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30 11:45최종 업데이트 21.05.30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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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 위에서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은 언젠가는 탱크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치군인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언젠가는 그들이 아닌 일반 관료들과 손잡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군인도 물론 전문성이 있지만, 그 외의 분야에서 활약하는 테크노크라트들을 가까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인의 한계를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1980년 9월 1일 대통령 취임식을 마치고 집무실에 들어간 뒤에 그가 메모한 게 있다. <전두환 회고록> 제2권에 따르면 메모에 적힌 소제목 중 하나는 '사심 없이 인재를 등용하자'였다. 그 소제목 아래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전두환은 말한다.
 
"군에서 알던 사람들 이외에는 아는 사람들도 별로 없고, 또한 누구에게 갚아야 할 마음의 빚이 있지도 않다. 외롭지만 한편 자유롭다. 각 부처에서, 또 민간의 여러 분야에서 유능한 인재들을 찾아내고 그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사심 없이 도와주자."
 
과거 역사에서 인재 등용이 강조됐던 시기의 공통점은 관료 충원을 놓고 군주와 기득권층의 갈등이 있었다는 점이다. '왜 우리 자제들을 선발하지 않느냐?'는 기득권층의 반발을 무마하려고 군주들은 '저 사람은 실무능력을 갖춘 인재다'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고려 광종이 인재 등용을 명분으로 과거제를 시행한 진짜 의도는 호족 자제들을 배제하고 일반 선비들을 중용하는 데 있었다. 기득권층과의 연고가 없고 오로지 자기에게만 충성할 관료들을 선발하고자 할 때 군주들은 광종처럼 '공정한 인재 등용'을 외치곤 했다.

"당신이 노신영이오? 잘해 보시오"

전두환이 1979년 12·12 쿠데타로 형성된 노태우·정호용·허화평·허삼수 같은 신군부 기득권층을 견제하면서 테크노크라트들에게 힘을 실어준 것은 1982년부터다. 그해 7월 3일 경제정의의 일환으로 예금실명제 실시 계획을 발표한 것이 그 예다. 신군부의 격렬한 반발 때문에 결국 무산되기는 했지만, 7·3 조치는 김재익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을 비롯한 테크노크라트들이 강해졌다는 증표가 됐다.


이 시기에 김재익 경제수석과 더불어 테크노크라트들의 대표적 인물로 부각된 인물이 있었다. 김재익 수석이 허화평·허삼수와 대립 구도를 형성했다면, 이 인물은 노태우와 그런 구도를 형성했다. 전두환 정권하에서 외무부 장관·국가안전기획부장·국무총리를 역임하며 노태우와 경쟁했던 노신영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전두환보다 1년 빠르고 노태우보다 2년 빠른 1930년 생인 노신영은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했다. 1949년에 38선을 넘고 이듬해에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그는 한국전쟁 발발 뒤에 통역 장교의 길을 걸었다. 전쟁 중인 1953년 2월 제4회 고등고시 행정과 3부(외무고시)에 합격했고 인도와 제네바 대사를 거쳐 외무부 장관이 됐다.

그에 대한 전두환의 신임은 상당했다. 1980년 9월 10일 임명장 수여식 때도 그랬다. <노신영 회고록>에 따르면 전두환은 "당신이 노신영이오? 정보 보고를 보니 괜찮다고 해서 시켰소"라며 "잘해 보시오"라고 격려했다.

그런 신임을 바탕으로 노신영은 외무부 장관(1980~1982) 때는 일본과의 40억 달러 경협 협상에 참여하고, 안기부장(1982~1985) 때는 김대중 석방 및 미국행을 성사시키는 데 참여하고, 국무총리(1985~1987) 때는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과 함께 '노-노 체제'를 형성하면서 정권 핵심축으로 기능했다.

전두환 정권의 1985년 2·12 총선 참패 직후에 등장한 노-노 체제는 노신영이 정권 2인자인 노태우의 위상에 근접해가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노신영의 행정적 능력에다가 전두환의 특별한 신임이 더해진 결과였다. 이는 전두환이 누구를 후계자로 선택할지 고민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나중에는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조카사위가 됐지만 노-노 체제 하인 1985년에 전두환의 사위가 된 윤상현(현 국회의원)은 1994년 5월 26일 자 <경향신문> 기사 '전씨 사위가 말하는 5·6공 비화'에서 후계 문제에 대한 전두환의 의중을 이렇게 소개했다.
 
