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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서울현충원에서 독립유공자를 만나는 일은 독립유공자 묘역과 무후선열제단, 임시정부요인 묘역, 국가유공자 묘역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충혼당과 부부위패판, 현충탑 위패봉안관, 심지어 장군 제1묘역에서도 독립유공자를 만날 수 있다. 앞으로 3회에 걸쳐 충혼당과 부부위패판, 현충탑 위패봉안관, 장군 제1묘역 등에 안장되어 있는 독립유공자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 기자말

현충탑은 국립서울현충원을 찾는 이들이 일정한 격식을 갖추고 추모의 예를 취하는 장소다. '시신 또는 유골' 만을 안장할 수 있던 국립묘지에 위패를 봉안할 수 있는 근거가 처음 마련된 것은 1970년 국립묘지법이 개정되면서였다.

이 탑은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67년 10월 1일 건립됐는데, 탑 앞면에는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라고, 뒷면엔 "대통령 박정희는 온 겨레의 정성을 모아 순국영령 앞에 삼가 이 탑을 바치나이다"라고 적혀 있다.

현충탑 안으로 들어가면 위패봉안관이 있다. 이곳에 순국선열 8위와 애국지사 35위 위패도 독립유공자로 구분돼 봉안됐다. 이중 김란사와 박승도, 정승종과 이석영·이호영 형제를 소개한다.
  
국립서울현충원 현충탑 안에는 위패봉안관이 있다. 이 위패봉안관에는 43위의 독립유공자 위패도 안치되어 있다. 아래 사진 제일 오른편부터 독립유공자 정승종, 김란사, 나정련의 영정이다.
▲ 위패봉안관의 독립유공자 위패 국립서울현충원 현충탑 안에는 위패봉안관이 있다. 이 위패봉안관에는 43위의 독립유공자 위패도 안치되어 있다. 아래 사진 제일 오른편부터 독립유공자 정승종, 김란사, 나정련의 영정이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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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여성' 선구자 김란사, 여성 해방의 새 장을 열다

김란사(1872~1919)의 위패는 그의 죽음 99주년에 즈음한 2018년 3월 9일 현충탑 위패봉안관(48-8-119)에 봉안됐다.

김란사는 미국 웨슬리언 대학에 유학하여 1906년 한국 여성 최초로 문학사 자격을 취득한 '신여성'이었다. 김란사는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하는 것을 보고 교육의 중요성을 자각해 24세 나이에 이화학당에서 신학문을 공부했고,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이화학당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 데 앞장섰다. 그가 지도한 학생동아리 '이문회' 회원 중엔 유관순도 있었다.

김란사는 기혼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한 여성이기도 했다. 그러나 애초 이화학당에서 입학을 거부하자, 그는 프라이(Lulu E. Frey) 교장을 찾아가 앞에서 등잔불을 직접 끄면서 "제 인생은 이렇게 밤중처럼 캄캄합니다. 저에게 빛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으시렵니까. (중략) 어머니들이 배우고 알아야 자식을 가르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해 설득했다고 한다.

김란사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이화학당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1909년 당시 <황성신문>은 여성교육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싣기도 했다.

"부인사회와 각 여학교에셔 윤정원씨와 朴(박)에스더씨와 하란사 삼씨가 외국에서 수업 귀국하여 여자교육에 종사함과 생명에 근무함을 감복하여 지난달 28일에 서궐(경희궁-인용자)에서 환영회를 개최하고 삼씨를 영접하여 예식으로 거행하였는데, 기존 역사와 순서를 보건데 우리나라 오백여 년 부인계에서 외국에 유학하여 문명한 지식으로 여자를 교육함은 초유의 미사라 여자 학업이 장차 발달됨은 가히 찬하 하겠도다." (<황성신문>, '환영회 성황'(1909. 5. 5), 현대맞춤법으로 수정)

기사에 등장하는 '하란사'가 바로 김란사인데, 미국 유학 당시 남편의 성을 묻는 질문에 하씨(인천감리서 책임자 하상기)라고 답한 것이 하란사로 불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김란사, 윤치호와 공개 설전... '교육의 목적, 순종적 며느리 기르는 것 아냐'

여성교육의 목적과 관련하여 1911년 김란사가 개화파 정치인이자 교육자였던 기독교계 인사 윤치호(1865~1945)의 글을 공개적으로 반박한 일은, 여성해방 운동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될만하다.

