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개봉하면 기자나 평론가들이 영화에 대한 평점을 매긴다. 최근엔 이런 평점들을 포털사이트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어 관객들이 영화를 고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작년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을 휩쓸었던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16명의 기자 및 평론가들로부터 무려 9.06점의 평점을 받았다. 그리고 <기생충>은 실제로 봉준호 감독 영화 중 <괴물>에 이어 두 번째로 천 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평론가들의 뜨거운 찬사와 높은 평점이 언제나 흥행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평론가들에게 높은 점수를 받은 영화들은 '대중성이 떨어지는 영화'로 낙인 찍히며 흥행에서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창동 감독이 연출해 2010년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던 영화 <시>는 14명의 평론가들로부터 8.61점의 높은 평점을 받았지만 전국적으로 20만 관객을 갓 넘기는데 그쳤다. 

반면에 평론가들에게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영화들 중에서도 대중들에게 유난히 뜨거운 지지를 받는 경우도 있다(네티즌들의 장난에 가까운 별점을 받은 일부 망작 영화들 제외). 평론가들에게는 단순한 이야기구성과 부족한 개연성으로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지만 관객들에게는 마지막 15분의 원초적인 카타르시스로 관객들에게 짜릿한 영화적 쾌감을 안겨준 영화 <해바라기>처럼 말이다. 
 
 1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던 김래원의 대표작은 여전히 15년 전 작품이었던 <해바라기>다.

1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던 김래원의 대표작은 여전히 15년 전 작품이었던 <해바라기>다. ⓒ (주)쇼박스

 
'덜' 여물어서 '더' 어울렸던 김래원의 연기

<신세대 보고서 어른들은 몰라요>와 <나>, <순풍 산부인과>, <학교2> 등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렸던 김래원은 서글서글한 외모와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로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2000년에는 고 곽지균 감독의 <청춘>으로 청룡 영화제 신인상을 받았고 2003년에는 드라마 <눈사람>과 <옥탑방 고양이>를 연이어 히트시키며 2003년 MBC 연기대상 최우수상을 수상, 연기력과 스타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김래원은 20대 시절 트랜디한 멜로물에서 강세를 보였다.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와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 영화 <…ing>와 <어린 신부> 등이 대표적이다.

2005년 경찰이 된 조폭의 이야기 <미스터 소크라테스>에 출연해 유쾌한 매력을 뽐낸 김래원은 2006년 강석범 감독의 <해바라기>에 출연했다. 그동안 주로 서글서글한 훈남 역할을 주로 맡은 김래원에게 내성적이고 상처를 안고 사는 오태식은 썩 어울리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하지만 여물지 않은 김래원의 연기는 오히려 오태식 캐릭터와 절묘한 조화를 이뤘고 <해바라기>는 비수기인 11월에 개봉했음에도 전국 130만 관객을 모으며 선전했다.

김래원은 2009년 영화 <인사동 스캔들>을 마지막으로 군에 입대해 사회복무요원으로 병역의무를 마쳤다. 그리고 2011년 복귀작이었던 드라마 <천일의 약속>에서 알츠하이머에 걸린 수애와 애틋한 멜로 연기를 펼치면서 2011년 SBS 연기대상 최우수상과 10대 스타상을 수상했다. 2014년 연말에는 박경수 작가 '권력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하는 드라마 <펀치>에서 박정환 검사 역으로 또 한 번 깊은 인상을 남겼다.

김래원은 2015년 유하 감독의 <강남1970>에 이어 2017년에는 곽경택 감독의 <희생부활자>에서 김해숙과 또 한 번 모녀로 연기호흡을 맞췄다.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낚시광인 김래원이 목포에 낚시하러 갔다가 영화 <롱 리브 더 킹>의 시나리오를 받고 캐스팅된 사건도 꽤나 유명하다. 2019년 공효진과 함께 출연한 영화 <가장 보통의 연애>로 300만 가까운 관객을 불러 모은 김래원은 지난 3월에 종영한 드라마 <루카 : 더 비기닝>을 마쳤다.

평론가와 관객의 평점 괴리가 큰 <해바라기>
 
 <해바라기>는 남성적인 액션 느와르이면서도 따뜻한 가족 드라마였다.

<해바라기>는 남성적인 액션 느와르이면서도 따뜻한 가족 드라마였다. ⓒ (주)쇼박스

 
<해바라기>는 네티즌 평점이 유난히 높은 영화다. 실제로 네이버 포털 사이트의 영화 섹션을 보면 <해바라기>의 네티즌 평점은 무려 9.22점이다. 작년 아카데미 시상식을 평정했던 <기생충>이 8.48점, 1600만 관객에 빛나는 <극한직업>이 8.50점인 것과 비교하면 <해바라기>가 관객들에게 얼마나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 알 수 있다. 비록 촘촘하게 잘 만들어진 영화는 아닐지 몰라도 <해바라기>에는 관객들을 뜨겁게 하는 힘이 있다는 뜻이다.

