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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항쟁은 누구나 기억하는 민주화의 역사이지만 1991년의 투쟁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1991년의 어느 봄날,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 학생이 노태우 정권 타도, 학원자주화 투쟁 과정에서 경찰의 폭력으로 숨지자 이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이 과정에서 폭력정권을 규탄하며 모두 11명의 학생, 노동자, 시민들이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 기념사업회'는 30년 전 1991년 5월 투쟁에서 민주의 꽃이 된 열사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편집자말]
정상순 열사.
 정상순 열사.
ⓒ 김동석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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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불효를 용서하십시오."

그는 어머니께 마지막 전화를 드리고, 연거푸 심호흡을 하였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수첩에 마지막 글을 적어 나갔다.

'하나님의 부르심입니까? 광주 시민의 부르심입니까?'

1991년 5월 22일 오후 7시 정상순 열사는 그 소명에 응답하여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불덩이가 되어 투신하였다. 당시 25살 청년의 삶을 그의 사후 30년에 돌아본다.

생활신조는 '남에게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중학교 시절의 정상순 열사.
 중학교 시절의 정상순 열사.
ⓒ 정상순 열사 가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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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열사의 고향은 전남 보성군 초암산 아래에 있다. 초암산에는 일본과의 7년 전쟁 의병장인 최대성 장군의 묘가 있다. 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한 박문용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마을 뒤와 사방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앞에는 작은 저수지가 있다. 평온하기 그지없는 농산촌 마을이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도 컸다. 아버지는 늘 자녀들에게 "남에게 지탄을 받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셨고, 4남매가 함께 티 없이 자란 좋은 가정이었다. 형제들과도 매우 원만하였다. 그의 첫째 여동생의 회고에서도 알 수 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좋은 오빠였고, 어떤 일을 결정할 때마다 "오빠였다면 어떻게 이 일을 헤쳐 나갔을까?" 생각하면서 말없이 그리워한다고 했다.

열사는 스스로 "남에게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는 생활신조를 만들고 책임감을 갖고 살았다고 한다. 독서를 좋아해 묵묵히 한 권의 책을 다 읽고서야 자리에서 일어서는 사람이었다. 맡은 일은 밤을 꼬박 새워서라도 끝내고야 마는 책임감을 가졌다. 대인관계에서도 모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누구와도 다툼이나 언쟁을 하는 걸 본 일이 없다고 했다. 이런 열사가 어떻게 그런 엄청난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순천공고 시절 기네스북에 오르는 꿈 품어

1982년 순천공업고등학교 토목과에 입학한 그는 1985년 졸업하기까지 학생으로서 멋진 꿈을 갖고 살았다. 그는 취미생활도 남달랐다. 기네스북에 기록된 자료들을 모으는 집념이 있었고, 자신도 기네스 기록을 갖는 꿈을 품었다고 한다. 또 국내외의 정치나 사회변화에 대한 신문기사들을 검토하고 수집하였다. 학생으로서 큰 안목을 기르고 성장해 나가는 바람직한 모습이었다. 실습의 비중이 큰 공업고등학교를 다녔지만 대학 진학의 목표를 세우고 대학 입시 준비에도 매진하였다.

하지만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귀가하는 중에 불의의 사고로 병원 생활을 질 수밖에 없었다. 공부에 매진을 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당한 사고라서 실망이 컸을 것이다.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말았다. 학교는 그의 성실성과 능력을 인정해 광양제철 측량 기사로 추천하였다. 첫 노동자 생활이었다.

이때도 그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받은 급여 전부를 저금해 달라고 아버지에게 맡기는 성실함이 있었다. 직장생활 틈틈이 공부해 토목기사 국가기술자격, 토목재료시험 기술사 2급 국가기술자격을 따는 등 미래에 대한 준비도 착실히 해나갔다.

제대 후 사업하면서 농민회와 사회단체 적극 후원

열사는 1986년 들떴던 아시안 게임이 끝난 10월에 국군에 입대해 경기도 남양주에서 군생활을 하고 1989년 봄에 제대했다. 군대 시절은 나약한 삶을 한 단계 더 굳건하게 했으며, 자신감을 갖게 했다. 마음은 성숙해져 세상을 보는 눈도 가질 수 있었다.

틈틈이 보고 들은 국가 정치 현안들은 혼돈이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 계속된 정치의 혼미와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 급격히 일기 시작한 부동산 투기와 소값 파동은 실망이었다.

