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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학원(당시 이사장 정진석대주고)은 ‘첫 한국인 주교로 일제강점기에 한국교회를 지켰고, 경향신문 창간 등 교회와 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고 노기남(바오로, 1902~1984, 전 서울대교구장) 대주교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노기남관으로 명명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노기남 대주교는 정부가 2008년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 중 한 명이다.
▲ 사당동에 있는 노기남관 가톨릭학원(당시 이사장 정진석대주고)은 ‘첫 한국인 주교로 일제강점기에 한국교회를 지켰고, 경향신문 창간 등 교회와 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고 노기남(바오로, 1902~1984, 전 서울대교구장) 대주교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노기남관으로 명명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노기남 대주교는 정부가 2008년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 중 한 명이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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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7호선 남성역에서 동래정씨임당공파묘역과 솔밭도서관을 지나 동작고등학교 쪽으로 가다보면, 가톨릭학원 교원 기숙사(사제관)를 만날 수 있다.

이 가톨릭학원 교원 기숙사는 2008년에 완공되면서 노기남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에 대해 가톨릭학원(당시 이사장 정진석대주교)은 '첫 한국인 주교로 일제강점기에 한국교회를 지켰고, 경향신문 창간 등 교회와 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고 노기남(바오로, 1902~1984, 전 서울대교구장) 대주교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물론 노기남대주교를 기리는 공간은 여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합정동 절두산순교성지에 가면 노기남대주교기념관도 있고, 천주교 연풍성지에는 노기남 대주교의 동상도 있다.

노기남 대주교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발표된 이유

노기남은 1930년 사제 서품을 받고 명동성당 보좌신부가 되었다. 당시 황국신민화 작업을 서두르던 일제가 외국인 교구장들을 모두 일본인으로 교체하려는 작업을 벌이자 당시 서울교구장이었던 주교 라리보(Larribeau, 元亨根)가 사임을 결심하고 후임자로 노기남을 비밀리에 로마교황청에 추천하면서 1942년 1월 제10대 서울교구장에 임명되었다.

노기남이 본당 주임신부를 거치지 않고 곧 바로 주교로 승격되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급박한 시대상황 때문이었다. 그는 일제의 종교동화정책에 저항을 계속 하다 감금된 35명의 프랑스와 아일랜드 성직자들을 일제의 압박에서 보호해 주기도 하였고, 그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최고문화훈장을 받기도 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노기남과 천주교의 아픈 역사 또한 기억해야 한다. 노기남은 천주교 주교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각종 행사에 참석하거나 집회를 주재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대한 교단의 협력을 주도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1939년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산하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의 이사를 역임하였고, 1940년에는 이사장이 되었다.
  
노기남은 천주교 주교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각종 행사에 참석하거나 집회를 주재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대한 교단의 협력을 주도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노기남은 국민정신총동원천주교경성연맹 결성식에서도 이사로 선임되었다.
▲ 국민정신총동원천주교경성연맹 결성식 보도 기사(<매일신보>, 1939. 5. 16) 노기남은 천주교 주교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각종 행사에 참석하거나 집회를 주재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대한 교단의 협력을 주도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노기남은 국민정신총동원천주교경성연맹 결성식에서도 이사로 선임되었다.
ⓒ 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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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사장 명의로 병기헌납기금응모사업을 선전하고 종용하였는가 하면, 조선군사령부에 국방헌금을 납부하기도 하였다. 노기남은 1943년에는 조선종교단체전시보국회에 참석하여 특별지원병제도를 선전했는가 하면 1944년에는 천주교신자특별지원병 장행미사를 집전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노기남은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결정한 1006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중 한 명으로 발표되기도 했다. 서울 동작구 사당동에 노기남관이 들어섰을 때도 한 천주교 언론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 사회적 비난이 분명히 존재하는 인물의 이름을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제들의 생활공간에 붙인다는 자체가, 교육적이지도 신앙적이지도 않다"고 비판하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뮈텔 주교의 친일 행적 논란

사실 일제 강점기 천주교의 아픈 역사는 노기남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1890년부터 1932년까지 43년간 한국 가톨릭의 수장(제8대 조선교구장) 역할을 했던 프랑스 선교사 뮈텔 주교((Mutel, 1854~1933)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세레명 토마스)에 대해 살인자라는 이유로 천주교 신자 자격을 박탈함으로써 죽기 전에 주는 천주교 의식인 종부성사마저 거부한 인물이었다. 뮈텔 주교는 '안중근이 정치적으로 자신의 의견이 잘못되었다고 시인하지 않으면 고해성사를 해 줄 수 없다'면서 금지조치를 내렸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 가족을 천주교로 입교시키고 세례를 준 빌렘 신부(1860-1938)가 뮈텔 주교의 방침을 어기고 사형집행 전 뤼순감옥을 찾아가 세상의 모든 것을 청산하고 내세를 기다리는 고해성사와 종부성사를 위한 기도회를 가졌다. 이에 대해 뮈텔 주교(1854~1933)는 빌렘신부에게 2개월간 성무정지라는 징계까지 내렸다. 일제가 안중근의 시신을 유족에게 전하지 않은 반인도적 조치를 취한 것에 대해서도 일기에 "당연한 일"이라고 기록했다.

