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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으로 세상에 균열을 일으키는 여성들이 있다. 당연한 틀을 갈라지고 터지게 만든 그들의 용기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편집자말]
균열, 거북의 등에 있는 무늬처럼 갈라져 터진다는 말이다. 당연하게 지켜지는 세상의 '법칙' 또한 거북 등딱지처럼 단단하기 그지없다. 그런 법칙에 어떻게 균열이 생기는지 잘 설명해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고통에 쓰러지지 않고,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피해를 드러내고 끝내 지는 경우에도 가장 끝까지 싸워낸 여성들의 이야기다. 여성들의 싸움은 돌을 굴려 산 정상에 올려놔도 내일 다시 또 굴리기를 반복해야 하는 시지프스의 절망과는 다른 것이다."
 
 김수정 변호사.
 김수정 변호사.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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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정 변호사가 쓴 <아주 오래된 유죄>에 나오는 글이다. 남자 사람의 눈에는 낯설만한 고통이 그의 말대로 책에는 가득했다. 20여 년 전 지하철 화장실에서 마주쳤던 그놈의 두 눈 때문에 아직도 지하철 화장실에 잘 가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낯설었다. 성관계 동영상을 유포한 그 놈의 목소리만 들리는 그 영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심으로 정성을 다하던 그녀의 얼굴"을 보며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는 확실히, 기사 몇 줄로는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용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사상 처음으로 미군 기지촌 위안부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했던 '박 언니', 깡패를 동원해 법정에서 아이를 납치하기까지 했던 전 남편에 맞서 싸웠던 어느 이주 여성, 그리고 호주제 위헌소송을 처음으로 제기했던 어느 부부의 이야기 등은 김 변호사의 표현대로 시지프스의 절망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들이 굴린 바위는 여성 인권 발전의 역사 그 자체였다.

최말자님 더 기분 나쁘게 한 궁서체 결정문

그 역사의 목격자이자 당사자가 김 변호사다.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는 일이지만, 법정에서는 당연한 듯 '소수 의견'으로 치부됐던 그와 같은 싸움에 김 변호사는 무려 20여 년을 함께 해 왔다. 세상의 법칙을 상징하는 헌법재판소에서 호주제와 낙태죄 폐지를 주장했고, '나의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 옆에서 그에 대한 처벌이 위헌이라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그의 말대로 "변호사가 평생 한 번 할까 말까 한 일"이었지만, 13일 법무법인 지향 사무실에서 만난 김 변호사는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고 했다. "함께 연대해서 싸운 오랜 세월이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에 점을 찍을 수 있었던 것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런 말을 들으며 더 의아했다. 66년 간 존재했던 낙태죄 조항은 2019년 위헌 결정으로 사라졌고, 22년이나 국회에 묶여 있던 스토킹처벌법도 최근 국회를 통과했다. 이렇듯 여러 차례 의미 있는 점이 찍히는 것 같은 상황인데도, 김 변호사는 앞서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여성 인권이 크게 개선됐다는 것은 일종의 착시라고 했다. 그 이유를 좀 더 자세히 듣기 위해 우리는 '56년만의 미투 사건'으로 잘 알려진 최말자씨 근황부터 물었다. 김 변호사는 최씨의 변호인이다. 앞서 법원은 성폭력에 저항하다 가해자의 혀를 일부 절단했다는 이유로 받은 처벌에 대한 최씨의 재심 청구를 기각한 바 있다.

"최 할머니는 정말 강인하고 똑똑하신 분이세요. 그 연세에 방송통신대학교 진학하고 그러면서 평생 맺혔던 이야기를 꺼내 여기까지 오신 거거든요? 본인을 위해서도, 앞으로 여성들을 위해서도 의미 있다고 생각하셔서, '끝까지 해보고 싶다. 대법원까지 갈 거다'라고 하세요. 씩씩하게 잘 계세요."
 
