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42년만에 발견된 들불야학 문집 제2호
 42년만에 발견된 들불야학 문집 제2호
ⓒ 김동규

관련사진보기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을 전후로 세상을 떠난 들불야학 7열사를 기리는 들불열사기념사업회에 희소식이 전해졌다. 한 권도 남아 있지 않던 들불야학 문집이 42년 만에 발견된 것. 들불야학에서 활동했던 이경옥씨가 집을 정리하던 중에 들불야학 문집 제2호를 발견했다고 한다.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측은 <오마이뉴스>에 "해당 문집은 들불야학 강학과 학강이 쓴 글이 담겨 있어 당대의 시대상을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사료"라며 "문집이 한 권도 남아 있지 않아 아쉬움이 컸는데, 이번에 그 아쉬움을 해소할 수 있게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들불열사기념사업회는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 광주 광천동 소재 들불야학에서 활동하던 중 5·18 민주화운동을 전후로 세상을 떠난 박기순, 윤상원, 박용준, 박관현, 신영일, 김영철, 박효선 열사를 기리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현재 이들은 들불7열사로 불리고 있다.

엄혹했던 1970년대 후반, 들불야학은 광주 광천동 광주공단 노동자들과 함께 세상과 사회에 대한 학습을 진행했다. 광천동성당 교리실을 빌려 학당으로 사용한 들불야학에는 '교사'와 '학생'이라는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강학(가르치면서 배운다)'과 '학강(배우면서 또한 가르친다)'이라는 명칭을 썼다. 

전남대 국사교육과(현 역사교육과) 재학생이었던 박기순 강학은 1978년 여름 반(反)유신 가두시위를 주도한 일로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그러나 박기순은 이에 굴하지 않고 광주·전남 최초의 위장취업자가 되어 공장에 들어갔고, 들불야학 창립을 주도했다. 그러나 박기순은 그해 12월 26일 연탄가스 누출사고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1981년 들불야학은 당국의 탄압으로 4기를 끝으로 문을 닫게 되었다. 이후 몇몇 활동가들이 문집을 비롯한 관련 자료들을 남기기 위해 노력했으나, 남은 자료가 없었다.

들불야학 문집 제2호에 실린 박기순 추모글 
 
들불야학 문집 제2호에 윤상원 열사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들불야학 문집 제2호에 윤상원 열사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 김동규

관련사진보기

 
이번에 발견된 들불야학 문집 제2호는 박기순 강학이 세상을 떠난 직후 만들어진 특집호다. 
 
같은 시대 같은 세대에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났건만 사회구조의 모순과 부조리 때문에 모든 사회 해택으로 부터 소외당함으로써 무지몽매하고 억압받는 자들과 함께하는 것만이 참된 길이라고 하시더니 그 뜻이 채 펴지기도 전에 운명을 달리하시다니 정말 애통하기 그지 없습니다.

슬픔을 진정하고 생각해 보건데 남아있는 우리들에게 육신의 이별을 통해서 우리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타오르는 들불이 될 것입니다. 흐르는 눈물 두 주먹으로 씻어내며, 당신이 미처 못다 하고 가신 일을 완수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할 것입니다. 편안히 잠드소서! 박기순 강학.

1978.12.27 광천 들불야학 강학 일동(들불야학 문집 제2호)

박기순 강학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가 평소 옷차림이나 주변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언니, 언니는 왜 그렇게 하고 다녀" 공장 퇴근 후 강단에 선 고인에게 한 학생이 한 말입니다. "내가 어떠냐, 이것이 나에겐 큰 기쁨인 걸"이라고 고인은 말했었습니다. 대학생이라기보다 한 인간으로서 고인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야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아니한 지난 8월, 불가피하게 쫓기는 몸이 되어 학당을 잠시 떠났다가 1개월 만에 웃음 띤 얼굴로 학당에 들어선 고인, 보통의 용기와 자신을 가지지 아니하고는 겪어나가기 힘든 상황을 뛰어온 고인. 그 반가움은 헤어릴 수 없었습니다.

800원짜리 일당으로 모 공업사에 취직해서 연구하면서 고민하던 모습. "지식인의 말이 환상적이다. 피상적이다. 구체적인 현장, 노동의 현장을 무시한 것 같다"라고 말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그러면서도 조금도 야학 강학으로서의 역할 수행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충실했던 것은 고인의 역사에 대한 시대에 대한 책임감과 사명감이 얼마나 투철했던가를 보여주는 일면입니다.

