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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에 모여 편하게 술을 마신 게 언제인지 모를 정도로 추억이 되어 버렸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금지의 심리가 있어서인지 술을 마시고 싶은 욕망은 커져만 간다. 하지만 코로나19 지침을 지켜야 하기에 이 욕망은 코로나19 종식 이후로 미룰 수밖에 없다.

사실 우리나라만큼 술을 마시기 편한 나라도 없을 것이다. 특정 나이를 지나면 편의점에서는 24시간 술을 구매할 수 있다. 술을 마시고자 하면 24시간 운영하는 해장국 집 또는 다양한 술집도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는 최근에 만들어진 문화는 아니다. 과거 우리는 퇴근 후 또는 집에서 반주 한잔으로 일상생활의 피곤함을 풀어왔다. 내외술집, 목로술집, 모주집 등 다양한 술집이 그러했다. 이러한 술집은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대표적인 것이 주막일 것이다. 주막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한국 사극 등에서 묘사되는 형태의 주막은 조선 중기 이후의 것이다.
   
구한말 주막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의 사진엽서
▲ 주막에서 술 마시는 사람 구한말 주막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의 사진엽서
ⓒ 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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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갑의 "조선후기의 사회변동과 지배층의 동향"에 따르면 17~18세기 조선사회는 농업기술의 향상과 함께 상품화폐 경제가 확대되면서 자급경제가 조금씩 무너지고, 경제적 능력을 갖춘 상인과 중인이 등장한다. 특히, 농민층 신분질서의 붕괴와 함께 중세 봉건성이 해체되면서 한양의 도시 구조도 변모하게 된다.

한양의 변화는 인구의 급속한 증가에서 엿볼 수 있다. 한성부 통계에 따르면, 한양 인구는 1657년(효종 8) 8만 572명에서 1669년(현종 10) 19만 4030명으로 급증한다. 하지만 한양의 실제 거주 인구는 3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10만 명의 거주 인구를 예상하고 건설한 도시에 그 세 배에 달하는 인구가 집중됨으로써 도시 공간이 도성 밖으로 확대된다. 결국 도성 밖 인구의 비중이 대폭 증가하여 많은 사람이 해상 교통의 중심이었던 한강변의 마포·서강 등지에 거주하게 된다. 이 지역은 중요한 상업 중심지로 변모하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울의 술집'에 따르면, 상업 중심지로 변모한 한양에 많은 사람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술집이 번창했다. 특히, '군칠이집'라는 술집에는 평양과 개성의 다양한 음식이 메뉴로 등장한다. '군칠이집'라는 술집이 한양에서 얼마나 유명했는지 시인 서명인(徐命寅, 1725~1802)의 <취사당연화록(取斯堂烟華錄)>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밤새 군칠이집에 술을 담갔다더군"이라는 내용과 함께 "여자 군칠(君七)과 남자 군칠이 있는데 모두들 큰 술집(酒家)으로 서울에서 명성이 자자했다"라고 부연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군칠이집'은 우리가 방송에서 보는 작은 주막이 아니라 술을 많이 빚는 술집 가운데 첫 번째로 유명한 곳이었다. 

한양에는 '군칠이집'과 유사한 술집이 서로의 술과 음식을 차별화시키고 경쟁하면서 번창하게 된다. 몇몇 기록을 통해 당시의 정황을 짐작해볼 수 있다. 정조대 후반에 형조판서등을 역임한 이면승(李勉昇, 1766~1835)은 술 제조의 금지에 관한 글인 <금양의(禁釀議)>에서 한양성 전체 인구의 10~20%가 술집에 종사하거나 연관되어 있다고 했다. 또한 당시의 한양 술집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중략)....양조하는 곳은 경성(京城)이 가장 많습니다. 지금은 골목이고 거리고 술집 깃발이 서로 이어져 거의 집집마다 주모요 가가호호 술집입니다. 그러니 쌀과 밀가루의 비용이 날마다 만 냥 단위로 헤아리고, 푸줏간과 어시장의 고깃덩어리와 진귀한 물고기, 기름과 장, 김치와 채소 등 입에 맞고 배를 채울 먹을거리의 절반이 아침저녁의 술안주로 운반해 보냅니다. ...(중략)

한양의 술집을 묘사하는 공통적인 특징 하나가 술집에 주등(酒燈)이 있다는 점이다. 한양에서는 깃발보다는 등으로 술을 파는 곳임을 표시하였다. 1743년(영조 10년)의 상소문에서도 이러한 이야기가 적혀있다.
 
술집마다 술빚는 량이 거의 백석에 이르고, 주막 앞에 걸린 주등(酒燈)이 대궐 지척까지 퍼져 있을 뿐 아니라, 돈벌이가 좋아 많은 사람이 술집에 매달린다며 양조(釀造)의 병폐를 보고한다.
   
18세기 한양은 대궐 안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면 술집 주등(酒燈)이 많이 보이는 술의 도시였다. 조선후기 실학자인 성호(星湖) 이익(李瀷) 역시 <성호사설>(1760 편찬)에서 한양 큰 거리의 상점 가운데 절반이 술집임을 지적하였으며 술집은 한양 어디를 가든 마주치게 되는 풍경의 하나였다. 

이러한 술의 과잉 소비로 인해 양조용 쌀이 너무 소진되어 쌀값이 뛰고 덩달아 물가도 올랐다. 결국, 영조는 수시로 금주령을 내렸지만 음주 문화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구한말로 추측되는 술 마시는 사진
▲ 술마시는 사진 구한말로 추측되는 술 마시는 사진
ⓒ 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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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의 술집 수를 보면 당시 한양 절반이 술집이라는 상황과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과거 우리의 음주 문화가 폭탄주와 원샷을 강요하는 문화였다면 최근에는 혼술, 홈술 등의 즐기는 음주 문화로 변화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에는 또 다른 음주 문화가 생겨 날것이다. 술집에서의 음주 모습은 달라지더라고 술을 즐기는 의미는 변화가 없을 것이다. 코로나19가 종식되는 날 술집에서의 모임을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 중복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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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주 연구를 하는 농업연구사/ 경기도농업기술원 근무 / 15년 전통주 연구로 미래창조과학부 과학기술 진흥 대통령상 및 16년 행정자치부 "전통주의 달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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