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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어린 조카들에게 책을 선물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꽤 환호 받던 책 선물이 터닝메카드 카드나 레고 같은 장난감 선물에 밀리기 시작한 건 한참 되었다. 어느 날은 "고모가 오늘 선물 가져왔지!" 하는 뿌듯한 외침에 아무 기대감 없다는 듯, 당연하다는 듯 "또 책이지?" 하고 여상히 대답해서 서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못 버리는 로망 하나가 있다. 별스럽지 않게 내가 선물했던 책 중에서 한 권 정도는 각별히 마음에 가닿아 그들이 나중에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었을 때 '제 인생 책이었어요' 하며 소중한 추억으로 떠올리게 되길... 그런 장면을 바라는 욕심이 있다.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로 내밀 때의 마음은 꼭 이렇게 욕심 하나를 품게 되는 것 같다. 대개 좋아하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건넬 때 더 그렇다. 곧 공유하게 될 생각이 또 하나 더 는다는 신남, 은근슬쩍 '내가 좋아하는 건 이런 거야' 내비치는 쑥스러운 고백, 또는 좋더라고, 정말 좋더라고 공감해주길 바라는 기대... 그런 것들이 실현되길 바라는, 대략 그런 종류의 욕심이다. 
 
"이거 재미있는데 한번 읽어 봐." 
최대한 무심한 척하며 술자리 같은 데서 책을 건넸다. 감상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냥 주는 것만으로 좋았다. 내가 인생에서 소중히 여기는 것이 상대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아서 마음이 간질거렸다. - <책이라는 선물>, 38쪽

<책이라는 선물>은 기획부터 편집, 디자인, 교정, 인쇄, 제본, 유통, 영업, 서점, 비평의 순으로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책이 거치는 여정에 관여한 거의 모든 분야 사람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그러니까 편집하는 시마다 준이치로부터 디자인하는 야하기 다몬, 교정하는 무타 사토코, 인쇄하는 후지와라 다카미치, 제본하는 가사이 루미코, 총판의 가와히토 야스유키, 영업하는 하시모토 료지 등등 책을 만드는 그 각각의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 책을 대하는 마음과 책에 관한 생각이 다채롭게도 펼쳐진다.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하기 위해 정성껏 포장했던 때가 언제인가 싶다. 실로 오랜만이다.
▲ 책이라는 선물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하기 위해 정성껏 포장했던 때가 언제인가 싶다. 실로 오랜만이다.
ⓒ 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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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편집자 시마다 준이치로처럼 "최대한 무심한 척하며 술자리 같은 데서 책을 건넨" 경험이 나도 좀 있다. "최대한 무심한 척"이 포인트이고 거기에 더해 술김이라는 핑계로 조금 더 아무렇지 않게 건넬 수 있다.

아무래도 알코올이 개입하면 선호하는 생각이나 내용을 밖으로 드러내는 일이 조금 덜 부담스럽고 그래서 조금 더 용감해진다. "이거 내가 좋아하는 책이야" 하는 말은 어떨 때는 말도 안 되게 머쓱하기도 해서 의외로 그런 "오다 주웠어" 하는 식의 무심함으로 가장한다. 

이 책을 기획한 기획자는 "책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을 '책을 선물하는' 과정으로 재인식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 책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들은 이미 그런 마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조업(출판은 제조업이다)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은 물건을 잘 만들어서 좋은 값에 잘 팔고 싶다는 마음이 당연하겠지만 그 당연한 마음 곳곳에 스민 '선물을 건네는 마음'을 자주 봐 왔다.

이런 내용은 꼭 책으로 만들어 많은 사람과 함께 생각하고 싶다, 이런 책은 꼭 한국 독자에게도 전해졌으면 좋겠다, 좀 더 아름답고 적합한 만듦새로, 좀 더 빨리, 보다 많이, 생각이 전해지고 나눠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항상 나보다 받을 사람의 입장을 먼저 고려하니 선물을 건네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좋은 것을 나누고 싶은 마음. 당신을 기쁘게 해 주고 싶다는 마음. 그런 마음, 마음, 마음…. 이 책을 읽다 보면 좋아할 만한 선물을 고를 때의 설렘과 정성껏 포장할 때의 조바심, 전하러 가는 길의 뿌듯함, 막상 건넬 때의 긴장 같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온갖 감정을 자연스레 느끼게 된다. 
 
내가 책 만드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 이상 참 잘 만들었다, 애정과 수고가 많이 들어갔다, 싶은 책은 가능한 한 사려고 한다. 그 행동이 돌고 돌아 내 생활을 지탱해 주리라 믿는다. 소박한 생활을 지속하려면 그런 생활을 선택한 다른 사람들을 헤아리고 서로 지지해 주어야 한다.
- <책이라는 선물>, 80쪽

그런데 세상의 모든 애정이 다 이루어지던가. 그득히 마음이 넘쳐 내미는 손길이라고 다 잡아주는 건 아니다. 그리고 내밀었다 머쓱하게 거둬지는 마음이라도, 참 이쁘다, 정성스럽다, 애썼다 싶은 마음도 참 많아서 나도 북디자이너 야하기 다몬처럼 "참 잘 만들었다, 애정과 수고가 많이 들어갔다, 싶은 책은 가능한 한 사려고 한다".  어깨 두드리며 위로도 해주고 싶고, 응원 해주고도 싶고, 그 마음 단단하다면 너무 쉽게는 포기하지 말라는 무책임한 말도 막 해주고도 싶다.

책 뒤표지 오은 시인의 추천사처럼 "책이라는 '전체'를 통해서만 고스란히 전달되는 마음 같은 책"이니 독자의 입장에서도 그 마음 한번 흠뻑 누려볼 수 있겠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선물하는 마음으로 내게 내민 것이구나 싶어서 괜히 옆에 놓인 이 책 저 책을 쓰다듬어 보았다. 

쓰다듬으며 시인의 말처럼 "혼자만 알고 싶다가도 소중한 이가 이 은밀한 기쁨을 함께 누렸으면 하는" 책이라는 선물을 생각하며 좋은 사람 내 친구 OO에게 오랜만에 은밀한 기쁨을 함께 누릴 책 한 권 선물해야겠다 싶다. 기왕 선물하는 것 예쁘게 포장도 할 참이다. 좋은 것을 좋은 사람에게 전할 생각을 하니 기분이 꽤 즐겁다. 

책이라는 선물 - 책을 만들고 팔고 알리는 사람들이 읽는 사람에게

가사이 루미코 외 9명 (지은이), 김단비 (옮긴이), 유유(2021)


태그:#책이라는선물, #유유출판사, #책소개, #서평,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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