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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시인 30주기를 많아 고정희사업회와 성미산학교에서 그를 추모하는 글을 <오마이뉴스>에 보내와 게재합니다. [편집자말]
고 고정희 시인의 30주기를 맞아 전라남도 해남 땅끝순례문학관에서 유품 아카이브 전시가 준비되고 있다.
 고 고정희 시인의 30주기를 맞아 전라남도 해남 땅끝순례문학관에서 유품 아카이브 전시가 준비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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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시인이 우리 곁을 떠난 지 30년이다. 처음에는 우리도 고정희 시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관련기사 : "상한 영혼에 손 내밀던 페미니스트 고정희, 지금 더 절실"  http://omn.kr/1tlx8) 

어느 해부터인가 대안문화운동단체인 '또 하나의 문화' 동인 선생님들이 6월이면 고정희 시인의 기일을 맞아 해남을 방문하고, 시인의 무덤을 찾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01년 그분들과 자리를 함께하게 되면서 그분들이 왜 해마다 오는지 알 게 되었고, 고정희 시인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게 되었다.

고정희 시인을 알았지만 그분의 뛰어남을 몰랐던 사람도, 고정희 시인 자체를 몰랐던 사람도 시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그분에게 빠져들어 갔다. 그러면서 이런 분이 해남에서 나고 자랐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서울에서 오는 분들을 맞이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시인을 기리고, 지난날의 우리처럼 고정희 시인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시인에 대해 알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시인을 알아가다

2002년 처음 열린 고정희 추모문화제에서는 '고정희 심포지엄'을 열어 시인의 삶을 조명했다. 그의 시세계를 알아보고, 그 속에 담긴 정신이 무엇인지 알아갔다. 두 번째 고정희 추모문화제부터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백일장을 열었다. 보다 많은 청소년이 고정희 시인을 더 잘 알고, 더 가까이 느끼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세 번째 추모문화제를 치르면서 좀 더 조직적인 활동을 펼쳐야 한다는 생각에 2004년에 '고정희 기념사업회'를 조직했다. 회칙을 만들고 이사, 감사 등의 조직도 만들어 체계적으로 활동 해나가기 시작했다. 군수 면담을 통해 군지원금도 받게 되었고, 추모행사를 좀 더 다양한 문화행사로 만들어나갔다.

시인의 기일이 되면 해마다 찾아오는 또 하나의 문화 동인 선생님들을 비롯해 하자작업장학교(아래 하자학교) 학생들이 버스를 대절해 내려와 추모 행사에 함께 참여했다. 학생들은 무덤가에서 노래도 부르고 공연도 하며 우리와 함께 시인을 기려왔다. 지금은 해남을 떠나셨지만, 미황사에 계셨던 금강스님은 하자학교 친구들에게 숙소를 제공해 주셨다.

고정희 시인을 추모하는 문화제를 통해 우리는 많은 예술인을 만났고, 다양한 문화를 경험해 왔다. 미황사 자하루에서 진행된 소히(Sorri) 밴드의 공연은 흥겨운 시간을 만들어 주었고, 그때 함께 한 문화인류학자 조한혜정 선생님은 "자기들은 해남에서 이렇게 재미있게 산단 말이야?" 하셨다.

어느 해에는 광주에서 마당극 활동을 하는 연극인 지정남의 모노 마당극을 보는데 그렇게 신명 날 수가 없었다. 유쾌하고 활발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입담과 재주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시인의 무덤이 축제의 장으로
 
고정희 시인 덕분에 모인 사람들.
 고정희 시인 덕분에 모인 사람들.
ⓒ 고글리 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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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억에 남는 추모문화제는 2009년의 추모문화제다. 시인의 무덤 뒤에 있는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야트막한 언덕 위에 넓은 공터가 나온다. 그곳은 사유지였지만, 우리는 맘이 너른 땅 주인의 허락을 받아 그곳에서 공연을 했다. 

먼저 무덤가에서 초혼굿을 하였다. 당시 현직 국어 교사이면서 춤꾼이었던 문영숙 선생님을 초청해 시인의 넋을 부르는 굿을 하였고, 그렇게 부른 넋을 우리가 만든 종이꽃에 담은 후 모두 함께 잡은 긴 천 위에 올려, 무덤 뒤쪽의 공연장으로 줄지어 이동하였다.

