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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충효마을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539호 ‘충효동 왕버들군’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충효마을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539호 ‘충효동 왕버들군’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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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일생을 나무와 함께 한다. 지금은 옛 풍습이 돼 버렸지만, 오륙십 년 전만 하더라도 아기가 태어나면 제일 먼저 새끼줄에 소나무 가지와 숯이나 고추를 끼운 금줄을 대문에 걸었다. 그 아기 자라 한평생을 마치고 세상과 이별할 때도 나무로 만든 관 속에 몸을 누이고 저 세상으로 떠났다.

사람들이 사는 곳이면 어디라도 마을 어귀에는 정자와 함께 키 큰 당산나무가 수호신처럼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당산나무는 마을 사람들의 풍요와 안녕을 비는 신앙의 대상이 되었고 마을의 역사가 되었다.

광주광역시에도 사람들과 함께 온갖 풍상을 이겨 내며 애환과 질곡의 역사를 간직한 채 단순히 식물의 범위를 넘어 문화재가 된 '어르신 나무들'이 여럿 있다.
  
옛 전남도청 복원 추진단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옛 도청 본관 앞의 은행나무와 회의실 옆 소나무에도 1980년 계엄군들이 발사한 총탄이 박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옛 전남도청 복원 추진단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옛 도청 본관 앞의 은행나무와 회의실 옆 소나무에도 1980년 계엄군들이 발사한 총탄이 박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 옛 전남도청 복원 추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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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5·18 41주년을 맞아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옛 전남도청 원형복원을 위해 총탄 흔적을 조사한 바 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건물뿐만 아니라 도청 본관 앞의 은행나무와 회의실 옆 소나무에도 1980년 5·18 당시 계엄군들이 발사한 총탄이 여러 발 박혀 있는 것으로 확인되어 충격을 주고 있다.

총탄을 몸에 품은 채 41년 전 무자비했던 국가 폭력의 역사뿐만 아니라 수백 년 세월 동안 뿌리박고 살아온 터에서 광주의 역사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나무들을 만나 본다.

나무는 살아서 '29살 충신'의 삶을 기억한다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충효마을. 무등산 북서쪽 끝자락에 자리한 마을 앞 도로변에는 커다란 왕버드나무 세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광주에서는 무등산 주상절리대에 이어 두 번째로 국가지정 문화재 '천연기념물 제539호'로 지정된 '충효동 왕버들군'이다.
  
국립산림과학원에서 측정한 결과 수령이 약 430년으로 밝혀져 1500년대 후반에 심은 것으로 확인됐다
 국립산림과학원에서 측정한 결과 수령이 약 430년으로 밝혀져 1500년대 후반에 심은 것으로 확인됐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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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산림과학원에서 측정한 결과 수령이 약 430년으로 밝혀져 1500년대 후반에 심은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는 버드나무 3그루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소나무와 매화나무 1그루, 버드나무 5그루가 있어 '일송일매오류(一松一梅五柳)'라 불렀다.

매화나무와 버드나무 한 그루는 말라죽었고, 소나무와 버드나무 한 그루는 마을 앞 도로를 확장하면서 베어 버려 현재는 왕버들 세 그루만 남아 있다.

버드나무의 크기는 높이 9~12m, 줄기둘레 6~ 6.3m, 수관폭은 14~27m로 나무의 줄기가 굵고 잎이 무성하여 세 그루지만 한여름에는 마치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충효마을의 상징인 왕버들군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마을의 지형적 결함을 보완하기 위한 '비보림'으로 조성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출전한 김덕령 장군이 태어날 때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김덕령 나무'라고도 부른다.
    