특히 중학교 2학년 때의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청문회의 실망스런 모습과 노태우 정권의 공안정국은 열사의 작은 가슴을 충동질했다. "나는 군대 생활과 그 이후에 속고, 속임만을 당하고 살아왔다. 도저히 현 정권을 이대로 보고 있을 수 없다"는 말을 되뇌고 있었다.

제대한 후에는 그동안 모아둔 저금을 찾아 덤프트럭을 구입하고 택시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을 하는 틈틈이 민주화운동에도 관심을 가졌다. 지역의 농민회와 사회단체에 적극 후원을 하고, 참여할 일이 있으면 함께 했다.

아들이 사업을 시작할 때 얼마의 돈을 지원해주었던 부친도 "아들이 번 돈을 민주화를 위한 자금으로 정말 값지게 사용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함께 호흡하고, 함께 외치고, 함께 투쟁하자"
 
정상순 열사는 분신하기 전 서울과 부산, 광주를 다니며 민주화 시위에 참여했고, 그때의 단상들을 수첩에 메모로 남겼다.
 정상순 열사는 분신하기 전 서울과 부산, 광주를 다니며 민주화 시위에 참여했고, 그때의 단상들을 수첩에 메모로 남겼다.
ⓒ 정상순 열사 가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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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에서 5월로 넘어가면서 우리 현대사에서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엄청난 분신정국이 이어지고 있었다. 강경대 열사가 타살 당한 후, 박승희, 천세용, 김영균, 김기설, 윤용하 열사의 잇따른 분신이 있었다. 거기다 5월 18일 고향 후배인 김철수 열사의 분신 소식은 열사의 가슴을 추스를 수 없도록 만들었다.

1991년 봄, 열사는 하던 사업을 정리하고 여러 지역의 민주화운동을 지켜보는 여행을 했다. 서울, 부산, 광주를 오가면서 시위를 지켜보고 응원하였다. 그가 남긴 수첩의 메모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부산 서면과 부산상고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여! 함께 호흡하고, 함께 외치고, 함께 투쟁하자. 그리하여 승리하자." (5월 19일 부산에서 민주화 시위에 참여한 날 쓴 글)
"21일 순천 노제, 망월동 안장, 아 슬프다." (5월 21일 순천에서 이정순 열사의 장례를 지켜보며 쓴 글)


정 열사는 분신을 결행하기 1주일 전 시위에 참여했다가 오른손에 큰 부상을 입었다. 부어오른 손의 통증을 참으면서 그가 말했다.

"이 정권에 대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는 그 말에 불안했다.

"왼손으로 밥을 먹으면서 그 말을 할 때, 한마디 충고라도 했어야 했는데……."

그때 그 말이 한으로 남는다고 어머니는 울었다.

"상순아 마지막으로 남길 말 없냐?"라고 묻자...
 
정상순 열사의 장례식은 1991년 6월 4일 보성에서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정상순 열사의 장례식은 1991년 6월 4일 보성에서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졌다.
ⓒ 정상순 열사 가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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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유서를 보면서도 기가 막혔다고 한다.

'내가 죽으면 화장을 시켜서 도로에 뿌려 참다운 민주화를 부르짖는 수많은 노동자와 젊은 학도들, 그리고 광주시민이 밟아 가면서까지 투쟁하라.'

분신으로 병상에 누워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도 안쓰러워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데, 유서로 남긴 글에 더더욱 목이 메었다고 어머니는 통곡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절망하지 않았다. 고통을 털고 일어나 자식이 못다 이룬 꿈을 해내야 한다는 다짐이 생겼다.

열사의 아버지 역시 깡마른 얼굴이지만 인자함이 새겨져 있었다. 나오는 울음눈물을 참으면서 병상의 아들과 대화를 이어갔다. 진한 부자의 정으로 아픔을 삼키고, 시들어가는 아들과 이 세상에서 마지막이 될 대화를 나누었다.

"상순아, 남길 말이 없나?"

열사는 혼신의 힘을 다해 숨을 몰아쉬면서 말을 이었다.

"아버지, 민주화를 위해 끝까지 투쟁하면서 승리의 그날까지 여러 가지로 도와주십시오."

