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21년 5월 26일 노동안전보건단체들이 세종시 고용노동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문턱 높고 제외 많은 산재보험"에 대한 제도개혁을 촉구하고 상징의식을 벌이고 있다
 2021년 5월 26일 노동안전보건단체들이 세종시 고용노동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문턱 높고 제외 많은 산재보험"에 대한 제도개혁을 촉구하고 상징의식을 벌이고 있다
ⓒ 반올림

관련사진보기


산업재해(이하 산재) 처리 지연으로 인한 노동자들의 고통은 이미 오래된 문제이자,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문제입니다. 대표적인 업무상 질병인 근골격계질환의 경우 산재 처리에 평균 4개월이 걸립니다. 노동자들은 이렇게 긴 처리 기간 동안 생계 문제의 불안에 직면합니다.

처리 지연의 문제는 산재 신청을 기피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입니다. 더구나 대다수의 일용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산재로 해고를 당해도 산재 승인을 받기 전까지 해고의 부당성을 주장할 수도 없는 막막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들이 세종시 고용노동부 앞에서 농성 중에 있습니다.

처리 지연의 문제로 노동자들의 요구가 제기된 이후 근로복지공단은 몇 가지 해결방안을 제시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6대 근골격계질환에 대한 '추정'의 원칙입니다. 업무와 질병 간의 인과관계 에 대해 일일이 개별 심사를 할 것이 아니라 일정 기준 안에 들면 신속하게 처리하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2020년 한 해 동안 이를 적용하는 사례는 1만여 건 중에 겨우 367건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적은 이유는 '아직 세부적인 기준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질병의 종류와 적용 직종을 협소하게 규정한 것도 모자라서 또 어떤 세부적인 기준이 필요한 건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편, 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이 협소하게 정한 형태의 '추정의 원칙'을 적용받는 노동자들이라고 해서 산재 처리가 과연 빨라졌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특별진찰을 기다리는 시간, 특별진찰의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 더 노동자들을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산재 처리 기간을 단축하겠다며 제도를 도입했지만 근로복지공단은 공정성이라는 미명하에 또 다른 기준과 절차를 만들어 애초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최근 강순희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의 언론 인터뷰는 이렇게 거꾸로 가는 공단 행보의 원인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분별한 산재 신청이 처리 지연을 유발하고 있다'는 이사장의 인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나라 산재 노동자 중 산재 신청을 하는 비율이 30% 수준에 불과합니다. 70%의 산재 노동자들이 모르고, 블편하고, 불안해서 산재 신청을 하지 않는 현실에서 '무분별한' 산재 신청이 처리 지연을 유발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적반하장입니다.

노동자들은 불안하고 불편해서 산재 신청을 꺼리고 사업주들은 산재 은폐를 위해 공공연하게 공상 처리를 일삼는 현실에서 산재 신청이 무분별하다는 인식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빅데이터 분석으로 천편일률적인 기준을 공고히 하면 산재 처리 기간이 단축될 것이라는 강순희 이사장의 환상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 더러 산재보험의 목적과 취지를 망각한 퇴행일 뿐입니다.

산재보험 문턱 낮아지면 숨어있던 70%의 산재 드러날 것
 
2021년 5월 26일 세종시 고용노동부 앞에서 노동안전보건단체들이 산재 처리지연 근본대책 촉구, 모든노동자를 위한 산재보험 제도개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중이다. 발언하는 최진일 충남노동건강인권센터 '새움터' 대표.
 2021년 5월 26일 세종시 고용노동부 앞에서 노동안전보건단체들이 산재 처리지연 근본대책 촉구, 모든노동자를 위한 산재보험 제도개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중이다. 발언하는 최진일 충남노동건강인권센터 "새움터" 대표.
ⓒ 반올림

관련사진보기

  
산재 처리 지연 문제는 이미 과도하게 복잡한 제도에 추가적인 절차와 기준을 더하는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과감한 덜어내기와 문턱 낮추기를 통해 더 많은 노동자들이 산재보험의 혜택을 누리고, 고통받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 사회보험으로서의 산재보험의 존재 이유에 부합하는 방향입니다.

이 시간에도 노동재해로 고통받고 있는 노동자들의 요구는 분명합니다. '추정의 원칙'을 산재보험 목적과 취지에 맞게 법제화하여 즉각 시행하라는 것, 그 적용 대상을 현실에 맞게 대폭 확대하라는 것, 그리고 특별진찰 결과 '업무 연관성이 높다'고 판단된 재해자는 별도의 심의 없이 즉시 승인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시행할 수 있는 이러한 대책들과 더불어, 이제는 산재보험 제도의 근본적인 전환을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언제까지 우리는 이미 발생한 산재를 증명하고 검증하느라 개인과 사회가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야 합니까? 산재 증명을 떠나 다치고 병들었을 때 치료와 생계를 보장받는 것이 이 사회구성원의 기본권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우선 보상하고 사후에 정산하는 근본적인 전환은 필요한 일이고 가능한 일입니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이상론이나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많은 선진국들이 산재보험을 운용하고 있는 방식이고, 우리나라의 산재보험의 규모나 인프라도 이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요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산재보험의 문턱이 낮아지면 숨어있던 70%의 산재가 드러날 것입니다. 산재율이 치솟을 것이고 정부와 관계기관은 이 상황이 두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산재보험 제도가 궁극적으로 산재를 예방하는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이러한 드러냄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드러내지 않고는 하루에 7명이 일하다 죽는 현실을 바꿀 수 없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사망사고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약속, 자식 잃은 심정으로 진정성을 가지고 산재 문제를 대하겠다는 약속이 거짓이 아니라면, 산재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산재보험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것을 다시금 촉구합니다.

덧붙이는 글 | 최진일님은 충남노동건강인권센터 '새움터' 대표입니다.


태그:#산재, #산재보험, #새움터, #노동부, #추정의원칙
댓글

2007년 황상기 씨의 제보로 반도체 직업병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이후, 전자산업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시민단체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