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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요작곡가인 정순철, 그의 이름은 노래만큼 친근하지 않다.
 동요작곡가인 정순철, 그의 이름은 노래만큼 친근하지 않다.
ⓒ 월간 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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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앞에서 짝짜꿍
아빠 앞에서 짝짜꿍
엄마 한숨은 잠자고
아빠 주름살 펴져라


익숙한 가사다. 어디선가 들어보았을, 따라 불러보았을 동요. 손뼉을 치며 해맑게 웃는 아기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지는 노랫말이다. 이 노래는 또 어떤가.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졸업식, 친구들과 함께 부르던 '졸업식 노래'다. '짝짜꿍(당시 제목 '우리애기 행진곡)'과 '졸업식 노래'는 각각 1920년대, 1940년대에 만들어져 오랜 시간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두 곡의 작곡가인 정순철, 그의 이름은 노래만큼 친근하지 않다.

삶의 대부분을 어린이를 위해 살다 간 정순철이지만, 그는 축복 속에서 태어나지 못했고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세상을 떠난 후에도 한국전쟁 때 납북됐다는 이유로 그의 이름은 자유롭게 거론되지 못했다.

방정환이 가는 곳에 정순철이 있다고 해 '방정환의 그림자'라 불리기도 했던 정순철. 소파 방정환이 '어린이의 아버지'로 불리며 오늘날 대중에게 잘 알려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어린이날이 있는 5월을 맞아, 그늘졌던 정순철의 이름에 이제 빛을 비추어보려 한다.

최초의 어린이날 풍경

1923년 5월 1일, 온 세상 사람이 깜짝 놀랄만한 내용의 홍보지 12만 장이 경성 종로 일대 각 가정에 배포됐다.

2천 명의 소년이 시내에서 행진하려던 계획은 일제의 탄압으로 무산됐지만 천도교당에서는 '어린이날 기념 축하식'과 어린이운동 선언 낭독이, 수송동 각황사에서는 기념연설회가, 경운동 천도교당과 소공동 불교대회관에서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공연이 펼쳐졌다. 경성뿐만 아니라 지방 각지에도 8만여 장 배포된 것은 다름 아닌 '어른에게 드리는 글' 그리고 '어린 동무들에게'라는 제목의 홍보지였다.

[어른에게 드리는 글]
일, 어린이를 내려다 보지 마시고 치어다 보아주시오.
일, 어린이를 늘 갓가히 하사 자조 이야기하여 주시오.
일,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보드랍게 하여 주시오.
일, 이발이나 목욕, 의복 가튼 것을 때마춰 하도록 하여 주시오.
일,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시오.
일, 산보와 원족가튼 것을 각금각금 식혀 주시오.
일,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에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자세히 타일러 주시오.
일, 어린이들이 서로 모히어 질겁게 놀만한 노리터나 기관가튼 것을 지어 주시오.
일, 대우주의 뇌신경의 말초는 늙은이에게 잇지 아니하고 절믄이에게도 잇지 아니하고 오즉 어린이 그들에게만 잇는 것을 늘 생각하야 주시오.

[어린 동무들에게]
일, 돗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
일, 어른에게는 물론이고 당신들끼리도 서로 존대하도록 합시다.
일, 뒤ㅅ간이나 담벽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 가튼 것을 그리지 말기로 합시다.
일, 꼿이나 풀을 꺽지 말고 동물을 사랑하기로 합시다.
일, 뎐차나 긔차에서는 어른에게 자리를 사양하도록 합시다.
일, 입은 꼭 다물고 몸은 바르게 가지기로 합시다.


'어린이'라는 말조차 없고 '애녀석, 아해놈'이라 낮추어 불릴 만큼 아동이 존중받지 못하던 시대. 아동을 일컫는 단어를 만들고 어린이에게 '경어'를 사용하자고 주장한 것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이날 발표된 '소년운동의 선언'은 '어린이를 인격적으로 대하라', '만 14세 이하의 노동을 폐지하라', '배우고 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라'는 내용이었는데 유엔연맹에서 채택한 '어린이 권리선언'보다도 한 해 앞선 것이어서 세계적으로도 놀랄 만한 일이었다.

<동아일보> 1923년 5월 1일자 3면에서는 "『어린이의 날』-오월 일일이 왓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어린이에게도 사람의 권리를 주는 동시에 사람의 대우를 하자고 떠드는 날이 도라왓다"고 보도하며 첫 어린이날을 소개했다. 어린이날은 당대 괄시받던 어린이들을 이날 하루만이라도 행복하게 하자는 뜻있는 어른들의 노력이 빛을 발한 날이었다.

어린이날 행사는 '소년운동협회'의 이름으로 시작돼 이후 전국적으로 그 규모가 더 커졌다. 1925년에는 어린이날 행사가 5월 1일부터 3일까지 사흘간 진행되기도 했다. 당시 어린이날 행사를 후원하는 여러 단체와 개인으로부터 166원 50전의 기부금, 현물이 들어왔고 여성단체도 행사에 참여했다. 소년회 회원들은 두부장수 종 같은 것을 꽁무니에 달고 집집마다 홍보지를 돌리며 "어린이날이요!"를 외쳤다.
 