윤치호는 1911년 신민회 사건(105인 사건)으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는데,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해 일제의 전시 체제가 강화되자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상무이사와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조선임전보국단 고문, 귀족원 의원 등을 지내 2009년 정부공인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인물이다.

사건은 그해 7월 'The Korea Mission Field(한국선교현장)'라는 영문선교잡지에 윤치호가 기고한 'A Plea For Industrial Training(직업훈련을 위한 간청)'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가 학당에 다니는 신여성들을 비판하면서 시작됐다. 윤치호는 당시 'The Korea Mission Field'에 가장 많은 글을 기고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한국인 중 한 명이었다.

윤치호는 1910년 미국 방문 당시 목격한 미 공교육의 직업교육체계를 소개하면서 "(미국) 터스키기(Tuskegee) 학교에서는 여성들에게 방을 빗질하는 간단한 기술에서부터 여성용 모자를 만드는 정교하고 복잡한 기술까지 가르친다"고 소개했다. 이어 국내 신학교 여성 교육의 불만 사항 여섯 가지를 나열하면서 그는 "(신)여성들이 요리, 바느질, 빨래, 다림질을 할 줄 모른다"고 비판했다.

윤치호는 한 발 더 나아가 여성들이 "시어머니에게 순종적이지 않다"느니 "학당에 다니는 여성들은 그렇지 않은 여성들에 비해 육체노동을 꺼린다"느니 하는, 일종의 '여성 혐오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윤치호는 "평균적인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들"이라며 한복 만들기, 설거지, 다림질, 요리, 자수, 뜨개질, 빗질, 먼지 털기 등 열두 가지 교육과정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자 김란사는 4개월 뒤 같은 잡지 12월호에 윤치호의 견해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A Protest'(항의)라는 제목의 반박문을 기고했다.
 
김란사는 윤치호의 글 'A Plea For Industrial Training(직업훈련을 위한 간청)'에 대한 반박글을 'A Protest'(항의)란 이름으로 기고하였다. 윤치호는 "(신)여성들이 요리, 바느질, 빨래, 다림질을 할 줄 모른다, 순종적이지 않다"는 등 비판했고, 4개월 뒤 김란사는 윤치호의 견해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반박문을 기고했다. 여성 교육의 목적은, 앞서 윤치호 주장처럼 '집안일 잘하는 가정주부, 순종적인 며느리'를 기르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 김란사의 글, "A Protest" (항의) 김란사는 윤치호의 글 "A Plea For Industrial Training(직업훈련을 위한 간청)"에 대한 반박글을 "A Protest"(항의)란 이름으로 기고하였다. 윤치호는 "(신)여성들이 요리, 바느질, 빨래, 다림질을 할 줄 모른다, 순종적이지 않다"는 등 비판했고, 4개월 뒤 김란사는 윤치호의 견해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반박문을 기고했다. 여성 교육의 목적은, 앞서 윤치호 주장처럼 "집안일 잘하는 가정주부, 순종적인 며느리"를 기르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 한국기독교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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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란사는 "그가 슬프게도 정보를 잘못 알고 있거나 맹목적인 편견을 갖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고 전제한 뒤, "이화학당이나 정신여학교 졸업생들이 요리할 줄 모른다고 해서 비난 받아서는 안 되며, 옷감 재단, 바느질, 빨래, 다림질을 모르는 것에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김란사는 나아가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요리와 바느질을 잘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면서 여성 교육의 목적이 윤치호의 주장처럼 '집안일 잘하는 가정주부, 순종적인 며느리'를 기르는 데 있지 않다고 반박했다. 김란사는 윤치호가 이전의 서양 교육과 교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통적인 동양적 여성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했다.

하지만 이 논쟁은 윤치호가 신민회 사건(105인 사건)으로 같은 해 일제에 구속되는 바람에,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김란사는 제1차 세계대전 종결과 함께 국제사회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인도주의가 부상하는 것과 때를 같이해 의친왕 이강과 함께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이 계획은 취소됐다.

3.1만세운동이 벌어지자 김란사는 독자적으로 한국 독립을 국제사회에 호소할 계획을 세운다. 1919년 초 파리강화회의에 여성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북경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이마저도 1919년 3월 10일 김란사가 급작스럽게 사망하는 탓에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란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서는, 보훈처 공훈록은 감염병에 의한 사망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일제 밀정에 의한 독살'이라는 설이 아직까지도 제기되고 있다.

