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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첫 주말, 전날 내린 비로 대기는 맑고 투명해졌고, 봄빛이 사방에서 찬연하게 부서졌다. 연초록 잎사귀로 풍성하게 단장한 나무들이 곳곳에서 우리를 부른다. 미리 예약해둔 미술관 전시가 있어 아이와 함께 외출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도착해 입장 티켓을 받아 들고 곧장 <움직임을 만드는 움직임>(Movement Making Movement, 2021.4.23.~9.26) 전시를 진행하는 곳으로 향했다.
 
'움직임을 만드는 움직임' 전시 포스터
 "움직임을 만드는 움직임" 전시 포스터
ⓒ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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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하고 우아한 종이 인형의 움직임

커튼으로 가려 둔 입구를 통과하니 어둠에 잠긴 커다란 공간이 나타났다. 벽면과 천정에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고 그 위로 여러 작가들의 다채로운 작품들이 흘러나왔다. 그중 로테 라이니거(Lotte Reiniger 1899~1981)의 작품이 가장 매력적이었다.

종이를 오려 만든 인형을 움직여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빠르게 돌려 만드는 '실루엣 애니메이션'이다. 작가는 정교하고 자연스런 움직임을 위해 인형을 조각조각 잘게 잘라 와이어로 연결했고 미세하게 움직이며 촬영을 했다.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난 로테 라이니거는 일찍이 영화에 사로잡혀 제작에 참여했고 대사 자막을 실루엣 기법으로 표현하는 일을 했다. 애니메이션 연구 그룹을 소개받으면서 애니메이션 장르에 발을 들이고 이후 여러 편의 실루엣 애니메이션을 만들며 활발한 작업 활동을 했다. 1910년대부터 시작된 애니메이션 분야 중 몇 안 되는 여성 애니메이터로 실루엣 애니메이션의 창시자로 평가 받고 있다.
 
종이 인형을 움직여 사진을 찍고 그걸 빠르게 돌려 만드는 '모션 픽처'의 원리는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런데도 로테 라이니거의 작품이 눈길을 끌었던 이유는 종이로 만든 인형의 섬세하고 우아한 생김새와 파스텔톤의 찬연한 색감 때문이다.

라이니거는 자연스런 동작을 만들기 위해 인물별로 대·중·소 여러 크기로 인형을 제작하고, 그림자를 만들기 위해 아래에서 조명을 비추는 '트릭 테이블'을 고안했다고 한다. 또 인물을 둘러싼 배경을 원경, 중경, 근경으로 나누어 여러 장의 패널로 연출하는 '멀티 플레인' 기법도 도입했다.
 
스크린 위로 이제는 사라졌거나 우리가 다다를 수 없는 상상의 세계가 펼쳐졌다. 창을 든 기사와 공주,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올 것 같은 소년과 소녀가 검은 실루엣으로 등장하여 말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가느다랗고 유연한 실루엣의 움직임은 우아했고 그림자만으로 보여지는 세계는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색을 입힌 애니메이션도 있었다. 거기에서는 문어와 싸워 유리 구슬을 되찾는 용감한 개구리가 등장한다. 아이는 춤추듯 움직이는 개구리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로테 라이니거의 작품 앞에는 관람객이 실루엣 애니메이션 제작을 체험해볼 수 있는 기기가 마련되어 있다. 여섯 살 아이가 이 체험을 굉장히 좋아했다.
▲ 로테 라이니거의 실루엣 애니메이션 로테 라이니거의 작품 앞에는 관람객이 실루엣 애니메이션 제작을 체험해볼 수 있는 기기가 마련되어 있다. 여섯 살 아이가 이 체험을 굉장히 좋아했다.
ⓒ 김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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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영상에 빠져 있는데 20대 정도로 보이는 젊은 여성 서넛이 다가왔다. "완전히 노가다잖아. 노가다야, 노가다"라고 질색하며 말했다. '노가다'는 '막일' 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일본 말이다.
 
