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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항쟁은 누구나 기억하는 민주화의 역사이지만 1991년의 투쟁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1991년의 어느 봄날,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 학생이 노태우 정권 타도, 학원자주화 투쟁 과정에서 경찰의 폭력으로 숨지자 이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이 과정에서 폭력정권을 규탄하며 모두 11명의 학생, 노동자, 시민들이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 기념사업회'는 30년 전 1991년 5월 투쟁에서 민주의 꽃이 된 열사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말]
김동석 화가가 그린 김영균 열사.
 김동석 화가가 그린 김영균 열사.
ⓒ 김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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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이 바뀌었으면 세 번이나 바뀌었을 시간이다. 한 세대가 지나 20대의 젊음은 50대 중년이 되었다. 그 세월 동안 반복되는 습관이 있다. 4월 26일은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가 백골단의 곤봉에 맞아 죽어 간 날이다. 이날부터 달력을 보며 죽어간 이름들을 되짚는다. 전남대 박승희의 분신은 4월 29일. 5월 25일 성균관대 김귀정이 강제진압으로 죽었다.

김지하 시인의 저주의 굿판. 서강대 박홍 총장의 어둠의 세력 발언. 정원식 총리의 계란 세례. 4월에서 5월, 5월에서 6월로 넘어가는 91년은 처절했고 무서웠다. 매년 4월 26일부터 죽어간 이들의 소환. 머리에 저장된 기억 때문이 아니라 가슴에 화인으로 새겨진 탓일 것이다. 
 
1991년 5월 1일 경북 안동대 학생회관앞 민주광장에서 열릴 예정인 ‘고 강경대열사 추모 및 공안통치 분쇄를 위한 범안대인 결의대회’를 앞두고 민속학과 90학번 김영균 학생이 분신하자, 주변 학생들이 급히 불을 끄고 있다. 이 사진은 집회 취재를 위해 현장에 있던 안동대신문사 기자가 촬영했다.
 1991년 5월 1일 경북 안동대 학생회관앞 민주광장에서 열릴 예정인 ‘고 강경대열사 추모 및 공안통치 분쇄를 위한 범안대인 결의대회’를 앞두고 민속학과 90학번 김영균 학생이 분신하자, 주변 학생들이 급히 불을 끄고 있다. 이 사진은 집회 취재를 위해 현장에 있던 안동대신문사 기자가 촬영했다.
ⓒ 사진제공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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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5월 1일, 나는 안동대학교 인문대 학생회장으로 강경대 타살 항의 집회 준비 중이었다. 마이크를 잡고 학우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여학생들의 찢어질 듯 비명이 들리고 사범대 쪽으로 도로에서 불덩이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게 말로만 듣던 분신이라는 걸, 휘청거리며 '공안통치 분쇄, 노태우 정권 타도'라고 외치며 쓰러진 이가 불과 몇 시간 전에 얼굴을 마주했던 후배 영균이라는 걸 한참 만에 알았다.

안동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경북대병원으로 이송되었고, 다음 날 영균이는 유언도 없이 생을 마쳤다. 시신은 가족들에게 인계되었고, 우리는 영혼만 모시고 학교로 돌아와 친구들의 머리카락을 잘라 관에 넣고 뒷산에 묘를 썼다. 그렇게 영균이는 30년을 스무살로 남았고, 스물다섯 청년이었던 나는 대학생 딸을 둔 중년이 되었다.
 
안동대 김영균 학생의 분신 소식을 알리는 속보 대자보가 대구 경북대에 붙었다.
 안동대 김영균 학생의 분신 소식을 알리는 속보 대자보가 대구 경북대에 붙었다.
ⓒ 사진제공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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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균 열사가 치료를 받고 있는 대구 경북대병원에서 안동대 동료학생들과 대구지역 대학생들이 집회를 열고 있다. 마이크를 잡고 있는 이는 당시 인문대 학생회장이던 필자의 모습이다.
 김영균 열사가 치료를 받고 있는 대구 경북대병원에서 안동대 동료학생들과 대구지역 대학생들이 집회를 열고 있다. 마이크를 잡고 있는 이는 당시 인문대 학생회장이던 필자의 모습이다.
ⓒ 사진제공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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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도 허락되지 않았던 91년 5월

영균은 1971년생, 서울 대원고를 다녔다. 고등학교 재학 시 교육 민주화를 위한 학생 소모임 '목마름'에서 활동했다. 90년 안동대학교 민속학과에 입학. 학생회 산하 '민속문화연구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지냈고, 학내 교지편집위원회 활동을 했다. 8월에는 조국통일 범민족대회 통일선봉대에 참가했고 농활에 참여했다.

