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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61년 인천 부평 애스컴시티(Ascom City) 앞 기지촌 풍경. <ME&KOREA> 제공
 1960~61년 인천 부평 애스컴시티 앞 기지촌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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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니~~" 옆집 아주머니는 어린 딸애 이름을 길게 늘어뜨려 부르곤 했다. 40여 년 전, 하나도 이국적일 것이라고는 없는, '응답하라 1988' 드라마를 상상하면 쉽게 떠올릴만한 평범한 동네에서, 아이가 영어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단연 별난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나는 그 도드라짐에 별반 예민하지 않았고, 오히려 길고 노란 머리에 하얀 피부를 가진 스테파니가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게다 가 단층 슬라브로 된 우리 집과 달리, 번듯한 이층집에 그것도 집의 세 배 정도 되는 정원이 있던 스테파니네 집은 무척 근사했다.

엄마는 뒷집, 앞집, 골목집과도 무람없이 드나들며 진하게 지냈는데, 웬일인지 옆집 스테파니네와는 왕래 없이 지냈다. 그런 이유로 이웃 간임에도 스테파니나 스테파니 아주머니와 말을 섞어 본 기억이 없다.

어느날 방과 후 마실 간 엄마를 찾아 나섰다가 홍순경 아주머니네(당시는 퇴직했지만 다들 그렇게 불렀다)까지 가게 되었다. 대문을 밀고 들어서는데 이미 왁자한 걸 보니 그 집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 있는 게 분명했다. 아주머니들은 쉴 새 없이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는데, 손도 입만큼 부지런히 놀리며 뜨개바늘을 넣었다 뺐다 하고 있었다.

아주머니들로 가득 찬 이 소란한 방에 들어서자마자 내 코는 황홀한 향기에 사로잡혔다. 고소하고 달콤한 이국적인 향기, 바로 커피 향이었다. 당시 동네 아주머니들의 유일한 사치이자 취향이 있었다면 바로 이 미제 커피를 달달하게 타 마시는 것이었는데, 그날도 막 이 여흥을 즐기던 참이었다.

방 한쪽에는 이 아주머니들의 취향을 업그레이드시킨 '맥스웰 커피' 병이 오도카니 모셔져 있었다. 이미 몇 차례 엄마가 남겨 준 환상적인 커피 맛을 본 나는, 엄마의 커피 잔에 반쯤 남은 커피를 넘보고 있었다. 눈치챈 엄마가 무섭지 않게 눈을 흘기며 몇 모금을 허락했다. 한 모금 홀짝이자 입안으로 흘러 들어온 커피, 아 이 무슨 천상의 맛이란 말인가.

늘 이 커피의 출처가 궁금했던 나는, 홍순경 아주머니에게 이 희귀한 커피가 어디서 났느냐고 물었다. 그는 선선히 스테파니 아주머니에게 샀노라고 대답했다. 그럼 스테파니 아주머니는 커피가 어디서 났느냐고 다시 물으니 그땐 대답을 얼버무렸다. 어린 나의 호기심은 거기서 물러서지 않고 재차 추궁하기에 이르렀고, 엄마가 내 과도한 호기심이 마땅치 않았는지 째릿하는 눈으로 레이저를 쏘는 바람에 더는 캐묻지 못했다.

내 물음에 선명한 답을 하지 않던 아주머니들의 수군거림 속엔 '양색시'란 말이 섞여 있었고, 스테파니 아줌마가 그 '양색시'라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스테파니 아주머니와는 친하게 지내지 않으면서, 그가 조달하는 커피는 환호했던 아주머니들, 그리고 동네 사람들.

그 시절 스테파니 아주머니
     
잊고 있던 어릴 적 기억 한 조각이 끄집어내진 건 황경란 작가가 쓴 인터뷰 기록 <부평 미군 기지촌의 기억>을 읽고서였다. 부평에서 자랐기에 부평 어디에 미군 부대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러다 황 작가의 글을 읽다 보니 퍼뜩 마치 스위치가 탁하고 켜지듯, 어린 시절 살던 동네의 스테파니 아주머니가 떠올랐다.

