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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항쟁은 누구나 기억하는 민주화의 역사이지만 1991년의 투쟁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1991년의 어느 봄날,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 학생이 노태우 정권 타도, 학원자주화 투쟁 과정에서 경찰의 폭력으로 숨지자 이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이 과정에서 폭력정권을 규탄하며 모두 11명의 학생, 노동자, 시민들이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 기념사업회'는 30년 전 1991년 5월 투쟁에서 민주의 꽃이 된 열사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말]
김기설 열사.
 김기설 열사.
ⓒ 김동석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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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걸었을까? 발걸음이 바뀔 때마다 마음도 흔들렸다. 새벽까지 함께 술을 마신 동지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제발 살아서 투쟁하자."
"열사들의 한을 우리가 같이 풀어줘야지."


조금 전 통화한 여자 친구의 목소리도 가슴을 찔렀다.

"목소리가 왜 그래? 아무 일 없는 거지? 그렇지?"

아무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게 마지막 통화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흘렀다.

불길에 휩싸여 떨어진 스물여섯살
  
1991년 5월 8일 오전 6시 서강대 옥상에서 분신한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청년 김기설 전민련 사회부장의 영결식 행렬이 1991년 5월 12일 신촌사거리를 지나고 있다.
 1991년 5월 8일 오전 6시 서강대 옥상에서 분신한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청년 김기설 전민련 사회부장의 영결식 행렬이 1991년 5월 12일 신촌사거리를 지나고 있다.
ⓒ 현장사진연구소 이용남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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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훤히 밝았다. 동쪽 하늘에는 오월의 태양이 떠올랐다. 서울로 올라온 지 넉 달. 이제 신촌 거리는 눈에 익숙했다. 연세대 방향으로 올라가려다 방향을 바꾸었다. 연세대에서는 왠지 아는 얼굴을 만날 것 같았다. 길을 건너 신수동 방향으로 올라갔다. 손에는 가방이 하나 들려 있었다.

어느새 서강대 정문에 다다랐다. 아직 학교는 고요했다. 연일 계속된 시위 때문인지 교정에는 최루탄 냄새가 가시질 않았다. 청년광장을 가로질러 건너편 큰 건물을 향했다. 서강대 본관이었다.

현관을 지나 계단을 한 발 한 발 올라갔다. 여러 얼굴들이 떠올랐다. 성남 민청련의 선배들, 강경대의 죽음 이후 꾸려진 범국민대책위 상황실의 동지들 그리고 뒤늦게 운동권이 된 아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부모님…….

전민련 사회부장을 맡아 뛰어다니던 일들도 떠올랐다. 특히 원진레이온의 산재 노동자들과 속초 동우전문대 학생들이 생각났다.

본관 4층 계단을 올라 옥상 입구에 도착했다. 문을 밀고 들어갔다. 난간에서 한참을 내려다봤다. 입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 재킷 안주머니에 있던 유서를 꺼내 다시 읽어봤다. 한 장은 동지들께 그리고 또 한 장은 부모님께 남긴 글이었다.

유서를 다시 안주머니에 넣었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통을 꺼냈다. 거기에는 시너가 담겨 있었다.

잠시 후 "노태우 정권 퇴진하라! 민자당은 해체하라!"는 외침과 함께 불길에 휩싸인 그가 지상으로 떨어졌다. 1991년 5월 8일 오전 8시, 그의 이름은 김기설, 스물여섯의 나이였다.

"기설아, 도대체 왜 죽겠다는 거야?"   
 
전민련 사회부장을 지낸 김기설 열사.
 전민련 사회부장을 지낸 김기설 열사.
ⓒ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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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7일 오후였어요. 무영이형(당시 전민련 간부였던 임무영씨)이 상황실(당시 강경대 치사 사건에 맞서 재야단체에서는 범국민대책위윈회를 꾸리고 연세대 학생회관에 상황실을 두고 있었다)에서 급히 나를 찾더니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기설이가 좀 이상하다는데 빨리 찾아봐라."