그 대화가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알았다고 했을 뿐 붕대를 감은 그 손목을 한 번도 잡아주지 못했다. 이 안타까움이 한으로 물결을 일으킨다고 심정을 말했다. 아버지에게는 인생의 생채기가 멍울져 있었다. 당신의 형님이 해방 이후 난세에 죽었던 것이다.

"5월이 되면 또 다른 분노와 비애를 가슴에 담고 먼저 가신 형님과 분신한 아들을 함께 생각하겠다."

아버지는 피울음을 삼키면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어찌 막으리오 그대 뻗는 팔을'
 
정상순 열사의 고향인 전남 보성에서 열린 장례식 광경.
 정상순 열사의 고향인 전남 보성에서 열린 장례식 광경.
ⓒ 정상순 열사 가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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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순 열사의 고향인 전남 보성에서 열린 장례식 광경.
 장성순 열사의 고향인 전남 보성에서 열린 장례식 광경.
ⓒ 장성순 열사 가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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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는 1991년 5월 22일 오후 7시 25분 병원 영안실 옥상에 올라 스스로를 불태웠다. 그 급박한 상황을 광주전남지역 문학생협의회와 전남대 용봉문학회는 이렇게 전한다.

박승희 열사가 누워 있는
병원 영안실 지붕에서 '퍽'하고 떨어진 불덩이
무엇인가?
신문지 뭉치가 타는 줄 알았네
코를 찌르는 살타는 노린내
분신이다, 분신!
넋 나간 사람처럼 손등이 그을리는지도 모른 채
잠바를 벗어 불을 끈다
꺼지는 듯 꺼지지 않는 화염
사람이 불타고 있다
불길아 꺼져라, 이제 그만……
제발 멈춰다오, 제발……

그대 굳어버린 주먹을 내며 외치는 소리
노태우는 물러가라!
어찌 막으리오, 그대 뻗는 팔을
(정상순 열사 추모시 중에서)


열사는 중태였다. 온몸에 3도 화상을 입었다. 호흡을 위해서 기도 절개 수술을 하고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중환자실에는 이미 박승희, 김철수 열사가 생사를 다투고 있었다.

나는 병원 측에서 열사의 가족을 찾는다고 하여 지인으로 신청을 하였다. 의사의 안내를 받아 병실로 들어선 나는 심장이 멎을 뻔했다. 병실은 참혹했다. 열사는 이미 온몸에 바셀린을 바르고 붕대로 몇 겹을 둘러 몸을 감싸 놓았다. 침대 네 귀퉁이에는 수액이 주렁주렁 달려 있고, 두두둑 이어져 떨어지고 있었다.

열사는 물을 찾았다. 미치도록 물을 찾았다. 수액이 그렇게 많이 떨어지고 있어도, 온몸의 통증보다 갈증의 고통이 더 심했다. 나는 무엇 하나 해줄 수 없는 무능함만을 탓하며 병실을 나와야 했다.

'자유와 평등 평화를 갈망하여 그대 한 몸 불태워'
 
광주에서 열린 노제 당시 정상순 열사의 영정을 들고 행진하는 장례 행렬.
 광주에서 열린 노제 당시 정상순 열사의 영정을 들고 행진하는 장례 행렬.
ⓒ 정상순 열사 가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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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 열린 노제 당시 정상순 열사의 영정을 들고 행진하는 장례 행렬.
 광주에서 열린 노제 당시 정상순 열사의 영정을 들고 행진하는 장례 행렬.
ⓒ 정상순 열사 가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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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나는 병실을 찾아 조금 진정이 된 그의 곁에서 함께 노래를 불렀다. '내게 강 같은 평화~'를 부르며, 간절한 평화를 기도했다. 뒤늦게 연락을 받고 달려온 부모님과 가족들의 안타까운 모습에 몸서리칠 수밖에 없었다.

5월 27일, 호흡이 가빠지면서 열사는 "부모님이 보고 싶다,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는 부모님께 "불효해서 미안합니다"는 말을 전하면서 민주투쟁을 부탁했다. 같은 시각, 열사의 고향 보성에서는 '민주학생 김철수 군과 애국청년 정상순 정신계승 및 노태우 정권 규탄 보성군민 결의대회'가 500여 명의 군민들이 모인 가운데 보성역 광장에서 열렸다.

