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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용광로 같은 도시, 제네바

제네바에는 국제기구나 다국적 기업의 본사가 많다. 또한 유학생, 난민, 망명자도 많아서 다양한 언어가 사용된다. 아이 학교의 조사 결과, 학생들의 모국어가 무려 80개다. 영어와 불어가 가장 많이 사용되지만, 다른 언어 사용자들끼리 만나서 재미있는 현상이 생기기도 한다.

커플 사이에 공통 언어가 없는 경우, 둘만의 단순화된 소통 체계를 만들어간다. 세밀한 표현을 이해하지 못해 답답해 하지만, 서로 비꼬거나 말꼬리 잡는 것이 불가능해 덜 싸우는 효과도 있다. 엄마와 아빠가 다른 언어를 쓰는 경우, 아이는 엄마 아빠의 모어를 각각 익히는 한편, 부모 사이의 간단한 의사소통 체계를 발전시켜 좀더 세련된 중간 언어를 구사하기도 한다.

접점 없는 언어들이 만나서 생긴 단순한 형태의 중간 언어를 '피진어'라고 하고, 피진어가 정교한 문법이 생기고 후손들의 모어가 되면 '크레올어'라고 한다. 영어와 서아프리카어가 만나 생긴 자메이카 파트와(Patwa)도 크레올어의 일종이다. 나도 자메이카 출신 학생에게 파트와를 몇 마디 배웠다. 'nyam and run'은 '냠냠 먹고 가버린다', 즉 '먹튀'라는 뜻이다. irie(아이뤼~)는 오케이, 헤이, 흥 등의 뜻으로 'I feel irie!'(흥겹다!), 'Irie~'(흐응~ 오키~)처럼 쓰인다.

새로운 언어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단순한 피진어에서 복잡한 문법과 어휘의 크레올어가 어떻게 생겨났을까? 더 거슬러 올라가서, 언어가 없던 시기에서 최초의 언어가 어떻게 생겨났을까? 침팬지나 고릴라처럼 단순한 의사소통만 하던 호모 사피엔스가 언어를 탄생시킨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인간은 어린 시절에 모어를 통해 두뇌 속에 언어 회로를 배선하면 이후에 어떤 새로운 언어든 배울 수 있다(기본 운영 체계를 설치하고 이후에 무슨 앱이든 설치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아무 언어도 배우지 않는다면 영영 언어를 배울 수 없게 되고, 인간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된다.

늑대와 자라다가 구출된 소녀, 아동학대로 벽장 속에 갇혀 살다 구출된 어린이들의 사례를 보면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임계 시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6세 전에 구출된 어린이들은 문법을 갖춘 언어를 습득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에 구출된 어린이들은 끝끝내 문법을 습득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십대 때 구출된 소녀들은 '책'과 '옷'이란 단어를 배울 수는 있지만 '책 위의 옷'과 '옷 위의 책'의 차이는 끝내 구분하지 못했다. 말을 듣고 공간의 배치를 상상하는 능력이 생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 챈 독자가 있는가? 그렇다. 그럼 대체 최초의 문법은 어떻게 생겼단 말인가?

어릴 때만 말을 배울 수 있는데 말을 가르쳐줄 어른이 없다면 그 말은 어디에서 왔는가. 약 8만 년 전, 타임머신을 타고 인류의 조상들이 살던 동굴로 가서 관찰해본다고 상상하자. 이 당시 어린이들은 어른들에게 문법 언어를 배우지 못한다. 어른들이 문법 언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어린이들이 커가면서 언어 장착이 되지 않았으므로 어른이 되었을 때 당연히 언어를 할 수 없다. 그리고 다시 그 무리의 다음 세대 어린이들에게 가르쳐줄 언어가 없다.

어른도 말을 못 하고, 어린이도 말을 못 배운다면, 우리의 언어는 대체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점진적인 문법 발달 같은 것은 없다. 모 아니면 도다. 언중이 없는 미완성된 언어는 곧 소멸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 수수께끼는 학자들을 괴롭혀왔다. 외계인이 잠시 지구에 들러 선사시대 어린이들에게 말을 가르쳐주기라도 한 것일까?

이 수수께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어른들은 문법을 창조해낼 능력이 없기 때문에, 어른들이 모여 언어를 만들 수는 없다.
2. 어릴 때 언어를 배우지 못하면, 사람은 평생 언어를 배울 수 없다.

인간은 두뇌가 유연하고 미성숙한 상태로 오래 유지되어 늦게까지 계속 발달하는 특성(유형성숙, neoteny)을 가지고 있다. 3~4세의 인간 유아는 물가에 방치하면 익사하고 불가에 방치하면 화상을 입으며 절벽에 방치하면 추락사할 수 있다. 하지만 3~4세의 침팬지 유아는 이미 물, 불, 절벽 등을 무서워하고 조심한다. 인간은 심지어 어른이 되어서까지 호기심과 탐구심이 크고 새로운 대상에 두려움을 덜 가진다.

두뇌가 한참이나 미성숙하면서 유연한 상태로 유지되는 것은 원래 자연계에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속성이다. 3세가 되어 걷고 뛸 수 있게 되었는데, 물, 불, 절벽, 미지의 생물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사망률만 높아질 뿐이기 때문이다. 유형성숙은 언어가 있는 사회에서나 지능을 높이는 장점을 발휘하기 때문에, 유형성숙이 대세가 되려면 언어의 진화가 빠른 시간 안에 폭발적으로 일어났어야 한다.

쌍둥이 아기들 덕분에 인간 언어가 만들어졌다?

안드레이 바이쉐드스키(Andrey Vyshedskiy)라는 신경과학자는 이 수수께끼들의 해법으로 '로물루스와 레무스 가설'을 들고 나와, 7만 년 전쯤에 문법 언어가 최소 두 명의 유아들에 의해 생겼다고 주장했다.

-약 2세에서 5세로 임계시기가 늦춰지는 아동기 연장이란 돌연변이를 가진 유아가 둘 또는 그 이상 존재한다.
-이 유아들이 끊임없이 수다를 떤다.
-5세가 되기 전에 공간 지각 등의 문법 요소를 지닌 언어가 탄생한다.
-이 유아들이 자라서 문법 언어를 새로운 세대에게 가르친다. (어른들에게는 못 가르침)

로물루스와 레무스 전설은 늑대에게서 키워진 쌍둥이가 문명을 창시하고 로마를 건설했다는 내용이다. 이 설정에서 따온 로물루스와 레무스처럼, 언어가 없는 양육자들에게서 키워진 유아들이 자기들끼리의 소통으로 문법 요소를 만들어내고 후대에게 퍼뜨렸을 거란 가설이다. 아동기 연장이라는 돌연변이를 동시에 가진 유아 둘 이상이 바로 옆에서 양육되는 우연이 일어나야 가능한 일이다.

둘이서 종알종알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법 요소를 발명해낸 두 (아마도 쌍둥이) 어린이들이 새로 태어나는 아기들에게 자신들이 발명해낸 문법 언어를 전수함으로써 언어는 드디어 인류 속에 뿌리내리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 최초의 과정은 관찰할 수 없기 때문에 검증은 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와 유사하게 어린이들이 문법 언어를 창조하는 과정은 니카라과에서 관찰되었다.

바이쉐드스키는 7만년 전에 문법의 탄생으로 비로소 행동 면에서 현대적인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했다고 본다. 머리 속으로 무엇이든 시뮬레이션하고 그 머리 속의 계획을 동료들과 공유하고 소통할 수 있게 되어 인간의 실행력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태그:#제네바, #로물루스, #레무스, #피진어, #크레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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