'하늘의 뜻' 따라 3.1 만세운동 나섰던 박승도
 
충혼탑 위패봉안관에는 박승도를 포함하여 독립유공자 43위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박승도는 '하늘의 뜻에 따라' 황해도 지역에서 3.1 만세운동에 나선 인물이었다.
▲ 충혼탑 위패봉안관 내부 모습 충혼탑 위패봉안관에는 박승도를 포함하여 독립유공자 43위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박승도는 "하늘의 뜻에 따라" 황해도 지역에서 3.1 만세운동에 나선 인물이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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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안악군 은홍면에 있는 온정리교회 집사였던 박승도(1897~1919)는 1919년 3.1혁명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제 헌병의 발포로 죽음을 당한 인물이다.

박승도는 서울 탑골공원에서 있었던 3.1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에 참여하고 귀향한 같은 동네 사람 박치간·정계로·유용원 등과 함께 3월 11일 은홍면 온정리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박승도는 유용원의 집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제작하는가 하면, 은홍·대행·서하 등 인근 면내 각 교회에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도록 연락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문제의 3월 11일, 온정리교회에 모인 수백 명 주민들은 선명학교 교장 박치간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것으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모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이라고 쓴 선두의 큰 기를 따라 시가행진을 했다. 시위대는 순식간에 1000여 명으로 불어났고, 박승도는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이끌었다.

그런데 마침 시위 대오가 헌병 주재소 앞을 지날 때, '대한독립'이라고 써 있는 시위 깃발을 빼앗으려는 일본 헌병과의 충돌이 빚어졌다. 이때 일본 헌병들이 대거 출동하여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박승도는 전인식·김학규와 함께 현장에서 순국했다.

이 사건으로 지역 주민 40명이 잡혀가 곤욕을 치렀는데, 박승도를 비롯하여 만세운동에 참석했던 은홍면 주민들이 당시 어떤 심정이었는지 보여주는 재판기록이 남아 있다. 다음은 박승도와 같은 동네에 살던 박영준이 낸 항소이유서의 한 대목이다.
 
"일·한 합병 이후 조선독립사상이 절실하였는데, 천운이 순환해 감이(감히) 다시 되돌아가지 않고, 하늘이 조선에도 독립의 기회를 주었다. 나도 하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 군중에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호창하였는데, ……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처해졌다. 호사다마라 했지만 국가의 독립은 대사(大事)인지라 어찌 마가 낄 것인가." (국가기록원, '대정8년 형상 제666호')


박승도를 비롯한 은홍면 사람들은 '하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3.1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것이다.

이들은, 서정주가 산문시를 통해 "'이것은 하늘이 이 겨레에게 주는 팔자다' 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익히며 살아가려 했던 것이니/ 여기 적당한 말이려면/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 같은 것도 괜찮을 듯하다"(서정주,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고 자신의 친일 행위를 변명하면서 근거로 들먹인 '하늘의 뜻'과는 전혀 다른 '하늘의 뜻'을 따르고 있었던 셈이다.

<정감록>에 근거해 일제 패망을 예측한 정승종 
   
한강철교는 1900년에 처음 개통되었는데, 노량진에 살던 독립운동가 정승종은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1945년 3월 한강철교를 폭파하여 일제의 교통을 마비시키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앞에 보이는 다리는 한강대교이고, 가운데 보이는 다리가 한강철교다.
▲ 정승종이 폭파하려고 했던 한강철교의 현재 모습 한강철교는 1900년에 처음 개통되었는데, 노량진에 살던 독립운동가 정승종은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1945년 3월 한강철교를 폭파하여 일제의 교통을 마비시키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앞에 보이는 다리는 한강대교이고, 가운데 보이는 다리가 한강철교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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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정승종(1917~1981)은 1944년 <정감록>에 근거해 일제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을 예측하고 이를 준비한 인물이었다.

"미국군에는 반도인이 참가하고 있어서 미국은 일본이 패배하는 그날 조선을 독립시킬 것이고, 또 <정감록>에 의하면 소화 20년(1945년-인용자) 3월에 일본은 패전하고, 경상도의 깊은 산속에서 왕이 나타나 조선은 독립한다." (국가기록원, '소화20년 형공 제1172호')

정승종이 '1945년 3월 일제 패망'을 예견한 근거로 18세기 영·정조 시대 이래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던 사람들이 비밀리에 돌려보던 예언서인 <정감록>을 들고 있는 대목이 흥미롭다. 실제로 정승종의 경우만이 아니라 1940년대 <정감록>을 돌려보며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다 일제에 연행되는 사례가 여럿 확인된다.