억울하게 옥사한 김덕령 장군과 부인 흥양 이씨, 김덕령의 형 김덕홍, 아우 김덕보를 기리는 정려비각. 광주광역시기념물 제4호
 억울하게 옥사한 김덕령 장군과 부인 흥양 이씨, 김덕령의 형 김덕홍, 아우 김덕보를 기리는 정려비각. 광주광역시기념물 제4호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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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버들군 앞에는 젊은 나이에 의병으로 출정했다가 억울하게 역모의 누명을 쓰고 옥사한 김덕령 장군과 부인 흥양 이씨, 김덕령의 형 김덕홍, 아우 김덕보를 기리는 정려비각이 있다. 충신은 죽고, 왕버드 나무는 살아서 29살 젊은 장군의 '충심'을 증언하고 있다.

칠석마을의 수호신, 800살 먹은 '할머니 당산나무'
 

마을 뒷산에 검은 돌이 많아 '칠석(漆石)' 또는 '옻돌' 마을이라 불리는 동네가 있다. 광주광역시 남구 칠석동이 그곳이다. 이 마을에는 할머니 당산나무로 불리는 8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된 '칠석동 은행나무'다

광주에서 나주로 향하는 길목 죽령산 아래 넓은 들녘에 자리한 이 마을은 풍수지리상 소가 누워 있는 '와우상(臥牛相)'의 모습을 하고 있어 터가 세다고 전해진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된 ‘칠석동 은행나무’ 800살 먹은 할머니 당산나무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된 ‘칠석동 은행나무’ 800살 먹은 할머니 당산나무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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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농사를 망치기 일쑤였다. 마을 사람들은 소의 입에 해당하는 곳에 구유를 상징하는 연못을 파고 고삐를 이 은행나무에 묶었다. 꼬리 부분에는 일곱 개의 돌을 놓았다.

마을에서는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세시풍속으로 매년 정월 대보름 전날 당산제를 지냈다. 윗마을에서는 소나무를 할아버지 당산으로 아랫마을에서는 이 은행나무를 할머니 당산으로 모셨다.

당산제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은행나무를 돌아 고싸움놀이를 하며 마을의 화합을 다졌다. 칠석동 고싸움놀이는 국가 중요 무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마을에서는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세시풍속으로 매년 정월 대보름 전날 당산제를 지냈다
 마을에서는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세시풍속으로 매년 정월 대보름 전날 당산제를 지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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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약 26m, 둘레 13m에 이르는 칠석동 은행나무는 고려 말부터 조선조 초기에 걸쳐 왜구 토벌에 공을 세운 김문발(金文發, 1359~1418)이 심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지고 있다. 은행나무 인근에 김문발이 지은 정자 부용정이 있다.

광산 이씨 가문과 흥망성쇠를 함께한 '의리의 버드나무'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에는 광주 이씨들의 세거지 만산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는 높이 약 15m, 흉고 직경 1.7m가량의 왕버드나무가 한 그루 있다. 약 600년 된 노거수에서 돋아난 새순들이 연한 초록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는 '괘고 정수'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는 ‘괘고정수(掛鼓亭樹)’ 북을 걸어놓은 정자나무라는 뜻이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는 ‘괘고정수(掛鼓亭樹)’ 북을 걸어놓은 정자나무라는 뜻이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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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고정수란(掛鼓亭樹) 말 그대로 '북을 걸어 놓은 정자나무'라는 의미다. 이 나무는 조선 세종대 문신인 필문 이선제(李先齊, 1389~1454)가 심었다고 한다.

고려사와 태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한 이선제는 조선 초기 광주를 대표하는 문신이다. 이선제는 나무를 심으면서 "이 나무가 흥하면 가문이 흥하고 죽으면 가문이 쇠락할 것이니 각별히 잘 돌보라"라고 당부했다.

이선제의 아들인 시원과 형원이 과거에 합격했고 형원의 아들 달손, 달손의 아들 공인, 공인의 아들 중호, 중호의 아들 발과 길이 대를 이어 합격했다. 그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에 북을 걸어놓고 잔치를 벌였다.
  
