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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나눈 가족끼리라도 정치와 종교 이야기는 함부로 꺼내지 말랬다. 평행선만 달리다 언성이 높아지며 드잡이까지 하게 되고, 종국에는 평생 안 볼 것처럼 등 돌리는 경우도 여럿 봤다. 하물며 가족도 그럴진대, 이웃과 동료들끼리는 철저히 금기다.

그나마 종교는 예전에 견줘 주목도가 많이 떨어졌다. 지난해 이래 일부 개신교 집단이 코로나 확산의 주범으로 낙인찍힌 뒤로는 웬만해선 스스로 신자임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엄격한 방역 지침에 따라 교회에 가는 사람도 크게 줄어든 형국이다.

남은 건 정치다. 정치 말고는 다른 사람들과 만나 나눌 대화의 소재가 별로 없을 정도다. 가족과 친구의 근황이나 직장 생활, 부동산과 주식, 심지어 책이나 영화 이야기로 시작한 가벼운 대화도 결국엔 정치 이야기로 귀결된다. '기-승-전-정치'가 대화의 수순이자 공식이다.

모두가 '정치인'을 자처하는 건 TV나 인터넷의 영향을 빼놓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종편의 시사 프로그램은 말할 것도 없고, 포털마다 메인에 걸린 뉴스는 어김없이 정치 이슈다. 남녀노소 종일 눈을 떼지 못하는 스마트폰과 노트북은 차라리 '정치인 사관학교'다.

1년 365일 톱뉴스는 정치인들의 '입' 차지다. 보수와 진보의 차이도 없다. 모든 언론이 정치 이슈에 목매달고 있다. 뉴스를 소비하는 독자에겐, 굳이 보고 싶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어떻게든 접하게 된다. 보는 게 획일적이다 보니 대화도 천편일률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정치에 무관심한 것보다야 백 번 낫다지만, 대화하다 감정싸움으로 비화하거나 입만 열고 귀를 닫은 채 서로 소 닭 보듯 하다 마무리되는 게 다반사다. 정치에 관한 대화이긴 한데, 토론과 수용, 타협과 합의 등의 '정치 과정'이 없어서다.

아무튼 정치 이슈는, 모르면 사람들 사이의 대화에 끼기 힘든 '필수 교양'이 됐다. 사람들의 입에 무시로 오르내리다 보니, 정치인과 종편의 사회자, 고정 패널 등은 연예인 못지않은 인지도를 얻었다. 종편을 보며 소일하는 어르신들뿐만 아니라, 요즘엔 10대 아이들에게도 인기다.

화근이 된 말 한 마디
 
김어준의 뉴스공장 홈페이지
 김어준의 뉴스공장 홈페이지
ⓒ 뉴스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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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인 김어준이 우리 사회에 끼친 부정적인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무심코 내뱉은 이 말이 화근이었다. 화기애애하던 대화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꼴이 됐다. 지인들은 동의는커녕 나이가 들더니 급격히 보수화됐다며 면박을 줬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다른 분은 '적전분열'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마뜩잖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함께 자리한 세 명 중 내 편은 없었다. 그들은 나름의 논리를 펼쳤지만, 그들의 말에 수긍은커녕 억지스럽고 맹목적인 주장이라며 반박했다. 김어준이 엄청난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 말고는, 갈수록 서로 언성만 높아질 뿐 도무지 타협할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김어준을 '진보의 진지'라고 표현했다. 수백만 명에 이르는 그의 충성스러운 팬층은 진보 세력의 '종잣돈'이라고 말했다. 마음이 나약해지고 다짐이 흔들릴 때 그가 진행하는 방송을 보는 것만큼 확실한 치유제는 없다고 단언했다. 셋 모두 그의 유튜브 채널 구독자였다.

스스로 '총수의 추종자'로 자처했다. 김어준의 가장 오래된 공식 직함이 '딴지일보 총수'여서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 게 익숙하다고 했다. 심지어 들으면 심히 불쾌할 수 있는 '광신도'라는 표현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그들에게 김어준은 세상으로 통하는 '창구'였다.

정치 이야기의 끝은 선거다.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자 지지율 변화와 선거 판세 분석 소재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이다. 정치 평론가를 자처하는 이들이 여기저기 종편을 돌아다니며 떠드는 모습을 보면서 가끔 난 이런 생각을 한다. 선거가 없으면 저들은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까.

사실 지인들과의 정치 이야기는 여느 종편의 시사 프로그램을 술자리로 옮겨온 것에 불과하다. 다른 게 있다면, 상반된 입장의 토론이 아니라 같은 편에서 서로 맞장구치며 확신을 더욱 강화한다는 점이다. 애초 다른 정치 성향의 사람들과는 술자리는커녕 말도 섞지 않기 때문에 서로 만날 일이 없다.

