 했다. 회사는 운전수와 정비공들을 긴급 투입시켜 뒤늦게야 운행을 재개할 수 있었다.

이들의 요구에 등장하는, '심한 몸 검사' 문제는 당시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심각한 상황이었다. 당시 버스 회사들은 승객이 납부한 버스요금에 대한 '삥땅'을 적발한다면서 버스 여성 노동자에 대한 '몸 수색'을 당연한 듯이 해댔다.

이러한 반인권적 행태는 '여차장제'가 새롭게 실시된 1961년 8월 이래 지속됐다. 이 과정에서 심한 불쾌함을 느껴 이에 대한 항의로 음독자살을 시도하는 이들도 여럿 있었고, 1966년에는 심한 몸수색을 당한 한 여성 노동자가 불쾌함을 이기지 못하고 한강에서 투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1967년에는 감금과 몸수색, 폭행을 서슴지 않았던 한 버스회사의 차장감독이 '시범 케이스'로 처음으로 구속되는 일도 있었지만, 시범 케이스라는 걸 알아서 그런지 몸수색 같은 인권유린 행위는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버스안내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과 농성, 데모는 계속될 수밖에 없었고, 범진여객 89번 버스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도 그 중 하나였던 것이다.

결국 버스 여성 노동자에 대한 몸수색 행위가 사라진 것은, 1982년부터 시행돼 단계적으로 확대된 '자율버스' 운행으로 여성 안내 노동자가 사라지면서였다. 버스 여성 노동자는 마지막 38명이 사표를 낸 1989년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사당동에 얽힌 또 다른 사연, '78 민중선언'과 희망교회 
 
사당동 희망교회 희망교회는 평생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하는 목회활동을 실천하고 있는 감신대 출신의 목사 정명기가 1975년 10월 19일 사당3동(산24-20) 판자촌에 가게 두 개를 터서 세운 11평 크기의 교회였다. 이곳에서 1978년 고려대생들의 '78 민중선언' 유인물도 제작되었다.
▲ 사당동 희망교회 희망교회는 평생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하는 목회활동을 실천하고 있는 감신대 출신의 목사 정명기가 1975년 10월 19일 사당3동(산24-20) 판자촌에 가게 두 개를 터서 세운 11평 크기의 교회였다. 이곳에서 1978년 고려대생들의 "78 민중선언" 유인물도 제작되었다.
ⓒ 도시빈민선교 현장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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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던 1978년 9월 14일 고려대에서는 3000여 명의 학생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유신철폐", "독재타도"의 구호를 높이 외치며 교문 밖 진출까지 시도할 정도로 강력히 진행된 고대생들의 이날 시위는 이른바 '78 민중선언' 사건으로 불린다. 이날의 시위로 고대생들은 52명이 연행됐고, 그중 7명이 구속됐다.

고대생들의 이날 시위는 3년여의 오랜 공백을 깨고 벌인 의미 있는 반유신 시위였다. 고대생들은 강종건(고대 법학 3) 등 재일동포 유학생들이 '민주화' '자유화'를 구실로 국가변란을 획책했다는 '학원침투 북괴 간첩단' 사건이 발표된 1975년 11월 22일 이래 오랜 기간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물론 이는 유신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중앙정보부의 조작 사건이었다. 실제로 강종건 등 이 사건 관련자들은 모두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레드 콤플렉스가 강했던 당시에는 반독재 민주화 운동조차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1978년 9월 14일의 대대적인 '78 민중선언' 시위는, 고대생들이 그러한 압박에서 벗어나 다시금 반유신 투쟁의 선봉에 설 것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날의 시위를 주도한 이혜자(생물학과 74), 천상만(행정학과 75), 오상석(경제학과 76)이 배포한 '피끓는 고대 학우여! 즉시 대강당으로 모이자! 78 민중선언'이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제작한 곳이 바로 사당3동 달동네에 있던 희망교회였다.

유인물 제작을 맡았던 천상만에 따르면, 원래는 새문안교회 구로동야학에서 유인물을 제작하고 잠이 들었는데, 교실 전체가 물바다가 되면서 유인물도 다 젖어 못쓰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득이 시위 결행일도 늦추고 사당3동 희망교회에서 유인물을 다시 제작했다는 것이다.

당시 유인물을 제작하는 일은 지금과 같이 컴퓨터와 프린터로 하는 시대가 아니었으며, 가리방(철판)에 원지를 대고 긁어서 이를 잉크와 로울러를 이용하여 종이에 인쇄하는 작업을 직접해야 하는 고단한 작업이었다.

그렇다면 고대생 천상만이 '78 민중선언' 유인물을 제작했다는 사당3동 희망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희망교회는 평생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하는 목회활동을 실천하고 있는 감신대 출신의 목사 정명기가 1975년 10월 19일 사당3동(산24-20) 판자촌에 가게 두 개를 터서 세운 11평 크기의 교회였다. 정명기는 이곳에서 1980년까지 목회활동을 하면서 부인 강명순과 희망유치원, 새희망신용협동조합 등을 함께 운영했다.

