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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간 드라마를 잘 보지 않고 있다. 장르의 편식이 매우 심해서 특화된 미스터리 스릴러물이나, 보고 있노라면 심연의 어딘가를 툭 건드리며 회를 거듭할수록 마음을 돌아보게 만드는 드라마만 선호하기 때문이다. "대체 요즘 드라마는 볼 게 없어, 뭘 보란 말이야!"라고 혼자 툴툴 대기도 한다.

이런 내게 봄바람처럼 훈훈하고도 슴슴한 맛을 지닌 드라마 하나가 제 발로 찾아왔다.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만들었다는 <나빌레라>다. 원작 웹툰을 한번도 본 적이 없기에, 어느 정도의 파급력을 지녔는지도 드라마를 보기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러니 애초 이 드라마에 대한 그 어떤 기대도 없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단지 하나, 요즘 같은 드라마 제작 환경에서 이런 잔잔한 스토리를 가지고 시청자들의 월요일, 화요일 밤을 공략해보겠다는 제작진의 배포가 맘에 들긴 했다. 내가 뭐라고, 하나의 미미한 나뭇잎 같은 시청자일 뿐이면서.

"죽기 전에 한 번은 날아오르고 싶어서"
 
나빌레라의 한 장면. 너무?딱?맞는 옷을 입은 듯한 배역에의 몰입부터가 마음에 와 닿았다.
 나빌레라의 한 장면. 너무?딱?맞는 옷을 입은 듯한 배역에의 몰입부터가 마음에 와 닿았다.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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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드라마를 처음 본 날, 나는 박인환씨가 연기하는 '심덕출 할아버지'에 푹 빠져 버렸다. 아니, 칠순의 할아버지가 이렇게 사랑스럽고 (죄송한 말이지만) 이토록 귀여우셔도 되냐고! 굳이 연기 경력을 들추지 않더라도 너무 딱 맞는 옷을 입은 듯한 배역에의 몰입부터가 마음에 와 닿았다.

급기야 4회까지 보고 나서 나는 박인환씨를 모델로 원작자가 심덕출이란 인물을 창조하지 않았을까 하는, 나름의 합리적 의구심마저 들었다. 그만큼 화면 속의 심덕출은 생생히 살아 있으면서도 캐릭터의 본질을 쉬 훼손하지 않은 정돈된 모습의 인물이었다.

이런 열연 덕에 '사제간의 동반성장' 같은 드라마의 목적과 주제는 이미 몇 회 만에 달성된 듯 보였다. 적어도 내게는. 배우들의 열연과 드라마의 주제의식 이런 것을 구구절절 얘기하고픈 것은 아니다. 이 드라마 <나빌레라>가 유독 내게 특별히 다가온 이유는 오로지 덕출 할아버지가 가슴으로 내뱉는 한 마디 말 때문이었다.

"나도 죽기 전에 한 번은 날아오르고 싶어서..."

아... 날아오르고 싶다는 열망, 그 간절했던 소망을 오래 잊고 살았기 때문이다. 내게도 그런 끓어오르는 열정이 있었는데, 30년 전쯤에는 말이다. 꿈이란 모름지기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색이나 형태를 달리할 수도 있는 것이고, 때론 품었던 꿈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릴 수도 있음이다... 는 개뿔! 꿈은 제법 단단한 형상을 지닌 채로 내 주위를 맴돌면서, 이제나 저제나 나의 재간택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데 왜 나는 짐짓 외면했던 것일까.

서머싯 모옴의 <달과 6펜스>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가 불현듯 떠오른다. 그토록 원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찰스, 가족도 주변 인물도 사회의 평판 따위도 중요하지 않게 된 그 어느 날, 홀연히 회사를 그만둬 버렸지 않은가.

나도 회사 생활 중 바로 그 찰스가 되고 싶었던 적이 기억나는 것만 해도 열 번 이상은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 결심은 아직 대학 등록금이 필요한 동생의 상황 앞에서, 가족의 생활비를 당분간 책임져야 하는 '소녀 가장'이라는 타이틀 아래에서 번번이 무너져 버렸다.

새벽에 일찍 눈을 떠 아침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한 채 프리랜서로 일하던 방송국에 그날 원고를 전달하고 늦기 전에 서둘러 회사로 출근하는 일상을 4년 이상 이어갔었다. 요즘 같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던 일들이었는데, 그때는 어떻게 그게 가능했었는지 모르겠다.

매일이 피곤했고, 저녁쯤엔 늘상 내일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왜 가난한 집안의 중간 자리로 태어나 이런 고초를 겪으면서 하고 싶지 않은 일에 얽매인 월급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는지, 눈을 뜨고 있는 동안에는 그저 회한만 가득할 뿐이었으니.

