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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개 여성시민사회단체 소속 회원들이 2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평등 사회를 위해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179개 여성시민사회단체 소속 회원들이 2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평등 사회를 위해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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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고백으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이 겪고 있는 차별과 혐오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솔직히 제 자신의 일로 생각하지는 못하였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도 잘 몰랐습니다.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함께 사는 가족 덕분이었습니다. 당시 아내는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성소수자 환자들이 많이 찾아와서 진료를 받는다고 하더군요. 이 우연한 일을 계기로 두 가지를 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제 자신이 의과대학을 졸업하였고 현재 내과 전문의이면서도, 성소수자를 위한 의료에 대해서 아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왜 아무것도 몰랐던 것일까요? 과거 학생 시절 의과대학에서 전혀 가르쳐주지 않았고, 전공의 수련을 받는 동안에도 배울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의과대학과 수련병원에서는 성소수자 건강과 의료에 대한 교육과 수련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의과대학에서 지금 학생들을 교육하지 않는다면 20년 후에도 달라질 것이 전혀 없겠지요.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지금 당장 교육을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의과대학에서 성소수자 건강과 의료에 관한 교육과정을 개설하기 위하여 몇몇 교수와 경험이 많은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준비를 시작하였습니다. 마침 제가 근무하고 있는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새롭고 다양한 주제를 접할 수 있도록 선택과정 개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국내 의과대학에서는 아직 유사한 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해외 사례를 찾아보게 되었지요. 

우린 이미 많이, 너무나 많이 늦은 것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국과 캐나다의 의과대학은 성소수자 건강과 의료에 관하여 평균 5시간 정도 교육을 필수로 하고 있더군요. 미국 의학교육을 선도하고 있는 하버드 의과대학에서는 2016년에 진료 현장 실습으로 구성된 선택과정을 최초로 개설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처음 들었던 생각은, 우리도 많이 늦지는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이었습니다. 

사실 준비를 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것은, 주변의 시선보다 정작 학생들이 관심이 없으면 어떡하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제가 공개되자마자 이 수업을 꼭 듣고 싶다고 메일을 보낸 학생이 두 명이나 있었고, 금세 12명 정원을 모두 채우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학생들이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학교와 교수가 관심이 부족했던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학생들의 호응에 힘입어, 과정을 준비하면서 기대와 긴장이 함께 뒤섞여 마음이 점점 고양되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과정 시작을 하루 앞둔 저녁에, 날벼락과도 같은 변희수 하사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순간 가슴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 너무나 소중한 생명 하나를 또 놓쳐 버렸구나! 해외와 비교해서 아직 많이 늦지 않았다고 내심 안도한 것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이미 많이, 너무나 많이 늦은 것이었습니다.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의 관심과 열의는 뜨거웠습니다. 매주 4시간씩 진행되는 4주 과정을 통하여 성소수자의 개념, 역사적 과정, 사회적 차별과 혐오로 인한 건강권 침해와 건강불평등, 그리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들에 대하여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특히 성소수자 진료를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병력 청취와 신체 진찰부터 건강검진과 호르몬 치료, 수술적 치료까지 구체적인 내용을 배울 수 있어서 학생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마지막 수업에서는 살림의원을 방문하여 성소수자 친화적 의료 환경의 원칙에 대한 설명을 들었고, 살림의원을 함께 둘러보면서 성중립 화장실을 직접 살펴보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의과대학 필수 교육과정에 성소수자 건강과 의료에 대한 내용이 없다는 점을 매우 아쉬워하였고, 수업을 듣지 않은 다른 친구들에게 수업 내용에 대한 질문도 받았다고 합니다. 이번 교육과정은 비록 12명의 학생과 함께 처음으로 진행한 작은 선택과정 수업이었지만, 꾸준히 그리고 더 확대해서 이어가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고귀한 존재
 
