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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하는 소방공무원 조직을 비롯한 일부 공무원 조직에는 조금은 이해하기 힘든 '낯선' 관행이 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도 없고 정확히 어느 정도로 퍼져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원래 공무원조직 전반에 있던 관행인데 세상이 바뀌면서 다른 기관에서는 사라져 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중앙정부 조직을 비롯하여 지자체, 공기업 일부에 이러한 관행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어찌 보면 별거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내용은 이러하다.

서명 방식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공무원 문서 결재 방식에 수기결재라는 게 있다. 문서의 기안자가 결재를 받을 문서를 종이에 인쇄하여 검토자와 결재자로부터 손글씨로 '서명'을 받는 것인데 이렇게 완성한 문서는 스캔한 뒤에 전자문서로 시스템에 등록한다.

요즘 같은 디지털 만능 시대에 아직도 수기결재가 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있다. 비전자문서를 등록할 때나 중요정책을 결재권자에게 대면보고 할 때 결재 서명을 동시에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글에서 '이의'를 제기하고자 하는 관행은 바로 이 서명 방식이다. 수기결재문서는 문서의 오른편 윗부분에 중간검토자와 최종 결재자가 서명을 할 수 있게끔 사각형 칸(서명란)을 두는데 소방을 포함한 일부 공무원 조직에서는 문서의 (최종결재자가 아닌) 기안자나 중간검토자는 자신에게 할당된 서명란을 본인의 서명으로 '온전히' 채우지 않고 바닥 부분에 붙여 쓰는 관행이 있다.

먼저 위에서 말한 관행과 비교되는 '보통'의 수기결재문서를 보자. 아래 <자료사진1>, <자료사진2>, <자료사진3>은 각각 법무부('20년), 국방부('20년), 문화체육관광부('20년) 문서의 서명란이다. 서명란의 오른쪽으로 갈수록 직책이 높아지며 가장 오른쪽이 최종결재권자이다. (이하 자료사진은 정부의 대국민 공개문서에서 가져왔다.)   
 
자료사진1 - 법무부
 자료사진1 - 법무부
ⓒ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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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2 - 국방부
 자료사진2 - 국방부
ⓒ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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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3 - 문화체육관광부
 자료사진3 - 문화체육관광부
ⓒ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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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자료에서는 앞에서 말한 '낯선' 관행이나 문제점은 크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아래의 자료사진에서는 앞서 말한 관행을 확인할 수 있다. <자료사진4>는 소방청의 2018년 문서 서명란이고 <자료사진5>는 전국 어느 소방서의 2021년 문서 서명란이다.
   
자료사진4 - 소방청
 자료사진4 - 소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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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5 - 소방서
 자료사진5 - 소방서
ⓒ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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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자료에서는 앞서 '보통'의 문서와 달리 전반적으로 서명란의 바닥에 붙여서 서명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서명 관행은 아래에서처럼 다른 정부 기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자료사진6>, <자료사진7>, <자료사진8>은 각각 농림축산식품부('21년), 산업통상자원부('20년), 인사혁신처('21년) 문서의 서명란이다.
    
자료사진6 - 농림축산식품부
 자료사진6 - 농림축산식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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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7 - 산업통상자원부
 자료사진7 - 산업통상자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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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8 - 인사혁신처
 자료사진8 - 인사혁신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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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9>, <자료사진10>, <자료사진11>은 각각 경찰청('18년), 병무청('21년), 공정거래위원회('20년) 문서의 서명란이다.
 
자료사진9 - 경찰청
 자료사진9 - 경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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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10 - 병무청
 자료사진10 - 병무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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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11 - 공정거래위원회
 자료사진11 - 공정거래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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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서명 관행은 전자문서로도 이어지는데 <자료사진12>을 보면 알 수 있다.   
 
자료사진12 - 소방본부
 자료사진12 - 소방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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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13>은 이와 대조되는 보통의 전자문서 서명이다.
 
자료사진13 - 행정안전부
 자료사진13 - 행정안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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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아직 적응되지 않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이러한 서명 방식인데 적확한 표현은 아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매번 볼 때마다 '복지부동'이란 단어가 생각난다. 서명한 사람의 의도를 미루어 짐작건대 서명란의 한 가운데에 큼직하게 서명하는 것은 윗사람의 권위를 훼손하는 행동이고 반대로 밑부분에 작게 서명을 하는 것이 상급자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 듯하다.

또한 자신의 서명이 상관의 서명 위치보다 높지 않아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도 엿보인다. 주변의 동료에게 물어보면 이러한 관행이 윗사람에게 자신을 낮추고 양보하는 겸손과 겸양의 표현(이른바 '겸양의 덕')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많다. 말하자면 '겸양 서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이런 문화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겸양의 문화가 극도로 발달한 일본에서도 '겸양 도장'이라는 비슷한 개념의 관행이 있다. (관련 기사 : "결재도장도 사장님께 인사하듯 기울여서 찍으세요")

바닥에 붙은 서명, 겸양의 덕 때문?