어린이운동가 정순철

 
벽화 속 정순철
 벽화 속 정순철
ⓒ 월간 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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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했던 어린이날 뒤편에, 정순철이 있었다. 그는 색동회를 조직한 소파 방정환, 제1회 어린이날 '소년운동의 선언'을 선포한 소춘 김기전과 함께 어린이날을 일궈낸 핵심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정순철은 1921년 창립된 '천도교소년회'에서 김기전, 방정환과 함께 소년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갔다. 천도교소년회는 창립 1주년을 맞은 해, 기념행사를 열었는데 이것이 어린이날의 전신이 됐다.

이후 어린이날 행사를 더욱 규모 있게 열기 위해 천도교소년회를 중심으로 '소년운동협회'가 결성됐고 여기에 불교소년회 조선소년군 등 소년회 대표자들이 모였으니, 천도교소년회가 창립돼 세 사람이 모인 것에서부터 어린이날이 싹튼 셈이다.

'어린이를 때리지 말라. 이것은 한울님을 치는 것이다.'
 

천도교소년회가 소년운동에 앞장 선 것은 천도교(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사상, 즉 사람의 마음속에 한울님이 모셔져 있다면 어린이 마음속에도 한울님이 있다는 생각에서부터 비롯된 일이었다. 어린이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생각은 '어린이를 때리지 말라'고 직접 언급한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의 가르침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정순철은 천도교 2대 교주 최시형의 외손자이고 김기전은 천도교 월간지 '개벽'을 주필했으며 방정환은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의 셋째 사위였으니, 세 사람이 천도교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정순철은 이외에도 1923년 창립된 '색동회'의 창립멤버이자 필진으로 활동하며 동요를 작곡하고 보급했다. 색동회는 방정환 등 당시 동경 유학생들이 모여 만든 어린이 운동 단체로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고 아동 문학 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날 방법으로 어린이에게 자주독립 정신을 배양한다는 목표 역시 지니고 있었다. 동경음악학교에서 유학하며 윤극영과 친분을 쌓았고 그를 방정환에게 소개한 이 역시 정순철이었다.

동요작곡가·음악교사 정순철

어린이가 존중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던 때, 정순철은 이들을 위한 동요를 작곡해 어린이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그의 첫 동요작곡집 <갈닙피리>(1929)에 수록됐던 곡 중 '짝짜꿍(우리애기 행진곡)'은 당시 경성중앙방송국 전파를 타고 라디오에 흘러나왔는데 누구의 작곡인지 문의 전화가 빗발쳤고, 당대 어린이 사이에서는 이 노래에 맞추어 놀이하는 것이 유행했다고 하니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색동회가 중심이 됐던 <어린이>지에는 정순철의 짝짜꿍과 더불어 윤극영의 '반달', 박태준의 '오빠생각', 홍난파의 '고향의 봄' 등 주옥같은 동요가 실렸고 이러한 동요는 대중에게 즐겨 불려 1920·1930년대는 이른바 '동요황금기'를 이루었다. 이 시기 동요는 단순히 어린이를 위한 노래에서 더 나아가 나라를 잃은 암울한 상황 속, 주체성을 찾는 또 하나의 방법이 돼 남녀노소에게 널리 불렸다.

정순철은 특별히 여성과 어린이 교육에 큰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색동회 활동을 시작한 이후로 그는 동덕여고, 경성보육학교, 중앙보육학교, 무학여고, 성신여고에서 음악교사로 활동하면서 이들을 위한 노래를 작곡하고 가르쳤다. <신여성> 잡지에 '동요를 권고합니다'라는 제목으로 대중 특히 여성에게 동요를 부를 것을 권고하는 글을 기고한 일도 있다.

"…(중략) 노래 중에도 동요처럼 곱고 깨끗하고 좋은 노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바쁘거나 복잡한 일에 파묻혀 있을 때라도 고흔 동요를 한 구절 부르면 그만 마음이 시원하고도 고요해지고 끔찍이 깨끗해지는 것을 투철히 느낍니다. (중략) 지저분한 세상에서 더럽혀지기 쉬운 마음을 가끔 가끔이라도 우리는 동요의 나라에 들어가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적지 않은 행복으로 알고 있습니다. (중략) 아름답고 고흔 여학생 여러분 나는 당신께 동요를 부르시기를 권고합니다."

정순철 평전을 집필한 도종환 시인 역시 2011년 <옥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정순철 선생은) 모두 여학교에서 근무했고 작품을 주로 발표한 곳도 <어린이>, <신여성>같은 잡지들이었다"라면서 그가 "생애 대부분을 어린이와 여성의 인권, 교육을 위해 일했고 어린이와 여성을 존중하라는 해월 선생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했다"고 평했다.