 김수정 변호사.
 김수정 변호사.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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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재판부가 기각 이유를 밝히면서도 "오늘날과 같이 성별간 평등이 우리 사회가 지향할 주요 가치로 실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면 청구인을 감옥에 보내거나 가해자로 낙인찍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는데요. 
"오히려 그걸 기분 나빠하시더라고요. '아니면 아니지, 이게 뭐냐'. (판사님도) 안타까워하셨을 것 같긴 해요. 그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논리로 기각하면서 피해자를 위로하는 듯한 글을 궁서체 형태로 남겼다는 게 오히려 좀 그랬어요. 옛날 판결문 보면 최말자님 처녀 여부를 감정한다거나, 가해자와의 결혼 의사를 묻는다거나, 그런 내용이 막 나오거든요? 직권 남용이 있는 위법한 재판이었다는 게 저희 주장이었는데, 당시 시대 상황상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 위법한 재판이라 할 수 없다는 식으로 기각했어요. 1960년대에도 헌법이 있었고, 양성 평등 다 명시돼 있었거든요? 법관은 법에 따라 판단해야 하는데, 엉뚱하게 시대가 왜 나오냐는 거죠. 헌법이 나와야지."

"여성인권, 얼마든지 역주행 가능"

- 여성에 대한 폭력 자체가 별로 알려지지 않던 그 때에 비하면?
"이제는 말할 수 있게 되었으니 신음이 더 들리는 거 아니냐... 아니죠. 그건 양적 변화죠. 그나마 알려지는, 그 내용들 보세요. 변화가 있었다고 할 수 있느냐, 그거 갖고 변했다고 하면 다 덮어야죠. 저 같은 경우는 훨씬 더 많은 일들을 보고 듣고 접하거든요. 사건이 충격적이거나 가해자가 높은 사람이라거나 이런 것들 언론을 통해 나오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훨씬 많고, 더 중한 일도 많다는 거죠. 그리고, 너무 고통스러운 사건들, 조주빈 같은 너무 극악무도한 사건들이 벌어지다 보니까, 그런 사건을 강력하게 처벌하면 뭔가 많이 나아진 것 같은 착시를 주지만, 우리 일상에서의 변화가 그 착시만큼 변화되고 있느냐, 아니란 거죠."

- 여성 인권의 질적인 변화를 못 느낀다고 하셨어요. 
"양적인 변화는 많이 있었죠. 호주제도 폐지됐고, 낙태죄도 폐지됐고, 법과 제도는 뭔가 바뀐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그냥 지표만 봐도 유리 천장이 깨진 것도 아니고, 임금 격차만 봐도 그렇고, 여성들이 더 비정규직화 돼 있잖아요. 임금을 똑같이 받는 여성이 더 늘어났다는 그 곳에서마저도 성차별, 성범죄에 시달리고 있어요. 여성들의 신음 소리가 계속, 너무 많이 들려요. 그리고, 의식의 전환이 양적 변화를 못 따라가는 것 같아요. 이런 변화를 같이 잘 살아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박탈감을 여성이 원인인 양 치환하는 경우가 여전히 많죠." 

- 여성 인권의 문제는 사실 남녀가 싸울 문제는 아니잖아요?
"전혀 아니죠. 누구의 파이를 뺏는 문제가 아니니까. 가장 손쉬운 지배 방식이 피지배층을 분열해서 통치하는 거잖아요. 사회 전체적으로 분배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에 박탈감이 생기는 것이지, 파이가 요만큼 있는데 이걸 여성이 뺏어갔다? 그런 문제는 아니잖아요."

- 그동안 성평등 교육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하셨어요. 그에 대한 현 정부의 의지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손놓고 있지 않나요? 성평등 교육 표준안 아직 못 만들고 있잖아요. 심지어 속옷 색깔을 규제한다든지, 목선이 드러나 야해 보인다는 이유로 포니테일로 묶지 말라든지, 성적인 시선으로 여학생들을 통제하는 것이 여전한 걸 보면 기대를 접어야 하지 않나... 물론 일선에서 제대로 교육하는 선생님도 계시지만, 그거야 한 사람한테 기대할 수 있는 거고, 제도를 설계하거나 만드는 사람들이 너무 못한다는 거죠. 안타까워요."

- '이명박근혜' 정권 당시 역주행이란 말을 많이 썼습니다. 정치적 변화와 맞물려 여성 인권도 후퇴할 수 있다고 보는데요.
"예, 얼마든지 역주행할 수 있죠. 입법이 어떻게 되느냐가 그래서 중요하죠. 낙태죄도 헌법 불합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여성을 옥죄는 방식의 입법도 충분히 가능해요. 조금은 합법화시키고 더 통제하는 방식으로 갈 수 있다는 거죠. 너무너무 역주행이 가능하죠. 민주당이 잡아서 덜 역주행하고, 국민의힘이 잡으면 더 역주행한다? 잘 모르겠어요. 정치적인 건 더 묻지 말아주세요(웃음)."

