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6.06 11:32최종 업데이트 21.06.06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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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이후의 육군 지휘부를 출신별로 구분하면 크게 세 부류가 된다. 주로 만주국군과 일본군에 복무하다가 1946년 1월 이후 남조선국방경비대(국군)에 들어가 지휘부를 형성한 1세대, 그해 5월부터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육사) 단기 과정을 이수한 뒤 지휘부에 들어간 2세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10월부터 4년제 육사에 입학한 3세대로 나눌 수 있다.

육군의 주도권이 1세대에서 2세대로 넘어간 때는 1961년 5·16 쿠데타였다. 박정희는 만주국군에 복무했다는 점에서는 1세대이지만, 해방 뒤 육사 2기로 입학했다는 점에서는 2세대였다. 쿠데타의 정점인 그는 1세대인지 2세대인지 모호하지만, 쿠데타의 주력은 육사 5기와 8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2세대가 주도권을 차지한 시점은 1961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2세대가 갖고 있던 주도권이 3세대로 넘어간 것은 1979년 12·12 쿠데타다.

1세대 군부 이끈 양대 파벌  

5·16 쿠데타 이전에 1세대가 주도하던 군부를 이끈 양대 파벌이 있다. 여러 파벌 중에서도 함경도파와 평안도파가 가장 인상적인 족적을 남겼다. 그 두 파벌을 주도한 대표자가 함경도파 정일권과 평안도파 백선엽이다.


일제에 협력한 한국인 장교들은 주로 함경도·평안도 출신이었다. 이들은 해방 뒤 고향에 정착하기 힘들었다. 한편, 남한을 지배하게 된 미군정은 장교 출신 한국인들의 협력이 절실했다. 이런 요인들은 이북 출신들이 남한 군부를 주도하는 배경이 됐다.

그들이 남한 군대를 주도했다는 점은 5·16 직전까지도 이남 출신의 장군이 드물었다는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훗날 국무부 차관이 되고 레이건 행정부의 중동특사가 될 필립 하비브 주한미국대사관 참사관이 1962년 8월 17일 딘 러스크 국무장관에게 발신한 기밀 전문은 그런 실상을 잘 보여준다. 한국 군부 내의 파벌을 분석한 이 기밀 전문은 <신동아> 2010년 3월호 기사 '1962년 미 대사관 기밀 문건'을 통해 국내에 알려졌다.
 
일본의 통치하에 있는 만주국에 (한반도) 북부 출신 인물이 많이 참여함에 따라, 한국군에서 북부 출신의 지도력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로 인해 (1962년으로부터) 1년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상황은 남부 출신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육군 장성 자리에 오른 젊은 박정희에게 독특한 지위를 부여했다.
 
이북 출신들이 군부를 주도하는 상황에서, 이남 출신으로는 드물게 박정희가 장군 자리에 올라 있었다. 이 점은 군부 지도부에 대항하는 쿠데타 세력이 박정희를 중심으로 뭉치게 되는 한 가지 원인이 됐다.

박정희는 경북 출신이고 김종필은 충남 출신이었다. 당시 군부의 비주류인 이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동기는 일차적으로는 권력욕과 정치 혼란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이북 출신들이 군을 주도하는 것에 대한 불만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북한 출신들이 그 정도로 우세했기 때문에, 이북 출신인 정일권과 백선엽이 이남에서 군부 파벌을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하비브의 분석에 따르면, 1950년까지는 평안도파가 우세했고, 그 뒤로는 함경도파가 우세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이 같은 변화는 함경도파의 단결력에 기인했다. "정일권은 가장 응집력 있는 집단을 주도"했다고 그는 말한다.

정일권 앞지른 백선엽 
 

박정희와 백선엽 1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백선엽 대장(왼쪽)이 5사단장으로 부임한 박정희 준장(왼쪽 세번째) 등 예하 사단장의 보직신고를 받는 장면 ⓒ 자료사진

 
1950년을 기점으로 무게 중심이 평안도파를 떠났지만, 두 리더에게 개인적으로 일어난 양상은 정반대였다. 평안도파가 약해지는 이 시점에 그 리더 백선엽은 오히려 강해졌다. 백선엽이 정일권을 앞지르는 일도 이때 나타났다.

백선엽(1920년 생)은 정일권보다 나이(1917년 생)로는 3년 늦고 중앙육군훈련처(만주군관학교) 입학 연도로는 5년 느렸다. 1945년 해방 당일에 백선엽은 만주국군 중위였고, 정일권은 한 단계 위인 상위였다. 해방 이전의 군인 경력자를 친미 군인으로 탈바꿈시키는 기구였던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시점인 1946년 2월에도 백선엽은 한국군 중위, 정일권은 대위였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까지도 이 구도는 유지됐다. 1950년 7월 1일에 정일권은 육군총참모장(육군참모총장)이 됐다. 이 달에 정일권은 육군 소장이 됐고 백선엽은 준장이 됐다.