정순철의 어린시절
 
도종환 시인이 쓴 <정순철평전>
 도종환 시인이 쓴 <정순철평전>
ⓒ 월간 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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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철이 어린이와 여성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가 동학(천도교)에 뿌리를 둔 인물이자 그가 경험하고 바라본 어린 시절과 여성의 삶이 너무도 기구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의 어머니 최윤은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의 딸로 태어나, 하루 아침에 아버지와 가족을 잃고 청산현 아전 정주현과 억지로 결혼해야 했다. 정순철은 그 사이에서 태어났다. 시집 식구들로부터 '역적의 딸'이라는 눈총을 받으면서 굴욕적인 생활을 한 어머니 최윤,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던 정순철의 어린시절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순철은 <어린이>에 기고한 글에 "그리도 행복슬업지 못하든 어린 시절! 그리도 질겁지 안튼 어린 시절! 언제나 쓸쓸하얏고 언제나 외로웟든 어린시절이엿섯습니다"라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그가 바라본 어머니 최윤은 "팟알같은 기름불 밑에서 버선 깁는" 쓸쓸한 모습이었다.

괴로운 어린 시절을 견디던 정순철은 소학교를 중퇴한 후 옥천역에서 몰래 화물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가 1909년 가회동에 집을 마련해주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보성중학교를 다니며 성장했고 이후 어린이와 여성의 인권·교육을 위해 힘쓰며 도망치듯 지나온 어린 시절의 상처를 치유해 나갔다.

광복, 행복했던 시절 그리고 납북

1931년 방정환이 작고한 이후로 일제의 탄압은 날로 심해졌다. <어린이>는 총독부의 극심한 검열로 폐간됐고 색동회도 제 기능을 발휘하기 어려워졌다. 어린이날 역시 폐지됐다. 이렇듯 암담했던 일제강점기 말기에 정순철은 음악교사로 동요 동극단체 '녹양회'에서 활동하면서 어린이와 여학생을 대상으로 꾸준히 동요를 가르치며 탈출구를 찾았다. 그러던 중 해방이 찾아왔다.

이듬해인 1946년, 5월 5일에 어린이날이 부활했다. 꽃이 피듯 각종 행사가 피어났고 같은 해 6월에는 해방 뒤 첫 졸업식이 열렸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직후였기에 당시 우리말로 된 졸업식 노래가 없었다.

이때 정순철이 작곡 의뢰를 받아 지은 노래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졸업식 노래(윤석중 작사/정순철 작곡)'다. 이 노랫말에 등장하는 '꽃다발'과 '물려받은 책' 때문에 졸업식에서 꽃다발을 선물하는 축하 방식과 실제로 책을 물려주는 문화가 생겼다고 하니, 이 노래의 영향력이 대단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정순철, 윤극영, 윤석중은 이후 1947년부터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매주 모여 '노래동무회' 활동을 통해 왕성하게 동요를 창작했다. 윤극영이 1973년에 쓴 글에서, "노래동무회 시절 같이 좋았던 날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회고했으니 정순철에게도 당시는 분명 행복한 때였을 것이다. 노래동무회 모임은 한국전쟁이 나던 1950년 6월 25일, 당일까지 계속됐다.
 
정순철 생가
 정순철 생가
ⓒ 월간 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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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시절은 짧았고 정순철은 한국전쟁 당시 성신여고 교감으로 학교를 홀로 지키고 있다가 9·28 수복 때 인민군이 퇴각할 즈음 납북을 당했다. 정순철 평전에 기록된 김응조와 차웅렬의 인용문에 의하면 정순철은 제자의 납치로 납북됐다.

정순철의 행방을 두고 윤석중은 그의 글에서 '정순철이 9·28 수복 뒤에 청년들에게 잡혀 성북 경찰서 유치장에 끌려갔고 이후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그의 가족 역시 정순철의 고무신짝이 남아 있는 것만 확인했다'고 이야기했다. 그의 가족은 이후 정순철의 행방을 알 수 없어 그가 끌려간 날인 9월 29일을 제삿날로 삼았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딛고 일어난 정순철. 그는 어린이가 행복한 세상을 꿈꾸며, 그들을 위한 노래를 작곡했다. 마지막까지 학교를 지키며 어린이와 학생, 특히 여성을 보호하려 했던 그다. 제자들에 의한 납북으로 행방이 묘연해지기까지 말이다. 그의 이름은 이념에 묻혀 잠시 잊혀졌지만, 그의 노래만은 높은 깃대처럼 묻히지 않고 살아남았다. 이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볼 차례다.

[관련기사]
"어른 앞에서 트로트 부르는 어린이들... 마음 아파요" http://omn.kr/1teai

[참고문헌]

<정순철 평전>, 도종환, 충청북도·옥천군·정순철기념사업회
<동아일보>, 1923.5.1 '오늘 어린이날'
<동아플래시100>, 2020.12.8 '애들은 가라!' No, '어린이들, 어서 오세요!' Yes
<옥천신문>, 2011.05.20 '정순철을 이야기하다'


월간옥이네 통권 47호(2021년 5월호)
글·사진 한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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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정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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