애석하게도 사당3동의 희망교회는 그러나, "교회설립 5년 만에 판자촌이 헐려 연립주택이 들어선다는 계획이 서자 목회지를 다시 찾아나서야 했"던 정명기가 부평으로 가서 노동자를 위한 광야교회를 세우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80년 서울의 봄'과 중앙대생들의 사당동 시위 행진    
 
1980년 민주화의 봄 당시 중앙대생들의 사당동 시위 중앙대생들은 5월 8일 3000여 명의 학생이 영신관 앞 루이스 가든에 모여 시국성토대회를 열고 ‘계엄철폐’와 ‘노동3권 보장’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이어간다. 이중 500여 명이 학교 후문 쪽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행진을 이어가 숭전대(지금의 숭실대)와 총신대를 지나 사당동 89번 버스 종점까지 진출하였다.
▲ 1980년 민주화의 봄 당시 중앙대생들의 사당동 시위 중앙대생들은 5월 8일 3000여 명의 학생이 영신관 앞 루이스 가든에 모여 시국성토대회를 열고 ‘계엄철폐’와 ‘노동3권 보장’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이어간다. 이중 500여 명이 학교 후문 쪽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행진을 이어가 숭전대(지금의 숭실대)와 총신대를 지나 사당동 89번 버스 종점까지 진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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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서울의 봄' 당시 흑석동에 있는 중앙대학교 학생들은 학원민주화 투쟁과 사회민주화 투쟁을 동시에 벌인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가 사당동까지 진출하는 일도 있었다.

그해 4월 사학비리의 책임을 물어 임철순 총장의 사퇴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한 중앙대생들은 5월 8일 3000여 명의 학생이 영신관 앞 루이스 가든에 모여 시국성토대회를 열고 '계엄철폐'와 '노동3권 보장'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이어간다. 이중 500여 명이 학교 후문 쪽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행진을 이어가 숭전대(지금의 숭실대)와 총신대를 지나 사당동 89번 버스 종점까지 진출하였다. 이들은 89번 버스 종점 부근에서 경찰과 대치하며 10여 분 동안 연좌농성을 벌였다.

당시 대학생들의 시위는 체계적인 계획 하에 진행되지는 못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넘쳐났지만, 전국 시위를 체계적으로 이끌 능력을 갖춘 지도부가 부재했던 것이다. 중앙대생들이 사당동까지 행진해온 것도 특정한 계획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대학생들은 5월 15일 서울역에 10만 명 이상 군중을 모았지만, 우왕좌왕하던 학생들은 '쿠데타의 명분을 줘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우세하게 되면서 '5·15 서울역 회군'을 통해 학교로 돌아가는 우를 범하게 됐다. 호시탐탐 쿠데타를 노리던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5·17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고, 이는 광주에서의 무참한 학살극 자행으로 이어지게 된다.

총신대생들의 민주화 운동

서울 사당동에 있는 총신대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은 인근에 있는 숭실대와 중앙대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에 비해서는 약한 편이었지만, 무시하긴 어려웠다. 특히 1980년 서울의 봄 당시에 보여준 총신대생들의 학원민주화 투쟁은 대단히 격렬했다.

그해 3월 총신대생들은 김희보 학장과 재단이사의 퇴진을 요구하면서 등록거부와 농성을 벌이는데, 결국 정원 외 입학 무더기 허용, 학교 경영 난맥상 등에 대한 책임을 지고 김희보 학장과 재단이사들이 퇴진하면서 학생들의 승리로 끝난다.

이러한 학원민주화 투쟁의 성과를 바탕으로 총신대생들도 5월 9일에는 서울신학대, 감신대, 장신대 등 6개 신학대생 2000여 명과 함께 새문안교회에서 '비상계엄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시국성토대회를 한 후, 광화문네거리로 나왔다가 서대문로타리를 거쳐 서울역으로 진출하는 등 사회민주화 투쟁에도 적극 나섰다.