미군 기지촌의 그늘이 내 유년의 한 조각에 선명히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살던 동네에서 부평역 쪽으로 가다 보면 보이던 큰 부대 정문이 바로 미군 부대였다는 것도. 그 부대가 위치한 부평 산곡동 일대가 기지촌이었고 그중 신촌이라 불린 지역은 미군이 철수하고도 한동안 집창촌으로 명맥을 이어갔다는 것도 기억해 냈다.

그 시절 스테파니 아주머니는 아마도 미군과 동거했거나 결혼한 기지촌 여성이었을 것이다. 내가 그를 기지촌 여성으로 쉽게 기억해 내지 못했던 건 아마도, 그의 표상이 기지촌 여성에게 드리워진 피해자 이미지와 확연히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스테파니 아주머니는 예쁜 딸과 잘생긴 남편이 있었고, 상당히 멋쟁이였고, 영어를 잘했고, 가난하지 않았다.

이런 그의 정체성은 가난하고 병들고 불행한 기지촌 여성이라는 이미지와 해리되어 있었고, 이런 까닭에 그는 오랫동안 기지촌 여성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유 있게 살면서, 종종 동네 사람들에게 구하기 힘든 미제 물건을 공급하고, 미군이지만 남편이 있고 자식이 있던 이른바 정상가족을 꾸리고 있던 스테파니 아주머니는 동네에서 동등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았던가.

그랬다는 기억을 찾기는 어려웠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핫한 미국 문화를 선도하고 있던 스테파니 아주머니는 왜 동네 사람들, 특히 아주머니들로부터 동료 시민으로 승인받지 못했던 것일까?

기지촌과 얽힌 이런저런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나는 지금 우연하게도 대규모 기지촌이 형성되었고 기지촌 여성들이 여전히 살고 있는 파주에 살고 있다. 몇 년 전 우연히 이제는 노인이 된 기지촌 여성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몇 분을 만나볼 수 있었다.

어릴 적 그 정체성을 알지 못했던 스테파니 아주머니와 지금 만나게 된 파주의 연로한 기지촌 노인 여성들은 기지촌 여성이라는 표상으로 쉽게 교집합이 만들어지지 않지만, 이 우연은 내게 아주 아이러니한 정동을 일으켰다.

쉽게 지운 그들, 기지촌 여성

파주에서 기지촌 노인 여성들을 만나면서 이들의 신산한 처지에 마음이 아팠다. 비무장지대(DMZ)를 가까이 두고 공식적으로는 평화를 모토로 삼고 있는 도시 파주는, 전쟁과 남성중심주의의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기지촌 여성들을 여전히 음지에 두고 있다. 이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고 부끄러웠고 책임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렇게 만나게 된 기지촌 여성이 파주의 노인들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것,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내 어린 시절에 이미 기지촌 여성이 내 인생 한 자락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발견은 놀라웠다. 문득, 다분히 혼란스러운 내 경험, 기지촌 여성을 매개해 교차되는 이런 삶의 기억은 내게만 존재하는 것일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어쩌면 언제나 우리 곁에서 숨 쉬어 왔고, 우리 삶의 어느 갈피에 선명히 꽃혀 있을 이들의 존재를, 우리는 한 번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동네 아주머니들이 스테파니 아주머니를 여느 주부와 달리 금을 긋고 그 금 너머로 건너오지 못하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파주 기지촌에 관한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한 지인의 우연 또한 기지촌 여성과 기막힌 고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부산에서 나고 자랐는데(부산 역시 기지촌이 형성되었던 도시다), 그가 어릴 적 살던 동네에도 '양공주' '양색시'라 불리던 여성들이 살고 있었고, 때론 그들 중 일부를 누나 혹은 아줌마라고 부르며 자랐다.