5대손 이발이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멸문지화를 당하자 예언대로 버드나무도 말라죽기 시작했다. 300년이 지나고 이발이 신원되자 다시 새잎이 돋아나면서 나무가 살아났다. 마을 뒤쪽에 이선제를 기리는 부조묘와 후손들의 유적비가 서 있다.

선교사들의 향수를 달래준 '양림동 호랑가시나무'  

'광주의 예루살렘'이라 부르는 양림동은 1900년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들어와 복음을 전하던 곳이다. 푸른 눈의 성자들은 이곳에 들어와 학교와 병원을 지어 근대 교육과 의료를 시행하며 선교에 나섰다.

양림동 곳곳에 이들의 흔적이 근대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이방의 성직자들이 살았던 우일선 선교사 사택과 수피아 여고에 있는 커티스 메모리얼 홀 사이에 사시사철 푸른빛을 잃지 않는 잎사귀에 날카로운 가시를 달고 있는 나무가 한 그루 있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양림동 호랑가시나무’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양림동 호랑가시나무’
ⓒ 광주문화재돌봄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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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 가시는 예수의 면류관, 빨간 열매는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성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기독교에서 가시는 예수의 면류관, 빨간 열매는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성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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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호랑가시나무다. 높이 6m, 뿌리 부분 둘레 1.2m 수령은 약 400년으로 동종의 나무 치고는 큰 편이다. 호랑가시나무라는 이름의 유래는 호랑이가 등이 가려울 때 잎사귀에 등을 긁었다 해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4~5월에 꽃이 피고 9~10월에 열매가 붉게 익는다. 한겨울에도 그 빛이 선명하여 크리스마스 장식용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기독교에서 가시는 예수의 면류관, 빨간 열매는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성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이 나무를 보면서 향수를 달랬을 것이다. 인근에는 그들이 고향에서 가져와 심은 호두나무와 피칸 나무가 있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된 ‘학동 느티나무’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된 ‘학동 느티나무’
ⓒ 광주문화재돌봄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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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농사의 풍흉을 점쳤던 '학동 느티나무'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 전남대학교 병원에는 수령 약 350년, 높이 20m 흉고 둘레 6m가량의 느티나무가 있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된 '학동 느티나무'다. 광주는 덕림, 양림, 유림, 운림 등 숲과 관련된 지명이 많은 것으로 보아 숲과 나무가 많았던 고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옛날부터 이곳은 임동에서 금남로와 남동을 거쳐 화순으로 가는 길목으로 큰 나무들이 즐비했다. 1970년대 도시개발로 대부분 없어지고 이 나무만 남았다. 옛사람들은 이 나무를 보고 그해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 아래에서부터 잎이 돋아나면 '흉년'이고, 위에서부터 잎이 돋아나면 '풍년'이 든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나무 아래 세워진 동강 신익전의 선정비. ‘천년완골(天年頑骨)’ 세세토록 이곳을 굳건하게 지켜주길 바라는 민초들의 염원이 담겨있다
 나무 아래 세워진 동강 신익전의 선정비. ‘천년완골(天年頑骨)’ 세세토록 이곳을 굳건하게 지켜주길 바라는 민초들의 염원이 담겨있다
ⓒ 광주광역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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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아래에는 1645년에 광주 목사로 부임한 신익전(申翊全)의 선정비가 서 있다. 비의 뒷면에 '천년완골(天年頑骨)'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글자대로 해석하면 '천년 동안 닳지 않는 뼈다귀 돌'이라는 뜻이다.

고을 사람들은 신익전 목사가 선정을 베풀고 승정원으로 영전해 가게 되자 선정비를 세우고 이 나무를 심었다. 천년 동안 오롯이 버텨온 빗돌과 함께 세세토록 이곳을 굳건하게 지켜주길 바라는 민초들의 염원이 담겨 있는 느티나무다.

태그:#광주의 수목 문화재, #광주의 어르신 나무들, #충효동 왕버들, #칠석동 은행나무, #학동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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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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