당시 나하고 기설이하고 장준호라고 전청대협 조직사업 담당하던 후배, 이렇게 셋이서 북가좌동에서 자취를 했어요. 3층 옥탑방이었죠. 다들 바빠서 같이 자는 경우는 잘 없었지만요.

몇 사람이 흩어져서 기설이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녔어요. 나는 일단 자취방으로 찾아갔어요. 아무도 없더군요. 혹시나 싶어 방을 뒤져봤죠. 그런데 방 한쪽에서 제가 갖다 놓은 리포트 용지에 뭐라고 적힌 게 있더라고요. 기설이 글씨였어요.

읽어보니 이상했어요. 유서 같은 느낌이 확 들었죠. 아, 이놈이 진짜 뭐가 있구나 싶었어요. 일단 그 종이를 호주머니에 넣었어요. 어디 가서 기설이를 찾나 고심하는데, 기설이가 쓱 들어오는 거예요.

모른 척하고 집 밖으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버스정류장 앞 포장마차에 같이 들어갔어요. 어둑어둑해졌을 때니 일곱 시가 넘었을 겁니다. 내 머릿속에는 기설이 이놈을 혼자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렇다고 바로 유서를 꺼내놓고 추궁할 수도 없었어요. 일단 이 얘기 저 얘기 늘어놓으며 대화를 이어갔죠.

그러는데 내가 기설이 하고 같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사람이 더 찾아왔어요. 기설이하고 성남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도레(이도레씨)도 왔죠. 네 사람이 성균관대 쪽으로 자리를 옮겼어요. 유림회관 근처 술집에서 다시 술을 마셨죠.

그때 제가 기설이한테 말했어요. "기설아, 왜 그래? 도대체 왜 죽겠다는 거야?" 기설이가 처음에는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어요. 그래서 제가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보여줬죠. "이거 네가 쓴 거 맞지? 살아서 싸워야지 왜 죽겠다는 생각을 해?" 이렇게 셋이서 따지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면서 기설이를 설득했어요.

기설이는 한참을 듣고 있더군요. 그렇게 새벽까지 술을 마셨을 거예요. 나중에는 기설이도 우리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자기 안 죽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기설이 스스로 그 종이를 찢어버리도록 했어요. 또 다같이 독재정권에 맞서 끝까지 싸우자 다짐도 하고 그랬어요. 기설이 표정이 처음보다 밝아지고 웃기도 해서 우리도 안심했죠.


그때 따라갔어야 하는 건데...

강경대가 쓰러지고,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이 분신하면서 상황실에서 장례 준비에 정신없던 우리도 불쑥불쑥 눈물이 나고 그랬어요. 기설이는 성격도 여린 편인 데다가 문학적 감수성도 풍부했어요. 그런 기설이다 보니 더욱 걱정이 되었던 거죠. 그래도 마지막에는 분위기도 좋아지고 해서 안심했거든요.

그러다 기설이가 잠깐 전화 좀 하고 오겠다며 일어섰어요. 그때 따라갔어야 하는 건데... 아마 6시쯤 됐을 거예요. 밤을 새웠으니 다들 피곤했고, 연일 집회 준비하느라 지치기도 했어요. 공중전화는 버스정류장 옆에 있었어요. 술집에서 얼마 안 떨어졌죠.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기설이가 안 오는 거예요. 아차 싶더군요. 그 일대를 찾아다녔는데 안 보였어요. 연세대로 갔나 싶어서 서둘러 왔죠. 상황실에는 오지 않았어요. 학생회관 주위의 건물마다 다 찾아보고 수위 아저씨한테 말해 옥상까지도 뒤져봤죠.

하지만 기설이는 어디에도 없었어요. 그런데 아침에 뉴스에 나오더군요. 서강대에서 누가 분신해서 투신했다고. 하늘이 노래졌어요. 그 길로 서강대로 쫓아갔어요. 하지만 이미 기설이는...


