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매드랜드> 스틸컷

<노매드랜드> 스틸컷 ⓒ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나면 여러 상념이 떠온다. <미나리>는 담담하고 싱거운 느낌, <패왕별희>는 묵직하고 둔중한 느낌, <중경삼림>은 경쾌하고 아련해지는 느낌처럼 영화는 각각 다른 맛과 정감을 자아낸다. 2020년 베네치아 영화제 황금사자상과 2021년 아카데미 작품상에 빛나는 <노매드랜드>는 가슴 시린 아픔과 여운을 선사한다.
 
중국 출신의 감독이 만든 영화라는데, 관객을 휘어잡는 능력이 탁월하다. 색깔과 향기가 다른 만남과 헤어짐, 자연풍광과 인간의 대비, 홀로 맞는 삶의 양상과 더불어 곳곳에 부설된 기막힌 음악! 젊은 나이의 감독이 포착하는 감성과 인식의 폭과 깊이가 놀랄만하다. 봉준호 감독이 꼽은 차세대 감독 20인에 그녀가 포함된 이유를 알겠다.
 
'노마드'는 21세기 초에 우리나라에서 크게 유행했던 말이다. 노마드는 유목민이나 방랑자로 번역된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의 정의에 따르면, 노마드는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바꾸며 창조적으로 사는 인간을 뜻한다. 따라서 정착하지 않고 떠도는 사람들의 나라 정도가 <노매드랜드>의 의미일 것이다.
 
어디를 떠돌고 있는가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지역의 경제가 붕괴돼 도시 전체가 무너진 후 홀로 남겨진 영화의 주인공 펀은 오래된 흰색 밴을 몰고 다닌다. 60대 여성 노동자 펀의 삶은 외주노동으로 유지된다. 관객은 그녀가 이동하는 공간을 따라 미국 곳곳과 만난다. 사우스다코타에서 시작한 여정은 네브라스카를 거쳐 서부의 네바다와 캘리포니아를 지나 아리조나에서 멈춘다. 미국 중부에서 시작하여 태평양을 거쳐 아리조나로 이어지는 펀의 길.
 
펀의 언니는 밴을 타고 떠도는 동생의 편력에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펀은 서부 개척 시대에 조상들이 간 길을 잇고 있는 거야!"
 
그녀는 펀의 길이 조상들의 길과 전혀 다름을 알지 못한다. 조상들은 말과 마차를 타고 동부에서 중부를 거쳐 서남부로 이동했다. 숱한 인디언들을 사냥하고 약탈하며 살육하면서 그들은 정착할 땅을 찾아서 이동에 이동을 거듭했다. 하지만 펀의 길은 방향은 같지만, 목표가 전혀 다르다. 그녀는 정착할 땅을 구하려고 떠돌지 않는다.
 
사람들이 말하는 집, 대지에 터를 잡고 움직이지 않게 고정된 집을 펀은 찾지 않는다. 그녀의 집은 움직이는 '밴'이다. 그래서 거액의 수리비가 나와서 수리공들이 차라리 밴을 파는 게 낫다고 하자 그녀는 즉시 거부한다. 밴은 펀에게 타인들의 집과 같은 존재이자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죽은 남편과 함께 밴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던가?!
 
길에서 만난 스웽키
 
계절노동을 하면서 이동하는 노동자들에게도 동반자가 있다. 그들은 곳곳에 차를 세우고 잠시나마 공동체를 꾸려나간다. 나름의 규칙과 예절을 지키고, 각자의 고유한 사연을 공유하면서 인간적인 유대를 이어나간다. 길에서 길로 길을 떠도는 사람들에게는 예외 없이 아픈 사연 한 자락은 있기 마련이다. 70대 노파 스웽키는 특히 인상적이다.
 
"나한테 남은 시간은 7-8개월 밖에 없어. 그 시간을 병원에 누워서 지낼 수는 없다고. 난 알래스카로 갈 거야. 생의 마지막을 거기서 보내고 싶어."
 

그녀는 큼지막한 이동주택 차량을 끌고 생의 마지막 목적지 알래스카로 떠난다. 스웽키의 얼굴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다. 무의미한 연명치료와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자연 속에서 자연의 일원으로 생을 마감하겠다는 스웽키. 얼마나 많은 노인이 요양병원과 응급실에서 처절할 정도의 연명치료로 생의 끝자락을 탕진하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스웽키가 휴대전화 사진으로 펀에게 보내온 알래스카의 자연풍광은 자신이 원하던 바를 이루었음을 통지하는 것이다. 생의 종착점에서 자연과 하나가 되어 고요히 소멸해가는 여성 노인 스웽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를 떠돌다가 어디로 가는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마침내 소멸할 것인가!
 