이와 관련하여 2010년 100년 만에 이루어진 안중근의 복권을 기념하여 마련된 '안중근의사 순국 100돌 추모 미사'에서 정진석 추기경이 "당시 교회 상황으로 봐 뮈텔 대주교가 교회와 사제, 신자인 안중근 토마스 모두를 돌보는 방법을 고심해 최선의 선택을 내린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고 하여 뮈텔주교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여 비판받기도 했다.

뮈텔 주교의 친일행적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안중근의 동생 안명근이 무관학교 수립을 위한 군자금 마련을 위해 황해도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빌렘 신부로부터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을 암살하려는 계획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는 눈길을 헤쳐 조선총독부 경무총감 겸 조선주차헌병대 사령관으로 있던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에게 밀고하였다.

이로 인해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수많은 애국자들이 일제의 탄압을 받아야했고, 이 사건으로 공화정을 목표로 한 최초의 비밀결사조직이었던 신민회가 해체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하얼빈 의거 후 뤼순감옥으로 이동 전 찍힌 안중근 의사 모습, 행색은 초라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의연하다. (안중근의사기념관)
 하얼빈 의거 후 뤼순감옥으로 이동 전 찍힌 안중근 의사 모습, 행색은 초라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의연하다. (안중근의사기념관)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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뮈텔 주교는 1919년 3·1 운동 직후 서울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의 대신학교(현 가톨릭대학교) 학생들을 만난 날 다음과 같은 일기를 남기기도 했다.
 
한국 학생들은 나를 붙잡고 그들의 나라가 이렇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음을 설명하려 했다. 어떤 학생들은 울기도 하고 발을 구르기도 하고 정말로 무서운 모습이었다. 마침내 그들에게 질서를 지키도록 간청했고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차라리 신학교를 떠나라고 했다. (뮈텔, <뮈텔주교일기>)
 
뮈텔은 일찍이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보고한 문서에서 의병에 대해서도 "선의의 소수 애국자를 제외하면 자칭 '의병'들의 대부분은 약탈자이거나 산적들인 것이 틀림없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이 '천주교 동포여' 발표

3·1 운동에 대한 적대적인 인식은 뮈텔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3·1 운동 당시 초대 대구대목구장으로 있던 드망즈 주교(Demange, 1875-1938)는 대구의 성유스티노신학교 학생들이 열기가 고조되자 그들의 신학교의 질서를 걱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했다.
신부들을 포함해 전 학생을 체육실에 집합하도록 지시하고, 교리강의 때문에 대성당으로 가는 길에 신학교로 갔다. 그들을 앉히지 않고 나는 그들에게 "순종을 하지 않는 신학교를 원치 않으며 신학생들과 상관없는 정치적 소요 같은 행동이 일어난다면 유죄, 무죄를 불문하고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고, 신학교 문을 닫겠다."고 냉혹하고 단호하게 말했다.(드망즈, <드망즈 주교 일기>)
 
뮈텔과 드망즈의 위와 같은 대응은 신학교 학생들에게도 실제적인 압박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3·1 운동의 결과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이동녕은, 천주교인들에게만 특별히 보내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천주교 동포여'라는 제목의 문서(통유 제1호)까지 발표했던 것이다.
 
전 한족이 다 일어나 피를 흘리며 자유를 부르짖을 때 어찌 30만 천주교 동포의 소리는 없느뇨. 여러분은 스스로 한족이 아니라 하느뇨. …… 아- 삼십만의 천주교의 동포여 늦지 아니하니 일어날지어다. 일어나 민족의 자유를 찾고 자유로운 나라에서 이천만이 다같이 소리를 모아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필자가 현대어 표기법으로 변경)
 
노기남관 앞 되새기는 김희중 대주교의 반성과 사과

지난 2019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을 맡고 있던 김희중 대주교는 3·1 운동 100주년 기념 담화에서 "백년 전에 많은 종교인이 독립운동에 나선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면서 "그 역사의 현장에서 천주교회가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였음"을 고백했다.

주교회의의 반성은 이뿐만이 아니다. "외국 선교사들로 이뤄진 한국 천주교 지도부는 일제의 강제 병합에 따른 민족의 고통과 아픔에도 교회를 보존하고 신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정교분리 정책을 내세워 해방을 선포해야 할 사명을 외면한 채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금지"하였고, "나중에는 신자들에게 일제의 침략전쟁에 참여할 것과 신사 참배를 권고하기까지 하였"다고 시인했다.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민족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고 저버린 잘못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성찰하며 반성"한 한국천주교회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면서 사당동의 교원 기숙사의 이름을 계속 노기남관으로 둘지 여부에 대한 진지한 재검토가 있기를 바란다.

태그:#노기남, #노기남관, #사당동, #친일반민족행위자, #뮈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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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현충원 역사산책>(2022),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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