91년에는 민속학과 학생회 부회장으로 선임되었고, 4월 학원자주화 투쟁 과정에서 총장실 단식 농성에 이름을 올렸다. 5월 1일 '고 강경대 열사 추모 및 공안통치 분쇄를 위한 범안동대인 결의대회' 집회에 앞선 12시 30분경 분신, 5월 2일 저녁 8시 13분 경북대 병원에서 운명했다.

추모집에 실린 스무 살 청년의 약력은 간단하다. 그러나 고등학교 재학 시 전교조 해직 교사들의 출근이 교문에서 막히자 서명을 주도하고 철야농성에 동참하며 졸업식장에서 리본을 나눠주고 참교육을 외쳤다는 건 제자의 영정 앞에 선 은사의 처절한 회고사 내용이었다.

전태일 열사를 형이라 부르고 싶다던 영균. 그는 '나의 생활이 너무도 평화롭기에 행여 당신의 존재를 망각할 때가 있을까 두렵습니다'라는 글을 모란공원 참배 후기로 남겼다. 대학 1학년 때였다. 제 몸 불살라 끔찍한 노동환경을 고발한 전태일 열사. 그를 형이라 부르고자 했던 영균이가 노동절인 5월 1일에 제 몸에 불을 붙인 건 우연일까 하는 의문이 오랫동안 남았다.
  
1990년 전대협 통일선봉대에 참여한 김영균 열사가 대구 경북대에서 열린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에서 여섯번째.
 1990년 전대협 통일선봉대에 참여한 김영균 열사가 대구 경북대에서 열린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에서 여섯번째.
ⓒ 사진제공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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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일 영균이가 운명하자 가족들과 학생들의 의견이 부딪혔다. 가족장을 하겠다는 부모님, 불을 뒤집어쓴 친구를 다시 화장할 수 없다며 영안실을 막아선 영균이 친구들. 전경들이 영안실을 치고 들어와 시신을 빼내 갈 것이라는 소식이 여러 통로로 전해졌다.

영안실 안에서 영균이 어머니가 실신하고, 화장만은 안 된다고 절규하던 여학생들도 실신을 반복했다. 그러나 가족장을 하겠다는 유가족들의 뜻을 막을 수는 없었고, 학교 뒷산에 가묘가 세워져 30년이 흘렀다. 장례를 놓고 대립했던 유가족과 학생들이 뜨거운 회한으로 손을 맞잡은 건 몇 년이 더 지나서였다.

끝이 아니었다. 6월 3일 정원식 국무총리서리가 외국어대 특강 도중 분노한 학생들의 항의 시위에 밀가루와 계란을 뒤집어쓰는 봉변을 당하자 보수언론과 김지하 시인, 박홍 총장 등은 기다렸다는 듯 학생들을 패륜 세력으로 몰아붙였다. 김기설 유서대필 조작 사건으로 학생 운동의 도덕성 먹칠에 성공한 노태우 정권의 정국 수습책은 탄압이었다.
 
'민속'이 적힌 학과 티셔츠를 입은 김영균 열사가 91년 초 교내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해 동료들과 함께 행진하고 있다.
 "민속"이 적힌 학과 티셔츠를 입은 김영균 열사가 91년 초 교내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해 동료들과 함께 행진하고 있다.
ⓒ 사진제공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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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0일 안동 시내에서 열린 '6.10 대회 및 열사정신 계승대회'에 참가했던 친구 하나가 대구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영균이가 숨지기 직전까지 병상을 지켰던 영균이 선배였다. 앞으로 닥쳐올 어마어마한 태풍의 서막과 같았던 6월 10일이었다.