일제의 패망을 확신한 정승종은 조선인으로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고민했고, 그 결과로 얻은 결론을 대담하게 실행에 옮기고자 했다.

"우리들이 무기 없이 조선의 독립을 실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우선 교통상 중요한 철교의 파괴가 최상의 방법이다. 미국군대가 조선에 상륙해 우리들에게 무기를 주면 활동이 가능하므로 상륙의 시기를 기다릴 때까지 동지를 모아 철교를 파괴해야 한다." (국가기록원, '소화20년 형공 제1172호').

노량진에 살던 정승종은 한강철교 폭파를 위해 동지 규합에 나섰다. 당시 정승종은 용산에 있던 조선총독부 교통국 경성공장에서 선반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마침 평소 알고 지내던 같은 공장 노동자 풍전부환(일본의 창씨개명 강요에 따른 이름)을 1944년 9월 두 차례 만나 넌지시 자신의 생각을 밝히면서 동지 규합에 나섰다.

하지만 정승종의 '담대한 계획'은 끝내 성사되지 못한다. 반년쯤 뒤인 1945년 3월, 일제에 그만 발각되고 만 탓이다. 정승종의 계획이 어느 시점에서 중단됐는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국체변혁을 목적으로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했다"고 명시한 점을 볼 때 한강철교 파괴를 위한 작업이 꽤 진척됐던 것으로 보인다.

정승종은 1945년 5월 25일 징역 2년형에 처해지지만, 자신의 예견보다 5개월이 늦은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함께 감옥을 나와 감격스러운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다.

6형제 독립운동가, 이석영과 이호영
 
남산 옛 중앙정보부터 6국 자리에 조성 중에 있는 이회영 기념관 입구에 6형제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왼쪽에서부터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의 모습이다.
▲ 이석영-이호영과 그 형제들 남산 옛 중앙정보부터 6국 자리에 조성 중에 있는 이회영 기념관 입구에 6형제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왼쪽에서부터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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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영(1855~1934)과 이호영(1885~1933) 형제의 위패는 현충탑봉안관(48-8-133과 48-8-134)에 나란히 봉안돼 있다. 이항복의 10대손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표적 명문가의 6형제(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 중 둘째와 여섯째다.

일찍이 후손이 없던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갔던 이석영은, 상속받은 만여 석의 재산과 토지, 가옥 등을 팔아 현재 가치로 2조 원에 이르는 금액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했다. 1910년 12월 온 집안이 함께 만주로 망명해서는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군관학교 설립 계획에 따라 신흥(무관)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가 양성에 주력했다. 이들이 배출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은 1920년까지 3500여 명에 달했다.

6형제 중 막내 이호영은 1910년 12월 이석영, 이회영 등 전 가족과 함께 만주 유하현으로 이주해 신흥무관학교에서 재무를 담당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헌신했다. 북경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긴 1924년에는 북경한교동지회를 조직했고, 1925년에는 친일파 처단을 목적으로 조직된 다물단 단원으로 재정과 무기를 지원하는 활동으로 밀정 김달하 처단에도 관여했다.

막내 이호영은 1930년 병든 형 이석영을 모시고 국내로 들어왔다가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였는데, 이호영은 1933년 말 북경에서 별세했고, 이석영은 다음 해 2월에 상하이에서 별세했다. 특히 가슴 아픈 대목은, 앞서 엄청난 규모의 재산을 독립군 양성을 위한 자금으로 내놨던 이석영이 말년에는 여든의 노구를 이끌고 상하이의 빈민가를 전전하며 콩비지로 삶을 연명하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이석영이 살던 경기 남양주시는 2021년 1월부터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을 개관·운영하고 있으며, 2월 16일에는 이곳에서 87년 만에야 처음으로 이석영 추모행사를 거행하였다.

이석영과 이호영보다 먼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이회영의 묘는 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시영의 묘는 서울 강북구 수유동 북한산자락에 있다.

태그:#국립서울현충원, #현충탑 위패봉안관, #이석영, #정승종, #박승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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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현충원 역사산책>(2022),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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