2020년 5월 14일 이태원 코로나19 확진자 확산 관련해 성소수자 혐오가 이어지자 부산지역 진보정당, 시민사회단체 등으로 이루어진 차별금지법제정부산연대가 더불어민주당 부산시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21대 국회가 차별금지법 제정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2020년 5월 14일 이태원 코로나19 확진자 확산 관련해 성소수자 혐오가 이어지자 부산지역 진보정당, 시민사회단체 등으로 이루어진 차별금지법제정부산연대가 더불어민주당 부산시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21대 국회가 차별금지법 제정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 김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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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성소수자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로 돌아가서, 제가 두 번째로 깨닫게 된 것은 제 마음 깊은 곳에서 신념과 신앙이 갈등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성소수자의 인권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차별과 혐오에 절대적으로 반대하면서도, 신앙인으로서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성별과 그에 따르는 지향을 우리가 스스로 선택해도 되는지에 대해서 솔직히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대학에서 성소수자 건강과 의료에 대한 교육과정을 준비하면서, 선생인 저 자신도 많은 것을 배우고 또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타고난 생물학적 성별(sex)뿐 아니라,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관한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과 누구에게 끌리는가에 관한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특별히 불편함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이를 의식해서 구분할 일이 별로 없지만, 우리 사회에는 성별과 성별 정체성, 성적 지향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아직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전체 인구의 5%까지도 추정하고 있습니다. 우리 직장 동료 중에도, 학교 친구들 중에도 있을 수 있고, 오늘 진료실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환자 중에도 당연히 있을 것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저의 고민은 자연스럽게 다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성별을 하느님께서 부여해 주셨다면,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도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지요. 많은 연구 결과를 살펴보고 당사자들의 생생하고 절절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성별처럼 타고 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가치관이 다를 수는 있겠습니다만, 신앙인의 관점에서도 나의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은 삶의 다른 중요한 것들과 마찬가지로 결국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우리 중 누구에게는 다수의 정체성과 지향을, 누군가에게는 소수의 정체성과 지향을 주셨을까요? 당연히 저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감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 땅의 누구도 하느님의 뜻을 다 알지는 못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비록 기독교 교리를 깊게 다 알지 못하는 한 명의 평신도 신앙인이지만, 제가 이해하고 믿는 신앙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있는 모습 그대로 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고귀한 존재이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하느님께서 너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가 인간답고 행복하게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는 이러한 이웃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우리 주변의 소수자들이 차별로 고통받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차별금지법은 이처럼 다양한 정체성을 이유로 사회적으로 차별받지 않도록 포괄적으로 금지하는 법안입니다. 2007년부터 5차례 이상 국회에 발의되었지만 안타깝게도 번번이 제정에 실패하곤 하였지요. 

안타까운 일은 일부 기독교 성직자와 신자들이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이 차별금지법에 포함된다는 이유로 반대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움직임 때문에 제가 그랬던 것처럼 대다수의 많은 신앙인들은 더욱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운 심정일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도 성별과 마찬가지로 타고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의 이웃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자 하는 신앙인으로서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중에 가장 고통받고 있는 그 누군가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제정을 지지해야 하지 않을까요? 다행히 최근에 차별금지법 제정 국민동의청원을 함께 시작하는 99인에 서강대 총장 심종혁 신부께서도 이름을 올리셨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신앙인으로서 많은 위안과 힘이 되었습니다.

의과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자 한 명의 시민, 그리고 부족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애쓰는 신앙인으로서, 동료 의료인, 학생, 시민, 신앙인 여러분께 간곡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정체성과 이유로 소수자로 살아갑니다. 오늘 성소수자가 겪는 차별과 고통은 우리가 학교와 직장, 그리고 사회에서 나이와 학력으로, 때로는 출신 지역이나 경제적인 이유로 받는 차별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소수자들이 정체성으로 인한 차별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우리 모두가 인간답고 행복하게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모아주십시오. 2007년부터 애타게 기다려온 차별금지법이 이번에는 꼭 제정될 수 있도록 지지에 동참해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 차별금지법 제정 국민동의청원 바로가기 https://bit.ly/equality100000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윤현배님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휴먼시스템의학과 교수입니다.


태그:#차별금지법,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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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차별의 예방과 시정에 관한 내용을 담은 법입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다양한 단체들이 모여 행동하는 연대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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