그런데 '겸양의 덕'을 저런 곳에 적용해도 문제는 없는 것일까? 서명을 바닥에 붙여서 하는 것과 겸양은 과연 관계가 있을까? 글쓴이는 아래와 같은 이유로 위의 서명 관행을 '겸손' 또는 '겸양'으로 미화하는데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 겸손보다는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단순한 복종의 표시일 가능성이다. 우리 사회의 근대화 과정에서 상명하복의 서구 관료제가 도입되고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의 범위가 확대되면서 정부 기관의 수장은 그 구성원들에게 관료주의적 충성과 가부장적 복종(공경)의 대상으로서 중첩된 권위를 갖게 되었다.

우리나라 관료제의 가부장주의적 성격은 최근까지도 일부 공무원조직에서 그 수장을 '당신'이라는 극존칭으로 부른 데서도 짐작할 수 있는데 앞서 말한 '겸양 서명'의 관행은 정부 조직상 '부(部)'에서보다 '처‧청' 이하에서 훨씬 많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관료주의보다는 가족주의와 관련이 커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가부장적 권위는 (직무상 명령이 아닌) 사람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기 쉽고 창의와 혁신을 억눌러 합리성과 수평적 소통이 강조되는 오늘날의 공무원조직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둘째, 처세(處世)일 가능성이다. 겸손은 도가(道家)의 주요 사상 중 하나인데 노자는 춘추전국시대의 험세를 살아나가는 군주의 생존 방식으로 자기를 낮추어 남보다 두드러져 보이지 않게 하는 보신(保身)으로서의 겸손을 강조하였다. 이는 유가(儒家)의 '겸양지덕' 처럼 사회질서 유지와 조화를 위한 '윤리적 가치'가 아니며 개인의 '처세 방식'에 불과하다. 한편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덕무는 그의 문집 청장관전서에서 당대에 만연했던 벼슬아치들이 의정부 정승에게 자신을 '소인'이라고 칭하는 풍속을 '지나친 겸손은 아첨'이라며 비판하였다.

셋째, 서명란의 빈 공백만큼이나 주어진 권한과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조직문화의 가능성이다. 청나라 말기 계몽사상가로 현대 중국의 핵심사상인 '중화민족'이란 말을 만들어 냈던 양계초는 변법자강운동의 실패로 일본에 망명 생활하던 시기에 썼던 '신민설'에서 나라가 위험에 빠진 상황에서의 겸손은 책임회피를 은폐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고 하였다. 누군가 책임감 있게 나서야 하는 상황에서 부리는 겸손은 미덕이 아닌 악덕이라는 것이다.

위의 서명 관행에서 책임의 '의도적' 회피까지 읽을 수는 없겠으나 과도한 겸손이 아래에서 얘기할 자아 위축과 낮은 자존감으로 연결되면 공무원 자신에게 주어진 공적 책임의 자각과 이행을 방해할 수 있다. 또한 겸손과 겸양은 적극적이어야 할 공무상 권한과 책임의 수행과는 분명 대척점만큼이나 거리가 있는 사적인 태도로서 공문서상에 나타내야 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넷째, 지나친 겸손은 자기비하와 연관되며 자존감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 겸손(겸양)은 자기비하와 동전의 양면 관계에 있으며 존비귀천(尊卑貴賤) 사상과도 일면 연관된다. 종교적 수양과 개인의 미덕 차원인 서양의 '겸손(humility, modesty)'과 달리 동양의 겸손(겸양)은 개인의 수양과 덕목 수준을 넘어 위계적 사회구조와 유교적 가치철학을 바탕으로 구성원에 대한 강한 윤리적 구속력을 갖는다.

이렇게 겸손을 문화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강요'받아 실천하다 보면 무의식중에 스스로 과소평가하고 자아가 위축되기 쉽다. 이는 개인의 역량과 잠재력 발휘에 장애가 되어 조직의 성과를 떨어뜨리고 사회의 발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가수 조영남이 부른 '겸손은 힘들어'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겸손은 쉽지 않다. 보통 사람들에게 자신을 낮추라고 요구하는 것은 자존감도 함께 떨어뜨리기 쉬운 일이다. 겸손은 사회적 가치로서도 소중한 의미가 있지만 자기 수양을 위한 도구로 쓰일 때가 가장 아름답다.

사실 교만한 태도와 행동의 근본 원인은 겸손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 있다. 자신을 과도하게 낮춤으로써 상대를 높이는 것은 타인에 대한 바른 존중 방법이 아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남을 진실로 사랑하기 어렵듯이 자신에 대한 정당한 존중 없이 상대를 올바로 존중할 수는 없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하지만 어린 벼는 고개를 들어야 햇볕을 받아 제대로 영글 수 있다. 어찌 보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사람은 자신의 허물과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한계를 깨달을 때 저절로 겸허한 마음이 들게 마련이다. 공무원은 조직 내 상관에 대한 겸양의 노력보다도 공익에 대한 책임과 자기 역량 강화에 더 힘써야 할지도 모른다.

공정과 공평을 화두로 삼는 젊은 사람들이 공직에 입문하면서 공직사회도 빠르게 바뀌고 있다. 일부 공무원조직의 결재 서명 관행도 개선되기를 기대해 본다.

태그:#겸양 서명, #공무원, #소방, #서명 관행, #겸손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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