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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내로 집에서 보내는 일상이 전부인 삶을 살면서 자아는 고립된 채 비대해졌다. 그러면서 나의 어떤 일부는 사라졌다. 그런데 집을 나와 혼자 길을 걷고, 카페에 앉아 있거나 영화를 볼 때면, 상실한 무언가가 되찾아지는 것 같았다.

사람들 속에 서면 나라는 자아는 작아졌다. 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되었다. 수많은 이들 중 이름 없는 한 명이 되면 내가 잊혔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곳에서 비로소 나는 나를 잊을 수 있었다. 자신을 잊으면서 축소된 자아는 내 안에 여백을 만들었다. 거기로 세상의 풍경이 담기고 타인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나를 잊기 위해 카페로, 영화관으로 간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이 삶의 무게를 덜어준다
▲ 빗방울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이 삶의 무게를 덜어준다
ⓒ 김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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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오후,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집을 나섰다. 행선지를 정하고 버스를 탔다. 창밖으론 비가 내렸고 버스 안은 한산 했다. 버스가 움직이는 리듬을 느끼며, 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생각은 잦아들고 마음은 잔잔해졌다.

집에서 벗어나 세상 속에 있다는 것, 한 시도 멈추지 않고 분주하게 돌아가는 세계의 한 부분으로 자리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위안을 건넸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타인들 속에 앉아 외로움인지 모를 감정을 흘려보냈다.

카페에 도착해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을 앞에 두고 앉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의 뒷모습을 볼 수 있는 구석자리다. 노트를 펼쳐 글을 쓰다 문득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보았다. 거리를 향한 전면 유리창엔 온통 푸르른 나뭇잎이 가득이다. 창문 앞에 놓인 얇고 기다란 테이블엔 파란 셔츠를 입고 책을 읽는 사람이 앉아 있다.

내 옆엔 나란히 붙어 앉아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이 있고, 대각선 앞으로는 아이의 입에 무언가를 먹여주는 단란한 가족도 보였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이상한 안도에 젖어들었다. 적당히 떨어져 있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지만, 같은 공간이라는 배경을 두고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 혼자 있고 싶은 순간조차, 완전히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이 나를 편안하게 했다.

영화관을 가는 마음도 그렇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누군가와 영화를 공유한다는 감각이 영화 체험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코로나19에 대한 방역 조치로 의자 사이에 간격을 두고 않아야 하고, 그만큼 관객이 줄어든 영화관은 썰렁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영화를 함께 본다는 느낌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영화관이 어둠에 잠기면, 모두가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빛 속에 몰두해 두 시간을 보낸다.

앞 좌석에 앉은 이들의 까만 뒤통수는 서서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존재마저 잊힌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낮은 조명이 켜지면 영화라는 공감각적 매체가 만든 세상을 혼자 유영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부스럭 거리며 일어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를 지나간 감정과 생각의 변화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서로를 전혀 모르지만, 2시간 동안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같은 경험을 한다.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을 공유하고, 인사도 없이 제갈길을 간다. 하지만 영화라는 비밀스러운 항해를 같이했다는 무언의 동질감은 남는다. 영화관을 나서는 타인의 뒷모습에서 알 수 없는 연대감을 느끼기도 한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이 삶의 무게를 덜어준다

영화가 끝났다. 영화라는 매체가 끼얹어 준 이미지와 사운드, 심상이 뒤엉킨 물결을 온몸에 휘감고 어둠이 내린 길로 나왔다. 넓은 대로엔 차도 드물고, 지나가는 사람도 간간이 보일 뿐이다. 순간 드넓은 길이 내 차지인 것 같아 더 천천히 걸었다. 여기와 다른 어떤 세상을 스크린으로 보고 난 마음은 평소보다 조금 더 넓고 푸르렀다.

한결 자유롭고 한 뼘 더 용감해진 발걸음은 어둠 속에서도 씩씩하게 길을 걸었다. 머리 위에서 흔들리는 나뭇잎은 내게 말을 거는 것 같고, 빌딩 숲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엔 어떤 암호라도 담겨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뻥 뚫린 8차선 교차로에 서서 깨달았다. 나는 이토록 작고 미약할 뿐이라는 걸.
 
"우주의 미래가 내 한 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한시도 접지 말되, 내가 하는 일이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 때마다 그걸 비웃어라."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의 즐거움>에서 자기만의 세계에 빠지지 않기 위한 비밀로 불가의 말을 전한다. 나라는 존재는 고유하며 우주의 중심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수한 존재가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상에선 그 존재가 매우 하찮기도 하다. 그걸 자각할 때 삶이 짓누르는 무게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있다. 타인들 속에 있어야만 그 감각은 유지된다. 나의 무게는 무겁지만, 한없이 가볍기도 하다는 걸, 사람들 속에서 감각한다.

세상의 크기를 실감하고,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면 나라는 자아는 작아진다. 그러면 인생의 무게도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다. 내 삶이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힘마저 생긴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이 삶의 무게를 덜어준다. 자아의 압박을 줄여준다.

타인의 뒷모습이, 말할 수 없는 저마다의 마음을 담은 뒷모습이 이상하게 우릴 위로한다.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이, 각자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이 어깨를 두드려준다. 우리는 서로를 모르지만, 그렇게 뒷모습을 공유한다. 나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나도 모르게 타인들과 나눈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무리, 길가에 서서 행선지를 정하는 사람들, 하나의 우산 속에 어깨를 감싸고 걸어가는 연인, 나보다 앞서 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인생이라는 끝을 알 수 없는 장편 영화에 조연으로 등장하여 스쳐 지나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마주쳐 입을 맞추는 대사도 없다. 그런데도 돌아서 가는 뒷모습에 다 알 것 같은 심정이 되어버리는 건, 저마다 다르지만 또 엇비슷하게 흘러가는게 삶이라는 걸 짐작하기 때문이다.

그런 날엔 인생이 나 혼자 써 내려가는 외롭고 고독한 소설이 아니라, 이름도 모르는 무수한 사람들이 들고 나는 거대한 장편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행인 108번 이 되어 내게 주어진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니 대사 없이 지나가는 하나의 신에도 그저 진심을 다하는 수밖에 없는 걸 테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태그:#아이와함께자라는엄마, #엄마의외출, #혼자이지만혼자가아니라는감각, #타인들속에서갖는균형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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