아들을 죽인 태식(김래원 분)을 양아들로 받아준 양덕자(김해숙 분)와 쌀쌀맞지만 무심한 듯 태식을 챙기는 희주(허이재 분)는 영화 속에서 태식과 함께 묘한 가족애를 보여준다. 특히 카센터 일로 첫 월급을 탄 태식이 어머니에게 선물을 사오던 날, 어머니를 안아주라고 태식에게 명령하는 희주의 귀여운 협박(?)은 관객들을 미소 짓게 만들기 충분하다. 교도소에서 나온 태식은 해바라기 식당 식구들과 가족이 되면서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찾아간다.

하지만 타고난 악역 조판수(김병옥 분) 일당은 희주를 벽돌로 내리치고 양덕자를 살해하면서 태식이 행복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리고 분노에 가득 찬 태식은 잔혹한 피의 복수를 시작한다. "꼭 이렇게 다 가져 가야만 속이 후련했냐?"로 대표되는 <해바라기>의 명대사와 액션 장면은 영화의 대미를 장식한다. 특히 조판수 일당 앞에서 울분을 토하는 김래원의 연기는 대단히 인상적이다.

<해바라기>는 복수를 끝낸 태식이 불타는 룸살롱에 앉아 있고 훗날 대학교 수학과 조교가 된 희주가 태식을 그리워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DVD 삭제 영상에 등장하는 또 다른 엔딩에는 룸살롱에서 나온 태식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2004년 엄정화와 고 김주혁이 출연했던 로맨틱 코미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을 연출했던 강석범 감독은 2년 후 <해바라기>를 통해 한국형 액션 느와르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하지만 강석범 감독의 차기작은 어설픈 코미디 영화 <정승필 실종사건>이었고 같은 해 연말 강혜정, 한채영,허이재가 출연했던 <걸프렌즈>를 끝으로 더 이상 상업영화를 연출하지 않았다.

<신세계>의 이중구, <해바라기>에선 찌질한 경찰
 
 <해바라기>의 찌잘한 비리경찰 박성웅(왼쪽)이 7년 후 <신세계>의 이중구라 될 거라 예상한 관객은 거의 없었다.

<해바라기>의 찌잘한 비리경찰 박성웅(왼쪽)이 7년 후 <신세계>의 이중구라 될 거라 예상한 관객은 거의 없었다. ⓒ (주)쇼박스

 
지난 2013년 개봉해 460만 관객을 모은 영화 <신세계>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배우들인 최민식, 황정민, 이정재를 동시에 캐스팅해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이들은 각각 영화 속에서 최고의 존재감을 발휘하며 관객들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세계>에서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치며 최고의 수혜자로 떠오른 배우는 따로 있었다. 바로 골드문 서열4위이자 전 재범파 부두목 이중구 역의 박성웅이었다.

이중구는 <신세계>에서 "살려는 드릴게", "죽기 딱 좋은 날씨다", "죽기 전에 담배 한 대 정돈 괜찮잖아?" 등 출연 분량 대비 엄청난 양의 명대사들을 쏟아냈다. 평범한 조연급 연기자였던 박성웅은 <신세계> 이후 <찌라시 : 위험한 소문>, <황제를 위하여>, <살인의뢰>, <오피스>, <검사외전>, <내 안에 그놈>,<오케이 마담> 등에서 주연급으로 활약했다. 박성웅은 연말 방송 예정인 JTBC드라마 <설강화>에도 출연할 예정이다.

지금은 엄청난 존재감을 자랑하는 배우가 됐지만 <해바라기>에 나올 때만 해도 박성웅은 사실상 무명배우에 가까웠다. 박성웅은 학창 시절 태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가 커서 경찰이 되는 최민석을 연기했는데 조판수 일당과 결탁해 조판수 일당의 범죄를 묵인하는 비리 경찰이다. 특히 태식이 카센터에서 동네 건달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거나 해바라기 식당이 엉망이 될 때도 민석은 멀리서 지켜 보며 시간을 끄는 비겁한 행동을 보인다. 

이 밖에도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악역 연기로 유명한 김병옥이 최종보스 조판수를, 역시 악역 연기에 일가견이 있는 김정태가 양덕자를 살해하는 김양기를 연기했다. 댄스듀오 데믹스 출신으로 훗날 <추노>로 이름을 알린 한정수는 태식을 두려워하는 이창무 역을 맡았다. 유쾌한 이미지의 배우 정은표도 태식의 문신을 지워주는 의사 역으로 특별 출연해 웃음 포인트가 많지 않은 <해바라기>에서 관객들의 입꼬리를 올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해바라기 김래원 김해숙 김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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