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자 3대3 농구대표팀은 최근 도쿄올림픽 진출에 도전했으나 아쉽게 고배를 마셨다. 강양현 감독을 중심으로 이승준, 이동준, 김민섭, 박민수 등으로 구성된 대표팀은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3대3 농구 예선 남자 조별리그 B조에서 1승 3패에 그쳤다.

한국은 강팀들이 몰린 B조에서 벨기에-미국-리투아니아에 패했으나 3차전에서 카자흐스탄을 21-13으로 꺾고 유일한 승리를 거둔 데 위안을 삼았다. 8강 진출을 위해 B조 2위 이상을 확보해야 했던 한국은 조 4위에 자리하며 대회를 마무리했다.

비록 세계와의 격차를 절감하며 원하는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열악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한 3대3 대표팀의 분전에 많은 농구팬들은 박수를 보냈다. 특히 최고령 국가대표로서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 있는 태극마크를 달고 팀을 이끌었던 맏형 이승준의 활약은 많은 감동을 안겼다.

이승준은 동생 이동준과 함께 한국 프로농구에서 큰 족적을 남긴 귀화혼혈선수 형제로 유명하다. 미국인 부친과 한국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 이승준-동준 형제는 2000년대 후반 나란히 한국 무대로 진출하여 화제를 모았다. 동생 이동준이 2006년 연세대 3학년으로 편입하여 한국 국적을 취득했고 이듬해 황금세대로 불리우는 2007 신인 드래프트의 일원으로 대구 오리온스(현 고양)에 2순위로 지명되며 KBL에 입성했다.

이승준은 미국 시애틀퍼시픽 대학교를 졸업하고 NBA 진출을 노렸으나 실패하고 미국 하부리그인 CBA를 비롯, 브라질, 포르투갈, 카타르, 폴란드 리그 등에서 선수경력을 이어왔다. 2007년 이승준은 당시 미국명 에릭 산드린이라는 이름으로 울산 현대모비스의 교체선수 지명을 받고 외국인 선수 신분으로 KBL과 첫 인연을 맺었다.

2년 뒤에는 2009년 처음으로 도입된 귀화혼혈 선수 드래프트에서 서울 삼성의 지명을 받아 한국 선수 신분을 인정받았고 정식으로 귀화 절차를 거쳐 한국 국적도 취득했다. 이 시기에 문태종-문태영 형제, 김민수, 전태풍 등도 함께 등장하며 KBL에서 귀화혼혈선수 열풍이 불었다.

이승준은 한국농구 데뷔 당시에 이미 30대를 넘긴 적지 않은 나이였으나 외국인 선수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우수한 신체조건과 운동능력을 앞세워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동생과 함께 모델을 연상시키는 수려한 외모로 많은 여성팬들을 얻기도 했으며, 일반적인 국내 선수들에게 볼 수 없는 화려한 덩크 퍼포먼스로 무수한 하이라이트 필름을 장식했다.

이승준은 서울 삼성-원주 DB-서울 SK를 거치며 2016년까지 프로선수 경력을 이어왔고 올스타에도 수차례 선정되어 덩크왕과 MVP까지 오르기도 했다. 프로 통산 기록은 7시즌간 총 254경기에 출전하여 경기당 평균 13.9득점 7.2리바운드 2.1어시스트, 누적 기록은 3525득점 1841리바운드 534어시스트였다.

무엇보다 이승준을 가장 빛나게 했던 것은 오히려 프로보다 국가대표팀에서의 활약이었다. 이승준은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의 주역이 된 문태종과 함께 대표팀에서 가장 큰 족적을 남긴 귀화혼혈선수로 평가받는다.

이승준은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은메달), 2012 런던올림픽 최종예선, 2013 필리핀 아시아선수권(3위) 등에서 세 번이나 국가대표로 발탁되었고 태극마크를 달았을때마다 맹활약을 펼쳤다. 정작 KBL에서는 소속팀마다 장단점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모습으로 아쉬움을 남겼던 것과는 달리, 대표팀에서는 세계적인 선수들을 상대로도 밀리징낳는 에이스급의 활약을 펼치며 '애국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장신에 힘과 기동력, 3점슛까지 두루 겸비한 이승준만큼 국제무대에서 빅맨과 득점원으로서의 옵션을 두루 갖춘 선수는 역사적으로도 흔치 않았다. 고질적인 빅맨 부족에 시름하던 한국농구에게 있어서 귀화 혼혈선수 중 단연 최고의 빅맨이었던 이승준의 가치는 매우 중요했다. 대표팀에서의 활약상만 놓고보면 공격력 면에서는 동시대에 함께 활약했던 김주성이나 오세근보다도 더 큰 비중을 차지하던 선수였고, 라건아가 등장하기 전까지 최고의 빅맨은 단연 이승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승준 본인도 국가대표팀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이 남달랐던 것으로 유명했다. 사실 KBL에서는 종종 기복 있고 느슨한 플레이로 질타를 받기도 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대표팀에서는 그야말로 허슬플레이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팀이 요구하는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극찬을 받았다. 이러한 대표팀에 대한 열정과 헌신 덕분에 지금도 많은 팬들이 '국가대표 이승준'에 대해서 대부분 좋은 추억만을 간직하고 있다.

이승준은 DB에서 활약하던 2013/14시즌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한 이후로 최대장점이던 운동능력이 급감했고 선수인생의 내리막길을 걸었다. 2015-16시즌 SK에서의 마지막 시즌을 끝으로 프로선수 경력을 마감했다. 하지만 농구에 대한 열정을 포기할수 없었던 이승준은 이후 혹독한 재활을 거쳐 2017년 3대 3 농구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2020년에는 여자프로농구 스타인 김소니아와 혼인신고를 마치고 어엿한 가정도 꾸리게 됐다. 아내 김소니아 역시 루마니아 3대 3 여자대표팀에 발탁되며 농구인 부부가 나란히 올림픽에 도전장을 던지게 된 장면도 나왔다.

이승준은 도쿄올림픽 예선을 앞두고 43살의 나이에 다시 한번 염원하던 태극마크를 달며 농구인생의 마지막 투혼을 불태웠다. 아무래도 나이를 감안 할 때 이번 도쿄올림픽 예선은 이승준의 농구인생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나설 수 있는 마지막 도전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비록 가장 원했던 본선진출의 꿈은 끝내 이루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승준에게는 많은 의미를 남긴 추억이었다. 일단 친동생 이동준과 함께 3대 3 농구에서나마 대표팀에서 함께하고 싶다는 꿈을 이뤘다. 이승준-동준 형제는 프로에서는 현역 말년인 SK시절에 함께 뛰기도 했으나, 대표팀에서는 귀화선수 1인 제한규정에 따라 이승준과 이동준이 동시에 태극마크를 달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카자흐스탄전에서는 팀의 유일한 승리를 확정짓는 21점째 위닝샷까지 터뜨리며 국가대표 경력의 유종의 미를 남기는 데 성공했다.

돌이켜보면 이승준이 한국농구에서 인정받기까지 걸어온 길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보수적인 한국농구계에서 때로는 이방인 취급을 받거나 편견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던 순간도 있었고, 적지 않은 나이에 관심을 가지지 않던 3대 3농구에서 도전하여 열악한 환경에서 개척자 노릇을 하며 많은 고생을 감수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준은 동생 이동준과 함께 한국에서 보낸 약 10여 년의 시간동안 한국과 농구에 대한 변함없는 순수한 진정성을 증명하며 많은 팬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이승준의 모습이 앞으로도 팬들에게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진한 여운과 추억으로 남게 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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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선수이승준 3대3농구 귀화혼혈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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