"재판 과정에서 너무 다쳐요, 여전히."
 
"요즘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고 있으면 책의 후기로 이 말 외에 아무것도 쓸 수가 없다. 여성을 위한 변론은 끝나지 않았다." <아주 오래된 유죄>의 마지막 문장
 
 김수정 변호사.
 김수정 변호사.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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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에서 가정폭력을 대표적 암수범죄라고 하셨어요. 
"성폭력도 지금 그렇게 많이 보도되고 있지만, 여전히 신고 비율 높지 않아요. 얘기하면 자기만 더 죽일 X 되는 상황이 많고, 또 무서워서 신고 못 하는 분들 진짜 많아요. 상담하면서 저도 '이거 다 감당하실 수 있겠냐' 얘기해요. 포기하는 분 많아요. 가해자한테 상처받은 것보다 재판 과정에서 너무 다쳐서 그것 때문에 치료받기도 해요. 재판 감정 분석 과정에서 피해자가 매우 자유분방한 여성인 것처럼 막 묘사하고, 2차 가해죠. 그런 가해가 전문가 감정이라는 명목으로 이뤄지고 있어요. 재판 과정에서 너무 다쳐요, 여전히. 권력자를 고발한 피해자만 다치는 게 아니에요."

- 그럼에도 법정에 서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너무너무 고마운 게, 변호사는 사건을 (재판정에) 들고 가는 사람이에요. 의뢰인이 없으면 그럴 수가 없어요. 판사든, 검사든, 변호사든, 싸워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래서 결국 의뢰인들은 스스로를 구하려고 법정에 서지만, 세상도 구하는 역할을 하시는 분들인 거죠. 유명한 사건이든 아니든, 법정에서 졌든 이겼든, 그게 쌓이고 쌓여서 조금씩 끌고 가는 거거든요? 정말 고맙죠."

- 지금 약간 울컥하신 것 같아요.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어서요."

- 어떤 분이 떠오르시나요?
"잘 된 사건도 있었지만... 잘, 끝까지 못 도와드렸던 분들이 떠올라요. 남편과의 이혼 소송 재판 중에 남자 친구에게 살해당하신 그 분, 사실 끝까지 못 도와드린 거거든요. 그 분 생각 많이 나고, 성회롱으로 자살했던 공무원, 그 분도 생각나고..."

- 책을 보니까 눈물 흘리셨던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요.
"변호사가 너무 지나치게 감정이입해서 균형을 잃는 걸 경계하는데도, 재판하다 보면 울컥할 때가 자꾸 생기더라고요. 그렇게 안 하려고 노력하는데, 최말자 할머니 재심 마지막 변론하러 갔을 때도 그랬고. 글(사건 기록)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보면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솔직히 '나 같으면 이거 묻었어' 생각하고 싶을 때도 많아요. 못해요.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에요. 너무너무 힘들어요"

- 사건을 들고 법정으로 가셨을 때 연대의 힘을 많이 느끼신다고 했는데요.
"같이 했던 동료 변호사들, 활동가분들이 큰 힘이죠. 그리고 저희 (법무법인) 지향 동료들이 진짜 큰 힘이에요. 힘들거나 이럴 때도 정서적으로도 많이 의지해요. 만약 (동료 변호사들이) 없었으면 제가 계속 뭔가 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저에게는 큰 지지죠. 책에 있는 사건 중 혼자 한 사건은 손에 꼽고, 다 같이 공동변호하고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해서 했던 사건들이 대부분이거든요? 제가 잘 한 게 아니라 같이 연대해서 싸운 오랜 세월이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에 점을 찍을 수 있었던 거죠."

- 혹시, 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신 적은 없나요?
"없어요, 한 번도. 이렇게 뭔가 계속 들고 가는 사람이 있어야 판사가 판단을 할 수 있거든요. 새롭게 판결을 할 수 있도록 계속 싸워야죠." 

독립편집부 = 이주연·이정환 기자 facebook.com/ohmy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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