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산자여 따르라!" 지난 5월 18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마당에서 열린 '5?18민중항쟁 제40+1주년 서울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고 있다.

▲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산자여 따르라!" 지난 5월 18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마당에서 열린 '5?18민중항쟁 제40+1주년 서울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고 있다. ⓒ 정중규


5.18 주간 동안 정치권 전체가 열병을 앓는 듯했다. 올해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5·18 발언까지 나와 여야 공방이 더욱 격해졌다.

나는 올해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마당에서 열린 '5‧18민중항쟁 제40+1주년 서울기념식'에 참석했다. 올해는 '오월, 시대와 눈 맞추다. 시대와 발맞추다. 미얀마 민주화와 함께'라는 타이틀대로 미얀마 민중항거와 함께 했기에 더욱 의미가 깊었다.

하지만 5‧18주간의 대단원은 영화 <아들의 이름으로>가 현실에서 재현됨으로써 마무리 되었다. 당시 광주에 계엄군으로 투입된 신순용 전 육군 소령은 광주 망월동 묘지를 찾아 무릎 꿇고, 영화에서처럼 양심고백과 사과를 하고서 유족과 손을 맞잡았다.  
5.18 열사 묘비 붙잡고 사죄하는 계엄군 지휘관 21일 오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1980년 5월 3공수여단 11지역대대장으로 광주에 투입됐던 신순용 전 소령이 옛 광주교도소 관련 열사의 묘비를 붙잡고 사죄하고 있다. 옛 광주교도소 총격과 암매장 등 상황을 구체적으로 증언한 바 있는 신 전 소령은 계엄군 지휘관으로는 최초로 이날 5·18묘지를 공식 참배했다.

▲ 5.18 열사 묘비 붙잡고 사죄하는 계엄군 지휘관 지난 21일 오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1980년 5월 3공수여단 11지역대대장으로 광주에 투입됐던 신순용 전 소령이 옛 광주교도소 관련 열사의 묘비를 붙잡고 사죄하고 있다. 옛 광주교도소 총격과 암매장 등 상황을 구체적으로 증언한 바 있는 신 전 소령은 계엄군 지휘관으로는 최초로 이날 5·18묘지를 공식 참배했다. ⓒ 연합뉴스

 
사실 매년 5‧18주간만 되면 정치권에서 난타전 벌이는데, 이는 제3자들만 나서 논란 벌이는 꼴이나 다름없다. 내가 바로 그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문제를 다룬 영화 <아들의 이름으로>를 관람한 이유기도 하다. 

영화는 5·18 당시 계엄군으로 진압에 나선 공수부대원 오채근(안성기)의 이야기를 큰 줄기로 삼아 전개된다. 40년이 지났지만 그는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대리기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오채근은 단골 기사식당에 만난 5·18 피해자(윤유선) 가족들의 아픔을 보면서 자신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결심한다.

5·18 진압 계엄군을 다룬 영화를 보며, 문득 부산에서 살 때 성당에서 만났던 청년이 떠올랐다. 1980년대 당시 성당에서 봉사활동하면서 만난 친구인데, 공수부대에 입대해 군 생활 중 하필 5·18 진압군으로 차출돼 광주로 간 것이다.

심성이 한없이 착하고 온순했던 그가 거친 공수부대에 입대한 것 자체부터가 맞지 않았지만, 그는 5·18 진압 과정에서 받은 충격으로 이십대 젊은 나이에 조현병(정신분열증)을 얻고 말았다. 영화 속 공수부대 진압군 오채근은 40년 후 양심고백이라도 하지만, 현실 속 공수부대 진압군 그는 양심고백은커녕 그 충격으로 아예 정신줄을 놓아버린 것이다.