당시 범국민대책위 상황실에서 김기설 열사와 함께 활동했던 임근재(당시 전국청년단체대표자협의회 연대사업 담당)씨의 증언이다.

성남 민청련과 전민련 사회부장
 
군 생활 중의 김기설의 생전 모습(맨 우측)
 군 생활 중의 김기설의 생전 모습(맨 우측)
ⓒ 참여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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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9일 김기설 열사 30주기를 맞아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모인 옛 성남 민청련 회원들. 맨 왼쪽이 성남 민청련 회장을 지낸 최경환 전 의원이다.
 2021년 5월 9일 김기설 열사 30주기를 맞아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모인 옛 성남 민청련 회원들. 맨 왼쪽이 성남 민청련 회장을 지낸 최경환 전 의원이다.
ⓒ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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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설 열사는 1965년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서 태어났다. 1982년 인천 수도전기통신고에 입학했지만 이듬해 중퇴하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김기설 열사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제대 직후인 1988년 9월 성남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창립대회에서 김근태 당시 민청련 의장의 강연을 듣고 나서부터다. 이를 계기로 성남 민청련에 가입한 열사는 성남노동자의집 상담간사로 일했고, 1991년 1월부터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으로 활동했다.

"기설이는 내가 1988년 성남 민청련을 창립할 때 자진해서 성남 민청련 회원이 된 후배였습니다. 조직의 막내로 성남 민청련 일을 도왔죠. 특히 나를 잘 따랐습니다. 기설이는 분신하기 1주일 전쯤 우리집에 와서 우리 큰 아이와 한참 놀다가 갔어요. 그리고 자취하면서 생긴 옷가지를 가지고 내 아내에게 세탁을 맡겼죠. 끝내 그 옷가지들은 찾아가지 못했네요."

성남 민청련 의장 시절 김기설 열사와 인연을 맺었던 최경환 전 의원의 기억이다. 최 전 의원과 성남 민청련 회원들은 2021년 5월 9일 이천 민주화기념공원에서 30주기 추도모임을 열었다.

김기설 열사를 알던 사람들은 마음이 여리지만 순수했고, 늘 궂은일이나 드러나지 않는 일을 도맡아 했던 이로 기억한다. 성남에서 사무실을 함께 사용했던 정해랑씨(현재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의 회고다.

"기설이는 조용하고 말이 없었어요. 늘 양은 찬합에 도시락을 싸와 점심 때 절반을 먹고, 저녁 때 나머지 절반을 먹던 기억이 나네요. 검소하고 부드러움 속에 열정을 지닌 친구였죠."

김기설 열사는 전민련 사회부장을 맡은 직후인 1991년 3월, 속초 동우전문대 사건(학교 측이 지역의 깡패들과 결탁해 운동권 학생들을 탄압했는데, 이 과정에서 김용갑 1990년 총학생회장이 의문의 교통사고로 숨지고, 진상을 밝히기 위해 투쟁하던 정연석 1991년 동아리연합회장이 분신하기도 했다)이 터지자 속초로 달려와 외롭게 투쟁하던 학생들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당시 동우대 학생이었던 고상만(현재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씨의 기억이다.

"기설이 형이 속초에 내려왔을 때, 제가 '아무도 우리에게는 관심이 없다'며 도와달라고 울면서 호소한 적이 있었죠. 형은 제 이야기를 들으며 참 마음 아파했고, 공감해줬죠. 형의 분신 소식을 듣고 그때 형한테 큰 짐을 안겨준 것만 같아 괴로웠어요."

"단순하게 변혁운동의 도화선이 되고자 함이 아니다"
 
김기설 열사가 남긴 유서.
 김기설 열사가 남긴 유서.
ⓒ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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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는 노동자들에게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다. 특히 원진레이온 산재 노동자들이 제대로 된 보상도 못 받고 힘겹게 투병하다 스스로 세상을 등진 소식을 듣고 원진레이온 사태를 알리기 위해 헌신적으로 뛰어다녔다.