이랬던 구도가 백선엽의 대장 승진으로 역전됐다. 정일권이 중장 계급장을 달고 있는 동안에 백선엽은 소장에서 중장으로, 다시 대장으로 승진했다. 1953년 2월 2일 자 <동아일보> 1면 기사는 "육군총참모장 백선엽 중장은 31일부로 한국 최초의 육군대장에 승진·임명되었다"고 보도했다. 중장 진급 때까지만 해도 항상 앞섰던 함경도파 리더가 최초의 대장 진급이라는 영예를 평안도파 리더에게 내줬던 것이다.

정일권에게 뒤지던 백선엽이 한국전쟁 막판에 앞서나가게 된 것은 오늘날 지적되고 있듯이 그의 전공이 과장되게 알려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전쟁 도중에 정일권이 주춤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정일권 편은 "육군참모총장 재직 시절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등이 문제가 되자 사임했다"고 서술한다. 국민방위군 보급품 횡령으로 수만 명이 굶어죽거나 얼어 죽고 국군이 거창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이 논란이 되면서 정일권이 물러나게 됐고, 이는 전반적으로 함경도파가 우세해지는 상황 속에서도 평안도파 리더가 함경도파 리더를 앞지르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들이 주도하던 함경도파와 평안도파의 각축 시대는 1961년 5·16 쿠데타와 그 후의 숙군 작업을 거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5·16 쿠데타를 뒤엎기 위한 역쿠데타가 자주 발생했지만 하나 같이 실패했고, 두 이북 파벌은 되살아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끈질긴 생명력
 

귀국 인사차 국회의장실을 방문한 김종필 국무총리를 맞이하는 정일권 국회의장. 1973.6.18 ⓒ 연합뉴스

 
그런데 두 리더만큼은 강인한 생명력을 발휘했다. 이들은 자기 파벌을 도태시킨 박정희 군사정권 하에서도 명성을 이어갔다. 정일권은 박 정권에서 외무부 장관·국무총리에 이어 국회의원과 국회의장을 역임했고, 백선엽은 주프랑스대사·주캐나다대사에 이어 교통부 장관을 역임했다.

백선엽의 경우에는, 행정부 공직에서는 정일권을 따라가지 못했지만 자신의 신화를 지켜가는 인상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자기 파벌을 무너트린 박 정권 하에서도 그의 과대 포장된 한국전쟁 전공은 까발려지지 않았다.

두 리더가 영예를 유지한 결정적 이유는 박정희와의 인연에서 찾을 수 있다. 1956년에 전역한 뒤 터키·프랑스·미국에서 대사로 근무하다가 5·16 당시 하버드대학에 있었던 정일권은 박정희가 미국의 지지를 획득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위의 <친일인명사전>은 "하버드대학 유학 중이던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박정희의 지시를 받아 미국 조야를 다니며 군사정부의 지지를 이끌어냈다"고 말한다.

백선엽은 남로당원 신분이 들통 나서 영창에 갇힌 박정희를 구명해준 인연이 있었다. 박정희는 함경도파는 아니었지만 만주국군을 고리로 백선엽과 연결돼 있었다. 이것이 백선엽이 구명 운동에 나서는 계기가 됐다.

미군정의 지원에 힘입어 남한에 정착하기는 했지만 기반이 튼튼하지 않았던 이북 출신들은 경제력 축적을 위해 부정부패를 불사했다. 제1공화국 때 군부의 부패가 심각했던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이는 박정희·김종필 같은 이남 출신들이 군 수뇌부를 경멸하는 원인으로도 작용했다.

또 이북 출신들은 숫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자파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보호하려 했다. 하비브의 비밀 문건은 "정일권과 백선엽은 모두 자신들이 군사적·국가적 임무에 덧붙여서 자기 파벌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면서 "그들은 자기 파벌의 성원들이 파벌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면 위법행위를 하더라도 이들을 보호하고 계속 활동하게 할 뿐 아니라 처벌을 받을 경우 복권시켜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백선엽 입장에서 볼 때, 같은 만주국군 출신인 박정희의 남로당 활동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배반은 될 수 있어도 평안도파에 대한 배반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자파에 대한 반역만 아니라면 눈감아주고 비호해주던 평안도파의 행태가 백선엽의 박정희 구명을 낳은 측면도 있었다.

한 사람은 박정희를 공산당 연루 혐의로부터 건져주고, 한 사람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미국의 지지를 얻도록 도와줬다. 이 같은 박정희와의 인연은 백선엽과 정일권이 자파의 몰락 속에서도 개인적으로 승승장구하는 비결이 됐다.

국립현충원에 누워 있는 친일 반민족 장군들 중에서 이 둘이 특히 많이 알려진 것은 이들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육군 파벌의 리더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박정희와의 인연이 돈독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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