춤꾼이 앞장서고 해남에서 활동하는 풍물패가 뒤를 따랐다. 그 뒤에 천을 잡은 행렬이 숲길을 걸어 공터에 마련된 공연장으로 향했다. 장엄하고도 아름다웠다. 공연장으로 꾸며진 공터의 끝에는 수백 년동안 그 자리에서 자라온 큰 소나무가 엄숙한 모습으로 가지를 뻗고 서 있어, 그 자리의 분위기를 더욱 멋스럽게 만들어 주었다.

공터 주변을 그림, 사진, 육필원고, 시화 등을 전시하여 축제의 장이라는 느낌을 더하였다. 그곳에서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시낭송도 하며 초여름의 오후 시간을 뿌듯하게 보냈다. 고정희 시인의 <하늘에 쓰네>에 곡을 붙인 노래가 이 자리에서 처음 공연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온 사람과 마을 분들과 함께 저녁밥을 나누고, 마음도 나누었다. 오래 기억에 남을 시간이었다.

어느 해에는 미황사 마당에서 박혜리, 정민아, 말로 등 뛰어난 가수의 노래를 한 자리에서 듣는 장이 열리기도 하였다. 색색의 연등을 마당 가득 켜놓고 열린 공연은 분위기에 취하고 연주에 취하고 노래에 취하는 환상적인 시간이었다.

그 자리에서 시인의 친구들과의 대담도 이루어졌다. 그야말로 '자매애' 가득한 시간이 되었다.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극단 '목요일 오후 한 시'의 공연이 시인의 생가에서 행해지기도 했다. 생가가 갖는 독특한 환경 속에서 사전에 약속되지 않고 이뤄진 공연 <외로운 날의 일기>은 참여자들로 하여금 위로받는 느낌, 치유되는 느낌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다음에는 우리가 직접 시인의 작품 <우리 동네 구자명 씨>를 해석한 연극을 만들어 공연에 나섰다. 20대일 때 연극을 해 본 사람도 있었지만, 처음 연극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속에서 의미와 재미를 모두 잡는 연극이 만들어졌고, 특히 구자명씨의 남편 역할로 취한 사람을 연기했던 분은 '생활 연기'라는 칭찬(?)을 들을 만큼 실감 나는 연기로 연극을 재미있게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다음 해에도 기념사업회 회원들과 해남 사람들이 참여한 연극을 선보였다. 생가에서 하는 공연을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읍내에 있는 두둥실 소극장에서 한 번 더 공연을 해 호평을 받았다.

고정희 시인의 시를 더 많은 사람과 함께 공유하고 싶어 <노래하는 뜰>이란 이름으로 한 달에 한 번 시소식지를 만들어, 고정희 시인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보내줬다. 시인의 시를 옮겨 적고 그림을 그려 넣어 만든 8쪽짜리 소책자는 250여 명에게 전달되었다. 우리는 <노래하는 뜰>을 100회까지 만들어 보내고 마침표를 찍었다. <노래하는 뜰>을 종료한 후 2017년 추모제를 맞아 해남공공도서관에서 <노래하는 뜰>과 시화 전시회를 하였다. 이는 이의영 전 해남고정희기념사업회 회장의 수고와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었다.

고정희 덕분에 
 
최은숙 고정희기념사업회장
 최은숙 고정희기념사업회장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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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시인의 올케언니가 자주 한 말씀이 있다. "고정희가 아니면 내가 언제 이런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나 보겄어. 다 고정희 덕이여." 시인의 올케언니가 언급한 선생님들이란, 또 하나의 문화 동인 선생님들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우리처럼 서울로부터 먼 벽지인 해남에 사는 사람들은 그 말씀에 매우 공감한다.

고정희 시인이 아니라면 이분들이 해마다 해남을 찾아오실 일이 뭐가 있을 것인가. 그 덕에 우리도 그런 훌륭한 선생님들을 가까이 뵙고 좋은 이야기도 많이 듣는다. 고정희 시인이 우리를 그분들과 연결 지어 주었고, 그분들 덕에 수준 높은 공연을 해남에 앉아서 즐길 수 있었다. 우리의 정신과 삶도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었다. 다 고정희 덕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고정희기념사업회 회장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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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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