열사는 병상 투혼 내내 자신의 신념을 바꾸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아버지를 비롯하여 가족들에게도 의연하게 투쟁을 부탁하였다. 틈틈이 투쟁가를 불러달라고 하면서 함께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5월 29일 오후 8시 45분, 7일간의 긴 고통의 시간이 끝나고 가족들과 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요히 이 땅의 소풍을 끝냈다. 당시 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그리며 이렇게 썼다.

"아버지를 떠올리고
어머니를 못 잊으면서
형과 동생들 친구들을 그리워하면서
이 나라의 자유와 평등 평화를 갈망하여
그대 한 몸 불태워
이 나라의 민주 제단에
고귀한 제물이 되었구나."


강경대·박승희·윤용하·이정순 열사 잠든 망월동 묘역으로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있는 정상순 열사의 묘소.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있는 정상순 열사의 묘소.
ⓒ 정상순 열사 가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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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순 열사의 장례식은 6월 3일 열렸다. 오전 12시 입관식과 발인식이 있었다. 장례집행위원장 김병균 목사의 피끓는 설교와 이형일 농민회장의 추모사는 시민들의 눈물샘을 터뜨리고, 가슴을 치게 했다. 발인 후 열사가 광주로 왔던 길을 되돌아 화순을 거쳐 벌교와 보성으로 향했다. 열사가 자란 고향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6월 4일 보성역전에서 '애국청년 고 정상순 열사 민주국민장'이 기독교 예식으로 진행되었다. 친구들이 그의 이력과 병상 돌봄을 전했다. 식을 마친 긴 행렬은 비통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가 아끼고 몸을 태웠던 혁명의 도시 빛고을 광주를 향했다.

능주와 남평을 거치는 연도마다 애끓는 마음들을 만났다. 백운동 교차로에 이른 행렬은 거기서 노제를 지내고, 모인 시민들과 도보로 도청을 향했다. 질서 정연하고 엄숙한 행렬이었다. 그가 재가 되어서 이루고자 했던 소망의 길이었다. 그의 유언대로 '시민들이 밟아 민주화 투쟁에 나서기를 바랐던 길'이었다.

백운광장, 금남로를 거쳐 민주의 성단 분수대 앞에서 노제가 진행되었다. 놀이패 신명의 박강의님의 살풀이춤은 고인의 아픔을 모두 치유하고 시민들의 상처까지 보듬는 행위예술이었다.

밤 11시가 넘어 어둠을 뚫고 행렬은 5.18 피의 격전지 시가지를 지나 광주민중항쟁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열사들, 그리고 1991년 봄의 강경대, 박승희, 윤용하, 이정순 열사가 먼저 잠들어 있는 망월동 묘역에 이르렀다.

민주의 제단에 바쳐진 보성의 두 젊은이

1992년 1주기를 맞아서 기독교 목사들과 보성군 농민회, 전교조 보성군지회 등 여러 단체가 중심이 돼 결성한 '애국청년 고 정상순 열사와 고 김철수 열사 추모사업준비위원회'는 추모사에서 "일제 강점기 보성 제주 사건의 박남현, 의병장 안규홍, 대종교 나철, 애국청년 정상순 열사, 애국고등학생 김철수 열사로 이어지는 보성의 인물들을 찾아 바로 세워가며 자랑스런 애향인 보성인이 되자"는 다짐을 했다.

최진호 <빛고을신문> 실무창간위원도 '못다 핀 두 젊음 딛고 다시 일어서는 보성'이란 글에서 "역사적으로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의인들을 배출해서 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서 왔던 의향 보성이, 공안세력들의 민주세력에 대한 극심한 탄압으로 민주주의가 압살될 위기에 처해 있는 지금, 또 다시 두 젊은이를 민주의 제단에 바쳐서 온 국민을 각성시키고 단결시켜 참교육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대열로 나아가도록 부추기고 있다"고 그날을 기록했다.

덧붙이는 글 | *모금계좌 : 농협 356-1492-0647-43 안영민(1991년 열사투쟁 기념사업회). 여러분들이 모아주신 마음은 1991년 열사들의 기록영상 제작과 30주년 종합다큐멘터리 제작에 사용됩니다. 모금에 참여해주신 분들은 종합 다큐멘터리 영화 엔딩 크래딧에 명단을 공개합니다.

*이 글을 쓴 이동균 목사는 현재 광주 혜성교회에 재직 중이다. 정상순 열사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고, 현재까지 열사의 추모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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