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말]
*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22회 전주국제영화제 타이틀

22회 전주국제영화제 타이틀 ⓒ 전주국제영화제


01.
'1000일 이후로는 세지도 않았네.'

한 여자가 집안으로 들어온다. 속이 텅 빈 캐리어 하나와 커다란 플라스틱 상자가 손에 들려있다. 이곳 저곳 옷가지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거실. 여자는 남자와 여자의 얼굴이 사랑스럽게 그려져 있던 포스터를 먼저 뜯어내고 서랍장을 열어 자신의 것으로 보이는 가방 속에 챙겨 넣는다. 거실 한 쪽에 세워져 있던 이젤과 필기도구들은 물론, 신발장의 운동화와 구두까지 정리하는 여자. 그 집안에 있던 자신의 물건 모두를 흔적도 없이 챙길 모양새다.

다음으로 여자는 서랍장에서 나무로 된 상자를 하나 꺼낸다. 책상 위로 쏟아낸 그 상자 속에는 남자와의 기억으로 채워진 물건들이 가득하다. 함께 찍은 사진과 언젠가 봤을 공연 티켓, 주고받은 편지들까지. 아마도 여자는 그동안 서로가 함께해 온 시간들을 그 상자 속에 소중히 간직해 온 모양이다. 그 물건들을 바라보던 여자는 하나씩 집어 들고는 쓰레기 봉투에 넣는다. 큰 부피를 차지하고 있던 다이어리도 한 권 눈에 띈다. 슬픈 표정으로 종이를 넘기던 여자는 건조한 목소리로 1000일 이후로는 세지도 않았다는 말을 뱉는다.

어쩌면, 오늘은 한 커플이 이별을 맞이한 날인지도 모르겠다.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맛있는 엔딩> 스틸컷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맛있는 엔딩> 스틸컷 ⓒ 전주국제영화제

 
02.
영화는 여자가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때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바뀐다. 여자의 이름은 예니(손수현 분). 미대 입시를 위해 서울로 전학을 오면서 핸드폰 번호까지 바꾸며 오로지 대학 입학에만 몰두해 왔다. 친구들이 생각날 때도 있고, 고향집이 그리울 때도 있었지만 마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나름의 강경한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그 날도 예니는 학원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입시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던 때. 그런 그녀에게 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지금의 남자친구 상혁(신재휘 분)이다. 고향 친구였던 두 사람은 그렇게 반가운 재회를 하고, 함께 입시를 준비하게 된다.

결과는 달랐다. 혼자였던 서울 생활에 단비 같은 위안이었던 상혁 덕분일까. 예니는 학교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받게 되지만, 상혁은 그렇지 못했다.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위로와 응원을 받았던 그녀이기에 미안한 마음이 커진다. 상혁이 고향집으로 돌아가기 전날 밤, 두 사람은 아무런 말없이 동네 어귀에 있는 트럭에서 떡볶이를 먹는다. 서울에 남아야 하는 예니와 돌아가야 하는 상혁. 언제 다시 만나게 될 지 모르는 이별의 밤. 떡볶이와 함께한 밤은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침. 돌아서는 상혁의 등 뒤로 예니가 이름을 부른다. 사랑의 시작이다.

03.
다이어리를 보며 추억을 떠올리던 예니는 부엌으로 가서 요리를 시작한다. 긴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결국 이별을 맞이한 남자친구 상혁에게 마지막 선물을 하기 위해서다. 그날 밤에 먹었던 떡볶이. 물을 끓이고 재료를 다듬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상혁이 다시 서울에 올라와 함께 생활하며 사랑을 이야기했던 처음의 시간들부터 사소한 일로 부딪히고 짜증내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던 최근의 시간들까지. 그래서 이별을 맞이했을지도 모르지만, 최근의 기억들 속에는 아픈 기억밖에 없는 것 같다. 예니는 정갈하게 차린 떡볶이 한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집을 떠난다.

영화 <맛있는 엔딩>은 이제 이별을 준비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대부분 예니의 시점에서 진행되고 있기는 하나, 함께였던 긴 시간을 정리하는 과정을 그렸기 때문인지 남자친구인 상혁이 분리되어 있는 느낌은 아니다. 결코 짧지 않았던 연애, 그리고 성인이 되어 처음 감정을 공유했던 사람과의 만남에 마침표를 찍는 날에 보통은 어떤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까? 영화는 두 사람의 모습을 결코 절망적이거나 비극적으로 그려내지 않는다. 떠나는 그녀가 남자 친구에게 남기는 마지막 선물로 준비한 것이 음식. 그것도 두 사람이 가장 순수했던 순간에 함께 나눈 기억 속 음식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맛있는 엔딩> 스틸컷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맛있는 엔딩> 스틸컷 ⓒ 전주국제영화제


04.
이번 작품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은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 있는 예니와 그 음식을 선물 받게 되는 상혁에게 그 과정이 완전히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부분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예니가 집을 떠난 후에 그녀의 흔적이 모두 사라진 공허한 집에 상혁이 혼자 들어오는 장면이 이어진다. 상혁이 테이블 위에 놓인 떡볶이 한 그릇을 보고, 그녀가 남긴 마지막 음식을 맛보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음식을 만들면서 함께였던 시간을 추억하고 그 장면들을 담담히 정리해가는 듯한 예니의 모습과는 분명 조금 다른 느낌이다. 그녀에게 음식을 만드는 과정이 마지막 남은 애정을 담아 관계의 매듭을 확실히 정리하는 과정이라면, 남자에게는 남겨진 어떤 후회와 미련이 표현되는 듯한 모습. 예니가 그랬던 것처럼 상혁 역시 과거를 떠올렸겠지만, 그의 마음은 아직 정리가 채 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의 과거가 떠오른다. 상혁이 대입에 실패하고 고향으로 떠나야 했을 때, 두 사람이 헤어질 상황에 놓였을 때. 예니는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지금의 상혁은 그러지 못한 것 같지만.

영화는 두 사람이 헤어진 이유를 묻지 않는다. 둘 중 어느 한 사람에 이 이별의 무게도 지우지 않는다. 그저 사랑하던 연인이 어떤 이유로 헤어지게 되었고, 함께하던 자리를 이제 한 사람만이 남아 채우게 된 것이라 이야기한다. 좋은 일도 있었지만 그만큼 아픈 시간도 있었기에, 영화는 두 사람의 선택과 그 결과에 그저 심심한 위로를 전하고자 할 뿐이다. 떠나는 이가 남긴, 남겨진 이가 받은 떡볶이의 맛이 새삼 궁금하다. 대체 어떤 맛이기에 이 슬픈 사연의 마지막 장면에 '맛있는 엔딩'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을까.
영화 전주국제영화제 맛있는엔딩 정소영 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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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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