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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별세한 남희섭 지식연구소 공방 소장(변리사)을 추모하는 글입니다. [편집자말]
2015년 3월 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TPP-FTA대응 범국민대책위원회 등 주최로 열린 '한미 FTA 발효 3년 평가 및 TPP 전망 토론회'에서 당시 남희섭 오픈넷 이사(왼쪽 세번째)가 발제를 하고 있다.
 2015년 3월 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TPP-FTA대응 범국민대책위원회 등 주최로 열린 "한미 FTA 발효 3년 평가 및 TPP 전망 토론회"에서 당시 남희섭 오픈넷 이사(왼쪽 세번째)가 발제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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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혁명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맑시즘이 그 이전의 사상들과 달랐던 매력은 종교, 도덕 등의 이상으로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정확히 파악한 '과학'의 힘을 빌어 세상을 바꿔나간다는 기획에서 비롯되었다.

우리 세대의 많은 사람들은 사회과학이라는 말을 지금의 사회학(social science)이 아니라 '사회를 바꾸는 과학'의 의미, 즉 혁명이론으로 이해했었다. 이런 과학적인 측면 때문에 수많은 지성인들의 가슴을 들끓게 했다.

과학은 냉철해야 했다. 어느 사람에게 충성하지도, 어느 세력에게 충성하지도, 감정에 휘말리지도, 공격에 움츠러들지도 않아야 했으며, '정세 판단'을 하고, 이에 따른 변혁이론이 도출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역할이 확정되면 주변 사람들의 지지가 있든 없든 꾸준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나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남희섭 박사는 아마도 내가 만나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투철한 혁명가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어떤 사안을 우선 혁명의 대상으로 삼으면 자신의 전공 분야나 사전 지식과 관계없이 누구보다도 빨리 그리고 깊게 그 사안을 연구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실천에 옮길 때의 효율과 정성은 가히 장관이었다. 특별한 지위도 권력도 세력도 조직도 없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던 국회의원들이 그에게 설득되었고 가장 거대한 시민단체들이 그의 주장과 행동에 참여하였다.   

오픈넷 사람들은 남희섭 박사와 같이 일했다는 것만으로 엄청난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다. 이태리해킹팀 RCS(Remote Control System)의 존재를 파악하는 앱을 1주일 만에 만들어 5만 회 다운로드 배포시켰던 사례에서 보듯이 남희섭 박사의 추진력과 조직력도 대단했지만 그 활동의 규모는 항상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참여를 받아줄 만큼 풍족했기 때문이다.

남희섭 박사는 떠났지만 아직도 이때 맺은 인연들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국내 보안업계를 국가정보원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국정원이 이태리해킹팀의 RCS를 수입해 국내 첩보용으로 썼는지 확인하려는 작업에 보안전문가가 참여하기는 생계를 걸기 전에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남희섭 박사는 용기 있는 프로그래머들을 발굴해 짧은 시간 안에 성사시켰다.  

운동이 미칠 영향까지 생각해 또 다른 운동을 동시에 병행

남희섭 박사는 아마도 '지식자본론' 즉 자본(Das Kapital)이 아니라 지식자본(Das Intellektuelle Kapital)을 쓰고 싶었을 것이다. 21세기에 들어 재래식 자본의 공유 또는 독점보다는 지식자본의 공유 또는 독점이 민중의 해방에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활동은 오픈넷에서 저작권 형사처벌 개선 운동으로 꽃을 피웠고 지난한 입법과정을 거쳐 담당 상임위까지 통과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었다. 하지만 그는 한편으로 지식독점자본에 맞서 싸우면서도 그의 저작권 합리화 운동이 지식노동자들의 '텃밭'을 망치지 않도록 또 하나의 싸움을 동시에 이어갔다.

소위 '백희나법'으로 불리는 문화예술분야 베스트셀러법, 즉 예기치 못한 대박이 터지는 문화예술작품에 대해 예술노동자들의 정당한 지분을 찾아주기 위해 애썼다. 도리어 말기에는 예술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이 지식독점자본 타파 활동보다 더 활발했다. 

남희섭 박사가 오픈넷의 이사장까지 역임했던 것은 인터넷이 지식공유 그리고 지식독점 타파에서 갖는 중요한 역할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같은 차원에서 웹하드 운영자들이 저작권 등을 이유로 부당한 공격을 당하지 않도록 도왔고 "정보매개자책임제한"이라는 말도 그가 지어서 오픈넷이 지금도 전파하고 있는 복음의 이름이다. 

남희섭 박사의 말기에 가장 그를 힘들게 했던 일은 웹하드 업체와의 관계에 대한 모함이었다. 급진 페미니즘 운동가 일부가 반포르노 운동으로 포르노그래피의 온상이 되어 왔던 웹하드 업체를 공격하면서 남희섭 박사까지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런 모함은 오픈넷처럼 디지털 인권운동을 하는 다른 사람들도 당하기도 하지만 특히 안타까운 이유는 남 박사가 급진 페미니스트들이 지적한 인터넷의 어두운 면을 해소하기 위해 웹하드 운영자들의 필터링 기술을 배워 디지털 성 범죄물을 자동으로 검색해내는 DSO(디지털성범죄아웃)를 설립했던 공까지 묻혀 버렸다는 점이다. 

운동을 하면서 자신의 운동이 미칠 수 있는 영향까지 생각하여 또 다른 운동을 동시에 병행해나가는 그는 정말 모든 걸 알려고 했던 혁명가였다. 그가 짧은 생애 동안 이루지 못한 것들 우리가 조금씩 나눠서 이루자는 다짐으로 추모를 대신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박경신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자 사단법인 오픈넷 이사입니다.


태그:#남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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