대학을 졸업할 무렵 담당 교수님은 내게 대학원 진학을 권했다. 뒤늦게 흥미를 갖게 된 전공 공부를 어떻게든 이어가고 싶은 맘이 내게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평범하고도 실현 가능했던 꿈조차 그 당시 우리 가족에겐 사치로 여겨졌었던 거 같다. 혼자의 몸으로 삼남매를 대학까지 진학시킨 엄마의 수고로움은 나의 꿈을 덮기에 충분했으니까.

공부를 계속해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싶은 마음, 틈틈이 시를 써 시인으로 등단하는 그림은 회색의 현실로 덧칠되더니, 금융기관의 새내기 사원으로 창구에 앉는 순간 철문이 굳게 닫힌 것처럼 어떤 시공간에 감금돼 버린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삶의 꼬리를 물고 길게 길게 이어져왔고, 문득문득 뒤를 돌아보면 아득했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손톱만한 기대조차 들지 않을 만큼.

내 꿈을 향해 나도 날아오르겠습니다
 
tvN <나빌레라> 한 장면.
 tvN <나빌레라> 한 장면.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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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한 번은 날아오르고 싶다는 덕출씨. 정말 마음이 진하게 원하는 인생을 깨닫는다는 건 얼마나 두근거리는 일인지. 깊게 패인 주름으로 활짝 웃는 웃음은 물론, 굽은 등에서조차 그 두근거림의 희열이 느껴질 정도다.

화면 속의 덕출씨는 또 한 명의 주인공 '채록'의 몸짓을 보고 잊었던 본인의 꿈을 되살린다. 채록의 발레를 접한 순간, 꿈이 있던 곳으로 시간과 공간을 이동하는 경험을 한다. 드디어 그의 삶을 불태울 수 있는 기폭제를 만난 것이다.

그는 저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열망을 그대로 꺼내 서툴지만 단단한 날갯짓을 해보기로 한다. 타인이 보기엔 무모하고 허황된 결심일 수 있겠으나 그의 맘이 내 맘 같아 이렇게 행복한 결정을 할 수 있는 용기에 그저 감탄하고, 성심을 다해 큰 박수를 보내주고 있다.

잠시 미국행을 꿈꾼 적도 있었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장을 과감히 그만둔 시절이 내게도 있었던 거다. 매일매일 어깨를 찍어 누르는 삶의 무게에서 달아나 하고 싶은 공부, 그걸 맘껏 해보고 싶은 욕망이 내 마음에 똬리를 틀고 있었음을 깨닫는데,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는 않았다. 물론 또 다른 이유로 미국행이 좌절된 것도 순식간이었지만.

덕출 할아버지의 뒤늦은 날갯짓에 내 꺾였던 꿈을 살포시 얹어도 될까. 읽고 쓰는 일, 자꾸 잊어버려 슬퍼지지만 새로운 것들을 배우며 익히는 일. 포기하지 않으려 애써도 될는지. 드라마를 보기 시작하면서 내 꿈으로 향해 나 있던 문도, 이렇게 동시에 열려 버렸다.

나는 지난 수십 년간, 왜 내 귀한 꿈을 술자리에서 먹다 남은 마른 안주 취급을 했을까. 버리긴 아깝지만 그렇다고 온 열심을 다해 아껴주지도 않을 그런, 한때는 그 달콤함과 신선함에 감탄하며 분명 마음의 한쪽을 그 꿈의 크기로 몽땅 채워 넣는 상상도 했으면서 말이다.

꿈이란 꾸는 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꿈을 다듬고 키우며 날개로 달아, 날아오를 준비를 하는 자의 것이다. 품기만 하고 보살피지 않은 채 방치해둔 꿈은 이미 꿈으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린 셈이지 않은가. 모든 걸 차치하고 과정과 결과가 어떻든 그런 결정은 쉬 내려지는 게 아니니까.

크고 멋진 나비가 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백과사전으로도 명명할 수 없는 무명의 초라한 나비일지라도 날갯짓의 시작으로 창공을 가르는 환희는 충분히 느낄 수 있을 테니. 

다시금 생각해보면 날개는 누가 꺾은 것이 아니고, 내가 접어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왜 멍청하게도 여태껏 남 탓, 환경이나 상황 탓만 하고 있었던 거였는지. 어쩌면 다시 펴보지 않았을 내 날개는 낡고 깃털이 빠진 채로라도 세상을 향한 날갯짓을 할 수 있게 됐다. <나빌레라>의 심덕출씨 덕분이다.

추락이 무서워 비상조차 해보지 않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또 있겠나. 그의 날아오름이 어쩌면 미완성으로 그친다 할지라도 오직 날아오르기 위해 몸의 온 힘을 모아 꼿꼿이 하늘을 향하는 시도, 그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것들을 이루었음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브런치 brunch.co.kr/@ggotdul에도 실려 있습니디.


태그:#꿈, #희망, #나빌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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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음악방송작가로 오랜시간 글을 썼습니다.방송글을 모아 독립출간 했고, 아포리즘과 시, 음악, 영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에 눈과 귀를 활짝 열어두는 것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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