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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기사 일본 외상, 초대 미국 공사관에 스파이를 심다에서 이어집니다. 

조지 포크예요. 안녕하세요.

한국인의 고질적인 외세의존병이 언제 어디서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의 초대 공사 푸트가 1883년 5월 조선에 도착했을 때 겪어야 했던 첫 경험이 바로 그 외세의존병이었지요.

푸트의 활동을 떡 가로막고 있는 장벽이 청나라의 대리인 묄렌도르프였지요. 묄렌도르프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청나라 이홍장은 그를 자신의 꼭두각시라 여겼지요. 청나라에서 미미한 존재였던 묄렌도르프는 조선에서 외교, 통상, 관세, 금융, 자원 개발 등 모든 전권을 거머쥐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강하게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이동인 스님입니다. 묄렌도르프가 손아귀에 쥐었던 그 일들을 이동인이 맡았어야 했지요. 이동인이야말로 오랫동안 그 일을 준비했고 식견과 전문성을 갖췄으며 외국인을 다룰 줄도 알았고 카리스마도 있었으니까요.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군요. 영국의 엘리트 외교관 사토우가 스님에게서 배우고 접촉하면서 스님의 인물됨과 식견 그리고 능력을 높이 평가했던 일을. 예나 지금이나 한국에 인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제거될 뿐이죠.

조선의 수구파들은 자기 나라 인물을 제거하는 대신 청나라의 하수인을 끌어들인 셈이었지요. 목참판으로 불리게 될 묄렌도르프를 끌어들인 주역은 조영하라는 세도가였습니다. 민왕후 사람이었지요. 1882년 임오군란시에 청나라로 하여금 대원군을 납치하도록 도운 사람이 그였다나요. 그 공적(?)으로 민왕후의 총애를 받고 실세 중의 실세가 된 거지요. 권력이 아무리 좋다지만, 자기 나라 왕의 아버지를 납치해 달라고 외국에 부탁하는 사람이 어디 흔하겠어요.

청나라 측에서는 그렇잖아도 조선을 장악할 기회를 애써 찾고 있는 중이었는데 조영하가 이홍장 사람인 묄렌도르프를 간청하니 얼마나 죽이 잘 맞았겠어요. 조영하와 청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짜고 조선에 묄렌도르프를 모셔 왔는지 그 일단을 눈 앞에 불러내 봅시다.

1882년 12월 4일 오전 9시 중국 천진에서 '해안호'(海安號)가 출항합니다. 배에는 묄렌도르프, 조영하를 비롯한 조선의 관리들 그리고 청나라 고관을 비롯한 몇 명의 청나라 사람이 보입니다. 천진을 출항한 해안호는 조선으로 바로 오지 않고 다음 날 산동의 옌타이항에 정박합니다.

묄렌도르프는 비치 호텔에 투숙합니다. 이틀 후인 6일 흥신호로 갈아 타고 조선을 향해 출항합니다. 8일 아침 조선의 육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섬들 사이에 닻을 내립니다. 가까운 곳에 일본 군함이 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묄렌도르프는 9일 조영하의 안내로 조선 배로 갈아 타고 월미도로 갑니다.

제물포의 수령이 찾아와 인사를 합니다. 다음 날 제물포에 닿으니 가마가 대기하고 있고 곧바로 일본 영사가 찾아와 인사를 합니다. 좀 있으니 제물포 수령이 찾아와 자기 저택으로 안내하여 융숭히 접대합니다. 이틀을 그렇게 환대 속에 지내다가 가마를 타고 서울로 출발한 것은 13일 8시. 조선 사람들이 주눅든 표정으로 굽신굽신 하는 걸 보고 묄렌도르프는 조영하의 권세가 대단하기는 대단한가 보다 하고 생각합니다. 

그 해 말에 조영하는 묄렌도르프의 의견에 따라 외교부서를 설치합니다. 형식적으로는 자신이 장관 자리에 앉고 묄렌도르프가 차관 자리를 차지했지만 실권은 묄렌도르프의 손에 들어갑니다. 청나라에서 별 볼 일 없었던 묄렌도르프가 조선왕국에서 일약 벼락 출세를 한 셈이지요. 그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며 감격해 했습니다. 이동인(1881년 봄 피살)이 맡아야 할 자리에 독일인을 모셔왔다고 볼 수 있지요.

이런 상항에서 푸트 공사가 서울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푸트 공사에게 유리한 조건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고종 임금의 큰 기대와 신뢰였지요. 또 푸트의 통역인 윤치호도 매우 유용했습니다. 왜냐면 고종 부처가 윤치호를 자주 불러 이야기를 듣고 또 윤치호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으니까요.

푸트 공사는 조선을 청나라에서 떼어내고 미국과 확실히 엮을 수 있는 방도를 궁리했습니다. 또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사업가 친구들에게 조선 비지니스 기회를 터주고 싶었구요. 궁리 끝에 조선사절단을 유치해야겠다고 마음 먹습니다.

조선의 최초 서양 사절단을 미국에 유치하게 되면 일거삼득이 될 거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하지만 청나라와 묄렌도르프가 낌새를 채면 방해 공작에 들어갈 게 뻔했습니다. 묄렌도르프는 노골적으로 푸트에게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조선 정부를 접촉하지 말라며 푸트를 견제하고 있었으니까요. 

푸트는 묄렌도르프가 아파서 근무를 하지 않는 기회에 고종 임금을 알현하였고 그 자리에서 사절단파견을 제안하였지요. 부임한 지 두 달이 채 안 된  7월 5일이었습니다. 푸트는 조선 정부가 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한다면 크게 환영받을 거라고 임금에게 은근히 권고하였습니다.

임금의 반응은 의외로 빠르고 적극적이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다음날 파견 방침을 결정하였으니까요. 허를 찔린 묄렌도르프는 쓴 감을 씹는 표정이었을 겁니다. 청나라 측도 당황했던 건 물론이구요. 훗날 묄렌도르프가 부인에게 "미국 공사가 내 병을 그 따위로 이용하다니 야비하다"라고 토로했다는 이야기가 돌았지요.

아무튼 그렇게 전격적으로 결정되어 추진되었습니다. 그것은 나와  조선과의 운명적인 인연을 엮어준 결정이기도 했지요. 사절단이 구성되어 미국행을 준비하고 있을 때에 나는 미해군 도서관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었지요. 미국이라는 나라가 생긴 아래로 맨 처음 한국어 공부를 한 사람이 나 조지 포크였다니까요.

당시 미국에 한국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독학할 수밖에 없었지요. 다행히 영어로 된 한국어 학습서가 한 권 나와 있었습니다. 스코트란드 출신 Ross 목사가 쓴 <한국어 첫걸음Corean Primer>이라는 책이었지요.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태그:#조지 포크 , #묄렌도르프, #조영하, #고종, # 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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