1985년 '2.12 총선'과 남성초 암모니아수 투척 사건
 
1985년 2.12 총선 당시 남성국민학교 암모니아수 투척사건 보도 기사 민정당 허청일 후보가 연단에 올라 연설을 시작한지 10분쯤 지난 시점에서 서울대생 이철우와 중앙대생 서정호가 뛰어올라 허 후보의 얼굴에 암모니아수를 투척한 후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날의 시위는 노량진경찰서(현 동작경찰서) 소속 전투경찰 300여 명을 투입하고 나서야 겨우 진정되었다.
▲ 1985년 2.12 총선 당시 남성국민학교 암모니아수 투척사건 보도 기사 민정당 허청일 후보가 연단에 올라 연설을 시작한지 10분쯤 지난 시점에서 서울대생 이철우와 중앙대생 서정호가 뛰어올라 허 후보의 얼굴에 암모니아수를 투척한 후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날의 시위는 노량진경찰서(현 동작경찰서) 소속 전투경찰 300여 명을 투입하고 나서야 겨우 진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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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당 독재 결사반대'의 구호 속에 신민당 돌풍으로 귀결되었던 1985년의 '2.12 총선'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가는 도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민들은 2.12 총선을 통해 '나만 전두환을 싫어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것을 서로 확인할 수 있었고, 이제 전두환 군사정권을 끝장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 '2.12 총선'을 앞두고 전국적으로 확산된 '민정당 독재 결사반대'와 '전두환 군사정권 타도'를 요구하는 흐름은 동작지역도 예외일 수 없었다. 중앙대, 숭실대, 총신대 등 대학가를 중심으로 시작된 동작지역의 움직임은 급기야 노량진 허청일 민정당 의원 사무실 앞에서 횃불시위로 표출되었고, 선거를 1주일 앞둔 2월 5일의 남성초 합동유세장에서는 하나회 출신의 민정당 허청일 후보(당시 전두환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가 물리적 공격까지 받는 일이 벌어진다.

이날 허청일 후보가 연단에 올라 연설을 시작한지 10분쯤 지난 시점에서 서울대생 이철우와 중앙대생 서정호가 뛰어올라 허 후보의 얼굴에 암모니아수를 투척한 후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 이들의 시위는, 노량진경찰서(현 동작경찰서) 소속 전투경찰 300여 명을 투입하고 나서야 겨우 진정됐다.

물론 이들 대학생이 벌인 시위 방법이 적절했는지에 대해서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남성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당시 전두환 군사정권과 집권 여당인 민정당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될 만했다.

결국 2.12 총선은 김영삼과 김대중이 이끈 신민당 돌풍이 일어나면서 사실상 민정당의 패배로 끝나게 된다. 집권 여당인 민정당 후보가 부산에서는 6개 지역구 중 3개 지역구에서, 서울에서는 강남구 한 군데에서 3등으로 낙선하는 등의 결과였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지역구별로 2인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여서, 3등 이하를 해야 낙선하는 상황이어서 제도상으로는 집권 여당 후보가 낙선한다는 것을 상상하기도 쉽지 않았던 상황에서 일어난 쾌거였다.

이후 자신감을 회복한 야당과 민중들은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민주헌법을 강력히 요구할 수 있게 되었고,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맞선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을 준비할 수 있는 힘을 축적해나갈 수 있었다. 

대학생 박종철, 사당동에서 시위를 벌이다
 
대학생 박종철이 참여한 사당동 시위 이날 박종철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대학생들의 미문화원 점거농성을 지지하며 ‘학살원흉 처단’과 ‘미국의 사과’를 요구하며 사당동 시위에 참여했다. 이 사당동 시위로 연행된 박종철은 5일간 구류처분을 받고 유치장 생활을 해야 했다.
▲ 대학생 박종철이 참여한 사당동 시위 이날 박종철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대학생들의 미문화원 점거농성을 지지하며 ‘학살원흉 처단’과 ‘미국의 사과’를 요구하며 사당동 시위에 참여했다. 이 사당동 시위로 연행된 박종철은 5일간 구류처분을 받고 유치장 생활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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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생 박종철은 1985년 5월 24일 사당동 89번 종점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 역할을 했던 서울대생 박종철의 의로운 죽음은 지난 2017년 영화 <1987>로 다시 한 번 국민적 주목을 받은 바 있는데, 그보다 2년 전에 벌어진 일이다.

박종철이 시위를 벌이기 하루 전날인 5월 23일에는 전학련(전국대학생총연합) 소속 5개 대학생 50여 명이 서울미문화원을 점거하고 "광주사태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 사과하라!"고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당시 대학생들은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의 '광주학살'은 군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던 미국이 충분히 막을 수 있었지만, 이를 '방조' 내지는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실제로 광주학살 이후 그해 12월 광주미문화원 방화사건이 벌어졌고, 1982년에는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이, 1983년에는 대구미문화원 폭발사건이 연이어 벌어졌다. 미국의 사과를 요구한 1985년의 서울미문화원을 점거한 사건도 그러한 흐름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이날 박종철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대학생들의 미문화원 점거농성을 지지하며 '학살원흉 처단'과 '미국의 사과'를 요구하며 사당동 시위에 참여했다. 이 사당동 시위로 연행된 박종철은 5일간 구류처분을 받고 유치장 생활을 해야 했다.

박종철은 다음 달 벌어진 구로동맹파업에 대한 가리봉동 지지시위로 구류 3일을 더 살았고, 다음해인 1986년 4월에는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 대회(왕십리 노학연대 투쟁)에 참여했다가 구속되기도 하는 등 민주화 운동과 민중생존권 지원 투쟁에 헌신적으로 참여했던 학생운동가였다.

사당동 옛 89번 종점에서 버스를 타고 내리던 우리 사당동 사람들의 가슴 속에도 한국 민주주의의 새 장을 연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을 있게 한 박종철과 이한열(당시 연세대생)을 비롯한 수많은 분들의 희생과 헌신은 깊이 새겨져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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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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