모자에 달린 깃털 하나, 머리 카락의 갈라진 틈새 하나, 작고 오똑한 콧날과 보일 듯 말 듯 갈라진 입술선을 가위로 일일이 잘라내어야 인형은 만들어진다. 그런 인형을 조각내어 와이어로 연결하고 손으로 조금씩 움직여 수천, 수만 장의 사진을 찍어야 하는 작업이다. 완성된 애니메이션은 근사하고 멋져 보이지만 그 뒤에 숨어있는 개개의 작업 과정은 '중요하지 않은 허드렛일'의 반복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작가에게 자잘한 것을 반복해야하는 과정이 허드렛일처럼 느껴졌을까? 여러 등장 인물을 만들기 위해 가위질하느라 손은 저리고 작은 인형을 움직여 사진을 찍느라 목과 어깨가 결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작가가 고통 속에 진저리치며 작업을 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종이 인형이 지닌 섬세한 선과 영상이 자아내는 사랑스럽고 따스한 분위기만 봐도 알 수 있다. 작가가 작업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열정적으로 몰두했는지 절로 느껴졌다. 작업하는 내내 자신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세계에 스스로가 매료되고 사랑에 빠졌을 게 눈에 보일 듯 그려졌다.

작가의 노력과 영혼이 담긴 세계
 
"당신의 목표는 자신의 진정한 재능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그것을 개발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애니메이션은 기본적으로 기술적 도구라기보다는 그 뒤에 있는 영혼의 표현이다. 그 영혼이 촬영에 스며들게 하는 것이 당신의 최고의 목표가 되어야만 한다." – 로테 라이니거

작가의 말을 보면 그 짐작이 확실해진다. 라이니거는 '움직이는 그림'을 기술적 차원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애니메이션을 '영혼'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여겼고, 촬영 과정에 자신의 영혼이 스며들게 했다.

그의 영상 속에서 작은 인형들은 작가의 '영혼'을 담고 움직였다. 표정이 보이지 않는 실루엣인데도 익살과 온기,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작가가 사랑한 세계, 자신의 영혼이 담긴 세계이기에 그걸 보는 우리도 묘하게 가슴이 울렁거렸으리라. 보는 이에게 황홀하고 신비로운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세계는 그렇게 만들어 진다.
 
영혼에 앞서 재능에 대해 언급한 말도 인상적이다. 작가는 자신의 진정한 재능을 발견하고 그걸 개발하는 게 우리의 목표라고 했다. 단지 재능의 발견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걸 개발하는데 노력을 쏟아야 한다는 말로 다가왔다.

진정한 재능을 발견했다면 어떤 어려움과 환경적, 상황적 제약에도 굴하지 말고 그걸 키우기 위해 노력하라는 진지한 격려로 들렸다. 재능을 발견하고 누구 못지않은 열정과 노력을 쏟아 아름답게 꽃 피워 낸 작가의 삶은 영적으로 얼마나 풍성했을까.
 
재능은 재능 자체만으로 발현되기 어렵다. 훌륭한 토양에 꽃을 심어도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죽어버리고 마는 것처럼. 매일 물을 주고 햇빛과 바람을 고려하며 적당한 때에 거름을 보충해주는 노력만이 매해 끊이지 않고 꽃을 피워내는 방법이다.

"스물아홉 살인 지금은 더 이상 재능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된 지 오래다. 꾸준함 없는 재능이 어떻게 힘을 잃는지, 재능 없는 꾸준함이 의외로 얼마나 막강한지 알게 되어서다"라는 이슬아 작가의 말처럼, 꾸준한 노력 없이는 재능도 존재할 수 없다.
 
작품 전시 앞에는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종이 인형을 이용해 관람객이 직접 애니메이션을 제작해볼 수 있는 컴퓨터 시스템이 준비되어 있다. 와이어로 연결된 인형의 몸을 움직여 사진을 찍으면 빠르게 재생하여 영상을 만들어 보여준다.

아이가 이걸 무척 좋아했다. 작은 두 손으로 조심스레 인형을 움직이고, 마우스를 조작해 사진을 찍는 일에 오래 몰두했다. 누군가에겐 '중요하지 않은 허드렛일'처럼 여겨지는 일이 다른 이에겐 즐거움이 되고, 상상력을 자라게 한다. 작은 노력이 꾸준히 쌓이는 과정만이 우리를 어딘가로 데려다 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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