이때 노태우 정권의 반민중성과 노동자에 대한 폭압성을 확인하면서 열사는 많이 힘들어 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열사는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고 결심했던 것이다.
 
단순하게 변혁운동의 도화선이 되고자 함이 아닙니다. 역사의 이정표가 되고자 함은 더욱 더 아닙니다. 아름답고 밝은 현실과는 다르게 슬프게 아프게 살아가는 이 땅의 민중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고민 속에 얻은 결론이겠지요.(김기설 열사의 유서 중에서)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김기설 열사가 남긴 유서.
 김기설 열사가 남긴 유서.
ⓒ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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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안당국은 열사의 죽음을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갔다. 누군가 죽음을 부추긴 세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5월 5일 김지하 시인이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는 칼럼을 쓰면서 논란을 만들었고, 김기설 열사가 분신한 5월 8일 기자회견을 자청한 서강대 박홍 총장은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며 분신 배후를 언급하기도 했다.

이를 기화로 공안당국은 분신 배후세력을 찾아 나섰다. 임근재씨를 비롯해 5월 8일 새벽까지 열사와 술을 마신 사람들은 물론이고 전민련과 범국민대책위 간부들 모두 수사대상에 올랐다.

하지만 분신 배후로 덮어씌우기 위해서는 뭔가 필요했다. 이렇게 해서 튀어나온 것이 바로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 불리는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이었다.

전민련 총무부장인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해줬고, 분신하도록 부추겼다는 공안당국의 주장은 운동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했다. 제비뽑기를 해서 분신할 순번을 정했다더라, 벌써 분신할 사람이 수십 명 대기하고 있다더라, 이런 식의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여기에는 공안기관의 치밀한 공작과 언론의 호응이 절대적 역할을 했다.

결국 김기설의 친구 강기훈은 자살방조 혐의로 구속돼 3년의 감옥살이를 했다. 누가 봐도 김기설과 강기훈의 필체는 달랐다. 하지만 법원은 동일 필체로 보인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문서분석실장 김형영의 일방적인 감정 외에 다른 것은 인정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짜 맞춘 수사였고 재판 결과였다.

강기훈, 재심에서 무죄... 조작한 자들은 처벌 안받아
 
'유서대필' 사건으로 2014년 2월 23년만에 무죄 판결을 받은 강기훈씨.
 "유서대필" 사건으로 2014년 2월 23년만에 무죄 판결을 받은 강기훈씨.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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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에 와서야 강기훈씨는 재심을 통해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24년 만에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난 것이다. 강기훈씨는 현재 말기암으로 오랜 기간 투병 중이다. 공안당국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이다.

그래도 남는 문제가 있다. 대법원의 판결은 강기훈씨가 유서를 대신 쓰지 않았다는 것일 뿐, 누군가 유서를 대필했다는 의심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검찰은 초기부터 "(유서 내용이) 고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사람이 쓸 수 있는 글이 아니"라면서 열사를 모욕하고 분신 배후를 들먹였다. 이렇게 사건을 조작한 자들을 처벌하지 않고서는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진실은 여전히 밝혀지지 못한 상태로 남을 수밖에 없다.

당시 법무부 장관은 박근혜 정권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김기춘이었고, 부장검사였던 강신욱은 대법관까지 지냈으며, 수사검사였던 곽상도는 현재 국민의힘 국회의원이다.
 
김기설 열사의 묘.
 김기설 열사의 묘.
ⓒ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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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모금계좌 : 농협 356-1492-0647-43 안영민(1991년 열사투쟁 기념사업회). 여러분들이 모아주신 마음은 1991년 열사들의 기록영상 제작과 30주년 종합다큐멘터리 제작에 사용됩니다. 모금에 참여해주신 분들은 종합 다큐멘터리 영화 엔딩 크래딧에 명단을 공개합니다.

*이 글을 쓴 안영민은 1991년 경북대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했고, 현재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 기념사업회 집행위원장과 (사)평화의길 사무처장을 맡고 있다.


태그:#김기설, #1991년 5월 투쟁,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노태우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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