당시 그는 주변에 "M16이 어떻고"하는 등의 이야기를 했는데, 그때만 해도 5·18의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못한 때라 다들 병 때문에 하는 헛소리라고만 여기고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헬리콥터 소리를 특히 무서워했는데, 그 역시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어느 여름날 그는 내 휠체어를 밀고서 함께 광안리 바닷가로 놀러갔었는데, 마침 보트를 타게 되었다. 힘이 좋은 그가 보트를 저으며 가는데, 하필 하늘 위로 헬리콥터가 날아올랐다. 갑자기 흥분한 그는 '자신을 미행하고 있다'며 불안해했다. 깜짝 놀란 내가 그를 진정시키며 해수욕장 쪽으로 노를 젓도록 유도해 가까스로 보트에서 내렸다. 지나고 나니 그의 그런저런 행동 모두가 5·18이 준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그의 증세는 갈수록 심해졌고 그는 결국 정신병원에 몇 차례 강제입원을 하다가, 어느 날 가족 전체가 동네를 떠나면서 소식마저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다시 소환된 부마항쟁과 광주항쟁 

영화 <아들의 이름으로>는 국내 극장 개봉 전인 2020년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 영화제 '씨네광주 1980'에서 최초로 상영됐고 부산국제영화제에도 공식 초청됐다. 이후 시카고인디영화상 남우주연상(안성기)과 최우수 프로듀서상 수상을 시작으로 뉴욕국제영화상, 타고르국제영화제, 런던국제영화제 공식 선정, 칸월드영화제 최우수 장편영화상 등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영화의 줄거리는 어떻게 보면 도식적이고 단선적인 선악구도여서 '이제는 5·18에 대해서도 보다 심층적인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조금은 식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40년 전 그 때 그 시절로 나를 소환한 것만으로도 영화 '아들의 이름으로'는 의미가 있었다.

그 때 그 시절 5·18이 내게 각별했던 것은 바로 7개월 전 부마항쟁을 겪었던 까닭이다. 백골단의 만행과 계엄군 투입 소식 등 흉흉한 소문으로 부산시민들의 10월은 분노와 불안 그 자체였다. 기어이 10.26이 터지고,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대혼란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당시 매일 쓰고 있던 내 일기장은 분노와 절망, 불안과 기대로 가득 찼다. 이른바 '서울의 봄'이 지나가면서 거기엔 전두환 행보를 비판하는 글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5·18 소식을 접했고 부마항쟁 트라우마가 오버랩 되면서 몸살을 앓았다. 하지만 언론보도를 통하는 수준이었다. 가톨릭신자였던 내가 5·18 '학살' 그 참상의 진실에 온전히 눈을 뜨게 된 것은 김수환 추기경의 강론을 통해서였다. 친구의 믿기지 않았던 말들 차츰 이해되었고, 특히 시국관련 모임에서 손에 넣었던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내가 시대의 어둠에 분노해 휠체어를 타고서 민주화운동에 동참하게 된 계기가 됐다. 1987년 6월시민항쟁으로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을 무너뜨렸을 때의 감동은 내 삶을 이끄는 '원체험'이 되었다.
 
"아들의 이름으로 5.18 피해자 곁으로" 영화 '아들의 이름으로'의 한 장면이다.

▲ "아들의 이름으로 5.18 피해자 곁으로" 영화 '아들의 이름으로'의 한 장면이다. ⓒ (주)엣나인필름


우리 안의 전두환, 우리 안의 파시즘, 그리고 김수영의 시
 
지금 우리에게 전두환은 어떤 의미인가. 4·19, 5·18, 6·10으로 이어지는 민주화 계절만 오면 매년 내가 반드시 읊어보는 시가 김수영 시인의 '하......그림자가 없다'다. 그는 '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다'고 절규한다.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우리들의 적은 카크 다글라스나 리챠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악한이 아니다
그들은 선량하기까지도 하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가장하고
자기들이 양민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선량이라고도 하고
(…)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우리들의 전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 김수영의 시 '하......그림자가 없다' 중에서
 

그렇다. 5·18 진상규명과 전두환 처벌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는 '우리 안의 전두환', '우리 안의 파시즘'을 찾아내고, '우리 안의 오채근'이 생겨나지 않도록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군부독재시대는 이제 오지 않겠지만, 전두환과 오채근은 언제든지 우리 안에서 태어날 수 있다. 윤석열의 "5·18은 진행 중"이라는 발언이 공감을 받았던 것도 그런 의미이리라. 이정국 감독의 영화 <아들의 이름으로>는 우리에게 잠들지 않고 매순간 깨어 있기를 촉구하고 있다.
아들의 이름으로 5.18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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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정권교체동행위원회 장애인복지특별위원장,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부소장,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총연맹 수석부회장, 지방분권운동대구경북본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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