그들은 선거를 통신사의 '고객 빼앗기 전쟁'에 비유했다. 그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투 트랙 전략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하나는 양쪽에 두루 호감이나 거부감이 없는 이들을 공략하는 것이고, 그러자면 우선 충성도를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집토끼를 간수하는 게 밑바탕이라는 이야기다.

그들에게 김어준은 진보 세력이 흩어지지 않게 단단히 묶어두는 밧줄이며, 진보를 향한 굳은 의지와 희망을 샘솟게 하는 화수분이었다. 하나같이 그의 말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명쾌하고 확신에 차 있다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그를 '진보의 진지'로 명명한 이유를 알겠다.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그가 진행하는 방송을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 들어본 적이 있는데, 2시간이 금세 가버렸다고 느껴질 만큼 내내 흥미진진했다. 그야말로 명불허전이었다. 왜 그토록 마니아가 많은지 대번 알 수 있다.

양극단 현상

여기서부터는 나의 '소수의견'이다. 전제해둔다. 나는 김어준의 정치적 견해에는 대체로 동조하는 편이다. 적어도 그들 셋과 술잔을 기울이며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이유다. 김어준은 그들과 공감할 수 있는 '교집합'이면서, 동시에 그들과 견해를 달리한 '여집합'이었다.

의도한 건 아닐지언정, 김어준이 뿜어내는 엄청난 아우라는 정치적으로 우리 사회를 양극단으로 내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주장이 유튜브라는 플랫폼에 얹히면서 사실 확인의 영역을 벗어났고, 알고리즘에 의해 확증 편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됐다. 이런 왜곡된 현실은 그도 동의하리라 본다.

물론, 그에게 모든 책임을 물을 순 없다. 극우 성향의 유튜버가 판치는 세상에서, 어쩌면 그는 진보 세력을 대변하는 외로운 섬과 같은 존재다. 정치적 외압에 맞서 끝까지 그를 지켜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사람들은 그가 쓰러지면 도미노처럼 진보 세력은 무너지게 돼 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양자택일의 선택만 남고 중도는 설 자리를 잃었다. 수직선에 김어준과 극우 세력을 양 끝에 점을 찍고 선을 그은 뒤 가운데를 중도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그건 이념으로 낙인찍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이간질일 뿐이다. 마치 김구 선생을 좌익인 양 규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중도의 사전적 의미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길이나 사고방식을 말한다. 그런데, 누군가 내게 중도를 정의해보라면, 이념적 성향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반론하고 수용하고 타협할 수 있는 자세라고 답하겠다. 중도를 자임하는 이에게 맹목적 지지란 자리할 수 없다.

김어준의 '추종자'들은 그의 주장을 곱씹어보기는커녕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거나 조롱한다. 당장 그에게 책임을 물으려면 가짜뉴스를 남발하면서도 나 몰라라 하는 극우 정치인과 평론가들을 먼저 단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건 극우 세력에 동조하는 짓이라고 분개한다.

결국, 진보와 보수의 대결에서 이기려면, 김어준을 '진지'로 삼은 이들의 수, 곧 그가 진행하는 라디오의 청취자나 유튜브 구독자 수를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들은 어차피 진보와 보수는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존재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중도란 양쪽에 두루 호감이나 거부감이 없는 이들을 가리킨다. 중도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언사조차 필요악이라고 선선히 말한다. 그래도 극우 성향의 정치인과 유튜버에 견준다면, '덜' 자극적이고 '더' 상식적이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술자리가 파할 무렵, '오십보 백보'라는 비유를 들어 논박하려다 말문이 막혀버렸다. 셋은 마치 입이라도 맞춘 듯 '오십보'와 '백보'를 동일선상에 놓고 같은 잣대를 들이미는 건 불공평하다고 꼬집었다. 최선과 차선이 같을 수 없듯, 최악과 차악도 구분해야 한다는 뜻이다.

김어준을 안주 삼은 그날의 대화는 평행선만 달린 채 소득은커녕 서로 얼굴만 붉히다 허무하게 끝났다. 정치 이야기의 결말은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던 거다. 파하고 나오려니, 우리 이야기를 엿듣기라도 했는지 앳된 청년 하나가 우릴 다독이듯 이렇게 말했다.

"외람됩니다만, 그건 김어준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 유튜브가 지닌 한계가 아닐까요?"

태그:#김어준, #유튜브, #뉴스공장, #다스뵈이다, #딴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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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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