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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의 길(12사도의 길)'을 걸어본 적 있는가? 스페인 산티아고 길이 아니다. '천사의 섬, 신안' 앞바다 작은 섬 5개(대기점도, 소기점도, 소악도, 진섬, 딴섬)를 갯벌에 돌을 던져 만든 노두길로 이어 만든 12km 길이다. 제주 올레길이 바다와 함께 걸으며 모두가 올레꾼이 되는 길이라면, 신안 순례길은 바다 위를 걸으며 모두가 순례자가 되는 길이다. 12사도의 이름을 딴 12개의 작은 예배당(건축미술작품)이 번호대로 순례자를 맞는다.

신안 압해도 송공항에서 오전 9시 반 페리를 타고 한 시간, 대기점도 선착장, 배에서 내리자마자 1번 '건강의 집(베드로)'이다. 등대처럼 하얗게 홀로서서 기다리고 있다. 좁은 문을 열면 촛대와 성경이 놓여있는 3평 남짓 작은 공간, 무릎을 꿇고 이렇게 순례 길에 오를 수 있게 한 '건강'을 감사드린다. 올려다 보이는 가느다란 창을 통해 하늘이 빛을 내린다. 예배당 곁 종탑에서 종을 울려 출발을 알리고, 2번 '생각의 집'을 향한다.

모든 길은 목적지가 있다. '순례의 길'은 목적지가 12개나 된다. 목적지만 많은 게 아니다. 그곳에 닿을 때마다 숨겨놓은 보물처럼 하나씩 키워드를 안겨준다. 길을 걸으며 묵상할 주제다. 3번 집은 '그리움', 4번은 '생명평화'다. 세계인이 해마다 50여만 명씩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을 찾아 걷는 이유는 무언가. 목적지 산티아고 대성당에 이르기까지 한 달여 800km를 걸으면서 삶의 고민을 풀고 새 삶을 이끌어줄 키워드를 찾기 위함이 아닐까.

파울로 코엘료는 1986년, 38세 때 대회사 중역 직을 내려놓고, 산티아고 길을 걸었다. 다음해 <순례자>를 쓰고 이어 1988년 <연금술사>를 써서 세계적인 대작가가 되었다. 2007년 제주 올레길을 만들어 '대한민국에 걷기열풍을 일으킨' 서명숙도 그랬다. "나이 쉰에 과감히 기자 생활 때려치우고, 홀로 산티아고 길 순례에 나섰다가 그 길 위에서 문득 고향 제주를 떠올리게 된다. '산티아고 길보다 더 아름답고 평화로운 길을 제주에 만들리라'".

오늘 하루, 신안 순례 길을 걷는 우리는 무얼 내려놓고 여기에 왔나? 새로운 키워드와 영감을 마음에 받아들이려면 무언가 내려놓는, 마음 비우기가 먼저일 것 같다. 대기점도 끝 지점은 5번 '행복의 집'이다. 소기점도로 건너가는 노두길이 바닷물에 잠겨있다. 하루에 두 번씩 바닷물에 잠기는 길, 세상에 이보다 더 낮은 길이 있을까. 건너려면 물이 빠지는 썰물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바지 정강이를 걷어 올리고, 발목까지 잠기는 바닷물 위를 걸어본다. 맨발이 시원하다. 푸른 바다 기운이 가슴으로 차오른다. 천지인(天地人), 바다까지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바다 가운데 멈춰 서서 방금 떠나온 '행복의 집'을 돌아다본다. 신안 바다 건너 두고 온 집안 걱정과 내일에 대한 불안이 씻겨 내려간다. 바닷길을 백여 미터나 걸은 후, 들고 온 신발을 다시 신는다. 오후 길은 발길이 가볍다.

모든 길은 '집을 찾아가는 길'이다. 먹고 쉬고 잠자는 집, 무덤은 죽음 후의 집이다.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은 '순례자의 수호성인' 야고보의 무덤 위에 지은 기도의 집,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가는 길이다. 신안 순례길은 호수 위에 지어진 6번 '감사의 집', 노란 유채밭에 지어진 7번 '인연의 집'을 거쳐 밥 먹는 집, 게스트하우스에 이른다. 갯벌 위에 황금빛 계단을 올라가는 8번 '기쁨의 집'을 지나 9번 '소원의 집', 10번 '칭찬의 집', 바람길 언덕 위 11번 '사랑의 집', 마지막은 '딴섬', 12번 '지혜의 집' 한 채만 있는 무인도다. 물이 빠진 갯벌을 건넌다.

쉬엄쉬엄 걸었는데도 오후 4시, 순례길 종점이다. 송공항으로 가는 배편이 한 시간이나 남았다. 소악도 선착장, 쉬어가라는 집 '쉬랑께' 카페를 만난다. 노천 테이블에 앉아 바닷바람을 맞으며 이곳 특산차 단호박식혜를 마신다. '나는 오늘 하루, 순례자가 되어 순례길을 걸었다.'

태그:#순례의 길, #산티아고, #제주 올레길, #서명숙, #파울로 코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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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글로 쓰면 길이 보인다'는 가치를 후학들에게 열심히 전하고 있습니다. 인재육성아카데미에서 '글쓰기특강'과 맨토링을 하면서 칼럼집 <글이 길인가>를 발간했습니다. 기자생활 30년(광주일보편집국장역임), 광주비엔날레사무총장4년, 광주대학교 겸임교수 16년을 지내고 서당에 다니며 고문진보, 사서삼경을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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