1978.12.31 광천 들불야학 동료 강학 임낙평

박기순은 1978년 민청학련 사건의 주역이었던 박형선의 동생이기도 했다. 박형선은 민청학련 사건 당시 박정희 정권이 4월 8일까지 자수할 것을 권고하자 다음 날인 4월 9일 전남대에서 반(反)유신 시위를 감행했다. 박형선은 이 일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고, 이듬해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그러나 박기순은 스스로는 단 한 번도 박형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어느 날 이를 의아하게 여긴 한 동료가 그 이유를 묻자, 박기순은 "어떤 일을 해도 스스로의 힘으로 해야지, 누군가의 동생이라는 걸로 하고 싶지는 않다"고 답했다고 한다.

문집에는 박기순 열사에 대한 윤상원 열사의 추모의 글도 실렸다.
 
우리에게는 정이 들었어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학생들이 가장 슬퍼했고 특히 조사를 읽을 때, 여러분이 쓴 것을 읽을 때 많은 걸 느꼈어요. 사랑이 있었구나. 무엇 때문에 우리는 정이 들었던가? 기순이나 여러분이나 잘살고 부유한 사람이 아닌 상태 하에서 어려운 가운데서 정이 들었기에 진정 잊을 수가 없어요.

앞으로 사람들은 정을 나누고 살아야 해요. 정말 우리가 성장해서 우리는 이렇게 잘 살았다고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해요. 학당의 주인은 여러분 모두에요. 여러분들이 주인입니다. 강학은 도움을 주는 것이지. 되도록이면 강학이 해주겠지 하는 생각을 깹시다.

고 박기순 강학을 추모하며. 윤상원

5.18에 주도적 역할 한 들불야학

박기순 강학의 죽음으로부터 1년 6개월 뒤인 1980년 5월, 5·18 민주화운동이 발발했다. 들불야학 강학들은 항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윤상원 강학은 최후의 항전을 주도한 민주투쟁위원회 대변인을 맡았다. 5월 26일 외신기자들을 대상으로 마지막 기자회견을 진행한 그는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기억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윤상원, 박용준, 김영철 강학은 마지막 순간까지 광주를 사수했다. 1980년 5월 27일, 도청 민원실에서 계엄군이 쏜 총탄에 맞고 쓰러진 윤상원은 함께 있던 김영철 열사에게 "형님, 틀린 것 같소"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김영철은 자결을 시도했으나, 다리에 총을 맞고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상무대 영창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고,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고통받았다.

이날 광주 YWCA에는 박용준 강학이 있었다. 박 강학은 5·18 민주화운동 10일 내내 유인물 '투사회보'의 글씨를 썼다. 프린터가 없던 당대에는 철필로 쓴 글을 암실에서 등사기를 통해 찍어냈다. 100장을 인쇄하고 나면, 원본이 훼손되어 새롭게 글을 써야 했다. 항쟁 기간 내내 글씨를 쓰는 일을 한 박용준 열사는 5월 27일 광주 YWCA에서 계엄군이 쏜 총에 머리를 맞고 사망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이 끝난 직후 김영철 열사의 부인 김순자씨가 윤상원 열사의 부친 윤석동씨를 찾아가 들불야학 박기순, 윤상원 강학의 영혼결혼식을 주선했다. 1982년 2월 20일 둘의 영혼결혼식이 망월동 묘역에서 거행되었으며, 이 자리에서 불린 '임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를 상징하는 노래가 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측은 이번에 발견된 들불야학 문집 제2호를 5·18기념재단 등과 협력하여 보존할 계획이다.
 
광주 서구 치평동에 위치한 5·18 자유공원에 설치되어 있는 들불7열사 기림비.
 광주 서구 치평동에 위치한 5·18 자유공원에 설치되어 있는 들불7열사 기림비.
ⓒ 합수 윤한봉 기념사업회

관련사진보기

 
들불열사기념사업회는 지난 2006년부터 매년 민주, 인권, 평등, 평화에 기여한 이를 선정하여 들불열사의 이름으로 들불상을 수여하고 있다. 올해 제16회 들불상은 환경운동가 이유진씨가 수상했다.

지난 21일에는 광주 YWCA,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지역공공정책플랫폼 광주로가 박용준 열사의 투사회보체를 디지털 폰트로 복원해 무료 배포했다. 제작 비용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마련됐다.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폭력에 대해 고민하며 광주의 오늘을 살아갑니다. 페이스북 페이지 '광주의 오월을 기억해주세요'를 운영하며, 이로 인해 2019년에 5·18 언론상을 수상한 것을 인생에 다시 없을 영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