함께 하고픈 남성 데이브
 
어디서든 우리는 운명의 인간을 만난다. 싫든 좋든 인생은 제한된 시공간에서 타자를 만나고 헤어짐으로써 이뤄진다. 인연이 있다면, 설령 그것이 악연이라 해도 우리는 타인과 만나게 된다. 펀에게 데이브는 친근하고 선량한 동행으로 등장한다. 그들이 서로 호감을 느끼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지 않다. 그것은 정착자든 유랑자든 매한가지다.
 
데이브는 가족의 간절한 부름을 받고 본래 있던 삶의 자리로 귀환한다. 떠나가는 데이브를 환송하지 않는 펀. 그녀에게도 돌아오라는 언니와 가족이 있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 '보'가 세상을 버린 후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다. 하다못해 엠파이어에 있는 남편과 자신의 짐도 정리하지 못한 펀. 마음에 둔 누군가와 작별하는 일은 고통스럽다.
 
추수감사절 초대를 받은 펀이 데이브를 찾아간다. 데이브의 집 계단에서 펀은 연탄(聯彈)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데이브 부자를 본다. 가족과 가정의 안온함이 한껏 풍겨 나오는 정경. 하지만 그녀는 포근하고 안락한 침대에서 잠들지 못한다. 끝내 밴에서 잠을 청하는 펀. 함께하자는 데이브의 제안을 펀은 어떻게 수용했을까, 궁금하다.
 
인간과 자연
 
펀이 남달리 끌리는 대상은 자연이다. 돌과 나무와 사막과 바다가 그녀를 매혹한다. 그녀가 길에서 길로 길을 떠도는 까닭이 거기 있는지도 모르겠다. 거대한 메타세쿼이아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나무의 높이와 둘레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얼마나 오랜 세월 나무는 그 자리에 서서 인간과 세상의 생로병사와 흥망성쇠를 지켜본 것일까.
 
한밤중 사막에서 만난 직녀성은 지구에서 25광년 떨어져 있다. 1995년에 출발한 빛을 펀은 2020년 사막에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25년 뒤인 2045년에 펀은 어디서 직녀성을 볼 것인가. 관객들은 또 어떤가. 사막의 아침을 알리는 첫 번째 햇빛이 선인장 줄기를 뚫고 찬란히 퍼져나간다. 저들은 또 얼마나 오랜 세월 서 있을 것인가!
 
계절마다 달라지는 일자리 때문에 캘리포니아의 태평양에 도달한 펀. 거대한 바다가 회청색으로 용틀임하듯 일렁이고 하얀 포말(泡沫)을 일으키며 파도가 출렁댄다. 바닷가 낭떠러지 위에서 바다를 응시하는 펀의 얼굴이 잠시 환해진다. 저 드넓은 바다는 그녀가 떠도는 삶의 내력을 위로하고 있는가?! 언제 다시 펀은 바다를 찾을 수 있을까.
 
자오 감독이 영화에서 자연을 반복해서 제시함은 분명 이유가 있을 터다. 필시 그것은 장구한 세월을 살아가는 자연과 비교할 때 인생에 주어진 시공간이 참으로 미미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일 것이다. 귀하고 짧은 시간을 우리는 허망한 땅과 돈과 집에 무한 탕진하면서 날마다 소멸의 길로 다가서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 듯하다.
 
로드무비 <노매드랜드>
 
자동차가 일상화된 20세기 이후 많은 영화가 로드무비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체 게바라의 청년 시절을 다룬 <모터사이클 다이어리>(2004) 같이 오토바이로 세상을 순례하는 영화도 있기는 하다. 어찌 됐든 로드무비의 핵심은 자동차든 오토바이든 그것들은 이동 수단에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자오 영화에서는 사정이 사뭇 다르다.
 
펀의 밴은 이동 수단이자 그 자체로 집이다. 언니 가족과 손님들이 2008년 비우량주택담보대출로 인해 불거진 미국발 금융위기를 말하면서 그때 집을 사둘 걸, 하는 얘기를 듣는 펀의 얼굴은 무겁다. 그들에게 집은 사람들이 편히 쉬고 살아가는 아늑한 공간이 아니라, 돈을 버는 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들의 집은 교환수단에 불과하다.
 
그래서다. 펀이 그토록 편안하고 따뜻해 보이는 침대에서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며 괴로워하는 까닭은 그런 까닭이다. 가족의 보금자리로 작동하는 집이 아니라, 은행 잔고(殘高)를 늘리는 수단으로 기능하는 집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행복할까. 난방도 안 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밴이 훨씬 더 집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인가?!
 
생의 마지막까지 펀은 길에서 길로 길을 떠돌 것 같다. 밴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은 스웽키의 길임이 명약관화하다. 다른 선택지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펀의 화장기 하나 없는, 주름진 얼굴의 수심과 긴 한숨이 슬퍼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내부에서 의지처를 찾았고, 동반자 밴에서 집을 찾은 노마드다.
노매드랜드 클로이 자오 직녀성 로드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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