"노 전 대통령을 정무·내무장관 직으로 보내면서 후계자 수업을 시켜온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86년, 87년 당시 군과 민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노신영 총리가 더 합당한 후계자가 아닌가 하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나와 큰 처남(재국 씨) 등 가족들은 문민 대통령으로 노 총리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으로 하차
 

노신영 전 총리가 28일 오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만찬을 마친 뒤 호텔을 나서고 있다. 2016.5.28 ⓒ 연합뉴스

 
1981년 7월 16일 노태우 보안사령관을 정무제2장관에 임명할 즈음부터 노태우를 후계자 후보로 염두에 뒀던 전두환이 1986년부터는 노신영 쪽으로도 마음이 나뉘었다는 것이다. 이는 전두환의 심기를 예의주시해 온 노태우를 불안케 했다. 1985년 12월 6일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 별채가 신축된 뒤 전두환이 그곳에 자주 나들이하자 노태우는 극도로 예민해졌다. 삼각관계를 연상시키는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1993년 9월 24일 자 <중앙일보> '청와대 비서실' 제145편은 "총리 공관에서 있었던 전-노 총리 간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노태우 대표 진영을 긴장시켰다"고 한 뒤 '5공 핵심 Q씨'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설명했다.
 
"전 대통령의 총리공관 나들이가 3, 4차례 계속되자, 마음이 상한 노 대표는 어디다 말도 못하고 답답한 나머지 한강에 나가 강물을 바라보며 앉아 있기도 했지요. 집에서는 만화책을 읽었고 측근들에게 짜증을 부리기도 했지요. 전 대통령도 노 대표의 이런 행적을 보고받고 있었지요. 그때 노 대표가 겪은 고통은 피눈물 나는 것이었을 거예요."
 
전두환은 재임 중에 세운 일해재단을 발판으로 퇴임 후의 평생 집권을 도모했다는 말을 듣는다. 이런 유형의 구상을 품은 인물의 입장에서는 '정권 대주주'이자 군부 출신인 노태우보다는 별다른 세력 기반이 없는 노신영을 좀 더 선호하기 마련이다.

정치 경험이 없는 외교관 출신은 국제적 명성에 비해 국내 기반이 취약할 수밖에 없다. 1979년 10·26 사태 뒤에 대통령이 된 최규하의 사례에서도 이 점이 잘 나타난다. 전두환이 12·12 쿠데타와 5·17쿠데타를 연달아 성사시킬 수 있었던 것은 최규하 대통령의 정치 기반이 취약했던 점과도 관련이 있다. 외교관 출신 대통령을 이용해 정권을 탈환한 경험이 있는 전두환으로서는 최규하처럼 정치 기반이 없어서 전두환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노신영이 좀 더 편했을 수도 있다.

정치 경험이 전무한 외교관 출신이 군사정권에 들어가 안기부장 직도 지내고 정권 2인자의 지위도 위협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노신영의 능력과 전두환의 신임이 상당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노신영도 결국 하차했다. 그 계기가 된 사건은 1987년 1월 14일의 박종철 사건이었다. 서울대생 박종철이 고문으로 희생된 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본질을 폭로했고, 이는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동시에, 노신영의 경력을 단절시키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그해 5월 27일 자 <조선일보> '노 총리의 퇴장'은 그가 26일에 사임한 사실을 전하면서 이렇게 보도했다.
 
"노 총리는 박종철 군 고문치사 범인 조작·은폐 사건으로 온 나라가 벌컥 뒤집히기 시작하던 지난 토요일(23일) 고위 당정회의에서 '차제에 총리가 정치·도의적 책임을 져야 하며, 사건 조사도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있는 그대로 파헤쳐야 한다'고 피력한 뒤 그 후의 시간을 공관 뜰을 거닐며 조용히 지냈다."
 
노태우가 한강을 거닐도록 만든 노신영을 공관 뜰에서 거닐도록 만들 만큼 박종철 사건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이는 승승장구하던 노신영이 박종철 사건에 책임을 지고 공직 생활을 마감하는 원인이 됐다. 노-노의 라이벌 체제가 박종철 사건으로 인해 순식간에 사라지게 됐던 것이다.

노신영은 전두환이 탱크 아래로 내려가 함께 손잡고 싶어 했던 테크노크라트형 인재였다. 그는 전두환의 신임을 믿고 정권에 충성을 다했지만, 그가 몸담은 정권은 박정희 정권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의 적'이었다. 그런 정권에 몸담았기에,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사건으로 인해 불명예를 안을 수밖에 없었다. 충성의 대상을 잘못 선택한 것이 결국 그런 결과로 이어졌다.

그는 별다른 기반 없이 실무능력을 바탕으로 전두환 정권의 핵심 인물이 됐다. 이는 한편으로는 장점이 됐지만, 한편으로는 약점이 됐다. 이것은 그가 6월항쟁의 혼란기에 노태우와의 라이벌 체제를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노태우와 달리 쓸쓸하게 퇴장하는 원인으로도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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