부산을 떠나고 한참 후에야 '양공주', '양색시'라는 멸칭의 사회적, 정치적 함의를 깨닫게 되었고, 공간에서 펼쳐지는 삶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게 되면서, 기지촌이라는 공간에 맨몸으로 던져졌던 기지촌 여성들의 소외된 삶이 자신의 삶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오더라고 했다. 그의 경험과 나의 경험처럼, 이들은 우리 삶의 어느 페이지에 분명 살아서 존재했지만, 영희나 숙자 혹은 희경처럼 이름으로 불리지 못했다. 그저 '양공주' '양색시'로 쉽게 호명되었고 또한 쉽게 지워졌다.

어릴 적 살던 마을에서 이사 가기 전, 스테파니 아주머니는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간다며 동네(한국)를 떠났다. 그는 이주 후 행복하게 살았을까? 스테파니 아주머니처럼 미군과 결혼해 아메리칸드림을 안고 미국에 입성한 많은 신부들이 모두 행복할 수는 없었다.

<영미, 지니, 윤선/양공주, 민족의 딸, 국가 폭력 피해자를 넘어서>의 한 증언자 지니의 고백에서, 알고 보니 거지와 결혼한 꼴이었다는 토로가 드러내듯, 한국보다 더 궁벽한 미국 시골로 들어가 가난하고 고된 삶을 살아야 하기도 했다. 지니는 궁핍한 생활을 견디다 못해 아리조나 깡촌 시골을 도망치듯이 귀국했지만, 마땅히 먹고 살 길이 없어 다시 기지촌으로 스며들었다.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한편, KBS 다큐멘터리 <전쟁과 여성>의 증언자 이옥순처럼 번듯한 가정을 일궈냈던 기지촌 여성도 있다. 이 다큐멘터리를 처음 볼 때는 생각해내지 못했지만, 미국으로 간 스테파니 아주머니도 그와 같은 고령이 되었을 것이다. 아주머니도 그처럼 담담히 늙어 있었으면 좋겠다. 이옥순이 다복한 일가를 이루었다고는 하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땅에서 어찌 웃음만 가득한 삶이었겠는가. 그가 일군 화목한 가정은 그의 헌신과 사랑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머니로 끝낼 수 있는 인생을 접고, 인생 말년에 자식들을 불러들여 기지촌 여성이었음을 커밍아웃했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어쩌면 수치로 남을지도 모를 과거의 아픔을 고백하는 노인의 용기와 회한은 쉽게 정의될 수 없다.

과거의 우물에 깊이 침잠시켰던 깊은 상처를 고령의 나이에 우정 끌어올려, 그때는 아이와 먹고살기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로 증언하는 깊은 슬픔을 말이다. 말하지 않으면 그대로 묻혀버릴 자신의 역사를,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깊은 상흔을, 인생 마지막 시기에 꺼내 혐오 없이, 왜곡 없이, 자식들과 사람들에게서 받아들여지고 기억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말이다.

기지촌은 경기도가 가장 많았지만, 미군이 주둔한 곳은 어디든지 전국적으로 형성되었다. 이는 적지 않은 우리의 삶 어딘가에 기지촌 여성들이 스며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삶의 기억에 그들은 그때 그 사람으로 추억되지 않는다. 기지촌이었던 파주의 마을 주민들을 만나게 되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그때가 좋았어."

나는 늘 궁금했다. 무엇이 그렇게 좋았던 것일까?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는 퇴역 군인처럼, 그들의 빛바랜 훈장처럼, 그들의 회고에는 삭제된 사람들에 대한 성찰이 깃들어있지 않다. 그래서 늘 버석해진 마음으로 묻고 싶었다. 그렇게 좋았던 그 시절, 당신과 같은 마을에 살았던 기지촌 여성을 기억하세요?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덧붙이는 글. 경기도 의회는 지난해 '경기도 기지촌 여성 지원 등에 관한 조례'를 통과시켰다. 조례 통과 후 이재명 경기도 지사는, 기지촌 여성의 피해가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여성인권침해 사례"임을 통감하며 적극적으로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후 지원에 관한 어떤 실질적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또한 대규모 기지촌이었던 파주시 역시 지난해 '기지촌 여성 지원 조례'를 통과시켰지만, 기지촌 여성에 대한 어떤 지원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 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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