"선배라는 놈이 후배들을 징역살이시켜서 되겠어? 수십 명 줄줄이 이곳으로 끌려올 거야. 이 자식아. 너란 놈은 양심도 없어? 영균이에 대해서만 확실히 이야기하면 조직사건은 아무것도 아냐!" (김영균 열사 추모자료집에서 발췌)

대구 대공분실에 끌려간 친구는 잠을 못 자고 맞아가며 22일 동안 분신의 배후를 조사받았다. 말이 조사이지 분신 배후의 강요였고, 제대로 협조하지 않으면 수십 명 잡아넣을 조직사건을 만들겠다는 협박이었다. 그러나 친구는 분신의 배후가 되기를 끝내 거부했고, 생각대로 그림을 맞추지 못한 수사 당국은 엄포처럼 '반미애국학생회'라는 이적단체를 안동대학교에서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군에 간 친구들, 방학에 집에 갔던 친구들 20여 명이 줄줄이 기무사로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나는 교수님의 차를 얻어 타고 학교를 빠져나와 시골 식당에서 이적단체 발표와 수배 명단에 오른 내 이름을 뉴스로 마주했다. 친구들은 징역을 살았고 나는 3년여를 수배자로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됐다.
 
고 김영균 열사 영결식이 1991년 5월 15일 경북 안동대에서 2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고인의 영정을 앞세운 장례 행렬이 교문을 나서고 있다.
 고 김영균 열사 영결식이 1991년 5월 15일 경북 안동대에서 2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고인의 영정을 앞세운 장례 행렬이 교문을 나서고 있다.
ⓒ 사진제공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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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해야 할 건 망각

91년 분신정국을 두고 일부 호사가들은 패배한 투쟁이라고 한다. 87년 6월항쟁 승리의 역사와 대비된 평가다. 그러나 동의하기 힘든 주장이다. 87년 6월항쟁이 오롯이 성공한 투쟁이라면 노태우 군부독재의 광폭한 공안탄압도 없었을 것이고, 강경대가 곤봉에 맞아 죽는 일도, 많은 청춘들이 제 몸 불살라 정권의 공안탄압에 맞서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해서 87년 6월항쟁은 승리의 역사, 91년 투쟁은 패배한 투쟁이라는 도식은 옳지 않다. 또 죽음들이 여전히 분신 배후, 어둠의 세력, 죽음의 굿판으로 매도되어 기록된 역사는 다시 조명해야 할 과제이지, 패배의 기억으로 남겨 둘 일도 아니다.

유서 대필의 누명을 쓴 강기훈은 24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사건의 조작 책임이 있는 김기춘, 강신욱, 곽상도 등 공안 수뇌부는 처벌받은 적도 사과한 적도 없다. 영균이 죽음에 분신 배후를 만들려는 음모와 '반미애국학생회'라는 이적단체 조작 사건은 세상에 별로 알려진 적도 없다.
 
1990년 여름 농촌봉사활동(농활)에 참여한 김영균 열사(사진 오른쪽)가 경운기를 몰며 활짝 웃고 있다.
 1990년 여름 농촌봉사활동(농활)에 참여한 김영균 열사(사진 오른쪽)가 경운기를 몰며 활짝 웃고 있다.
ⓒ 사진제공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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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11명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대척점과 민주주의의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때 나쁜 짓 했던 사람들이 아직 권력자로 행세하는 세상. 분신 정국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 역사의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외쳐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죽어가면서 외쳤던 세상은 아직 미완성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경계해야 할 건 패배의 곱씹음이 아니라 망각이다. 91년이 단지 패배한 투쟁이었다면, 세월호 진실 규명 앞에서, 2017년 겨울 광화문에서 딸아이를 앞세워 적폐청산을 외치는 힘과 용기는 얻지 못했을 것이다. 영균이가 섰던 자리. 30년을 넘어 내가 그 자리에 다시 설 수 있는 건, 91년 우리의 삶이 누구보다 치열했고 정당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모금계좌 : 농협 356-1492-0647-43 안영민(1991년 열사투쟁 기념사업회). 여러분들이 모아주신 마음은 1991년 열사들의 기록영상 제작과 30주년 종합다큐멘터리 제작에 사용됩니다. 모금에 참여해주신 분들은 종합 다큐멘터리 영화 엔딩 크래딧에 명단을 공개합니다.


태그:#분신정국, #91년5월, #김영균, #강경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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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진보는 냉철한 시민의식을 필요로 합니다. 찌라시 보다 못한 언론이 훗날 역사가 되지 않으려면 모두가 스스로의 기록자가 되어야 합니다. 글은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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