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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22일, 인천 지역 인권단체, 교육단체 등이 인천시의회 앞에서 학교구성원인권증진조례를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2021년 3월 22일, 인천 지역 인권단체, 교육단체 등이 인천시의회 앞에서 학교구성원인권증진조례를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인천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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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말, 인천시의회는 인천시교육청이 제출한 '학교구성원인권증진조례'를 통과시켰다. 이는 '유사 학생인권조례', 즉 학생인권조례와 비슷하지만 학생인권조례라고는 할 수 없는 조례가 제정된 첫 번째 사례이다. 과거 전남 '교육공동체인권조례', 강원 '학교인권조례' 등이 교육청에 의해 추진되었던 적이 있으나 모두 제정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번 인천 학교구성원인권증진조례 제정을 두고, '인권'이나 '차별금지'라는 말만 들어가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반대하곤 하는 일부 단체들은 사실상 '학생인권조례'라며 반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천시교육청은 이는 '학생인권조례'와는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그렇다. 인천 학교구성원인권증진조례는 학생인권조례가 아니다. 그리고 그래서 문제이다.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진 이유

학생인권조례는 현재 경기, 광주, 서울, 전북, 충남, 제주 6개 광역지자체에서 시행 중이다.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진 것은 학교의 자의적 행태에 의해 학생의 인권이 침해당하는 일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후반 무렵부터 두발·복장규제, 체벌, 자율·보충학습 강요, 소지품 검사·압수, 종교 강요, 차별 등 학교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학생인권 침해에 문제 제기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나 학생들의 저항, 시민사회단체나 언론 등의 비판과 지적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요지부동이었다. 이에 학교에 의한 고질적인 인권침해에 브레이크를 걸고, 학생인권의 기준과 내용을 제시하며, 학교 규칙과 문화 등을 개선하기 위한 법안이 고안되었다. 바로 제17대 국회에서 발의되었던 '학생인권법안'(초·중등교육법 개정안)과 학생인권조례다.

이 중 학생인권법안은 국회 논의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구체적 내용이 지워지고 '학교의 설립자·경영자, 학교장은 학생의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라는 원칙적 내용만 통과되었다. 이후 학생인권조례는 교육감 직선제와 함께 2010년 경기도 시작으로 몇몇 지역에서 제정에 성공하여 변화를 불러왔다.

지역마다 내용 차이는 있지만, 학생인권조례의 내용은 대체로 두발·복장의 자유 등 개성실현의 자유, 사생활의 자유,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 참여권, 휴식권, 차별받지 않을 권리 등 학생이 학교에서 보장받아야 할 기본적인 인권의 내용을 명시하고, 이러한 권리를 신장시키기 위한 구제기구나 학교와 교육청의 의무를 정하고 있다.

이처럼 학생인권조례는 학교에서 무분별하게 일어나는 학생인권 침해를 억제하고, 지켜야 할 학생인권의 기준을 제시하는 법이라는 의의가 있다. '학생은 이러이러한 인권이 있다'라고 명시한 조문은, 그저 헌법이나 세계인권선언에 나온 문장의 주어를 '학생'으로 바꾼 것이 아니라 '학생이더라도 이러이러한 인권을 함부로 침해당해선 안 된다'라는 속뜻을 담고 있다. 즉, 초·중·고 학생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기 십상이었던 권리에 존재감을 부여하는 것이 학생인권조례이다.

특히 체벌, 두발·복장규제, 종교 강요 등의 학생인권 침해는 학교 규칙이나 관행에 의해서, '교육'이라는 이름하에, 일상적·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정당화되곤 하기 때문에 더더욱 무엇이 인권이고 인권침해인지 규정하고 개입하는 법이 필요하다.

근로기준법에 사장과 손님의 권리도 넣는다면…

학교구성원인권증진조례는 이와 같은 학생인권조례의 역사와 취지를 희석시키는 것이다. 예컨대 '학생이라 하더라도 체벌 등 폭력을 당해선 안 된다'라는 것이 학생인권조례라면, 인천 학교구성원인권증진조례는 '학교구성원은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라고만 말하는 식이다. 실제로 인천 학교구성원인권증진조례는 다른 지역의 학생인권조례에는 명시되어 있는 여러 구체적 내용이 삭제당한 상태다.

차라리 학교구성원 모두의 다양한 권리를 더 디테일하게 보장하겠다는 의욕으로 이 조례가 탄생했다면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학교에서 보장되어야 할 교직원의 권리나 보호자의 권리 등이 세세하고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면 최소한 성의라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천 학교구성원증진조례는 교직원의 권리나 보호자의 권리를 따로 구체적으로 명시한 부분도 찾아보기 힘들고, 그저 '학교구성원은 이러이러한 권리를 가진다'라는 식으로 뭉뚱그려 놓은 게 대부분이다. 말하자면 노동자의 권리를 명시한 근로기준법을 만들라고 했더니만, 사장과 손님까지 다 포함시켜 '기업구성원의 권리'라고 써놓은 셈이다.

학생에게도 인권이 보장된다는 메시지, 어떠한 행위가 학생인권 침해이니 해선 안 된다는 메시지가 흐릿해질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지역의 인권단체 등은 인천 학교구성원인권증진조례에 우려와 반대를 표해왔다.

안 그래도 학생인권조례는 강제성이 약하다. 조례에 명시된 학생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해서 바로 처벌하거나 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된 지 오래인 지역에서도 여전히 두발·복장규제 등의 아주 기초적인 학생인권 문제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가령 2020년 2월 발표된 서울 지역 학생인권 실태조사(서울시교육청 연구 용역, 국제아동인권센터 조사)에서도, 머리카락 길이나 모양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지 물은 항목에 중학생 57.3%, 고등학생 52.0%가 그렇지 않다고 응답했다. 학생인권조례는 학교를 단숨에 바꾸기보다는, 학생인권이 이러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사회적으로 확산시키고 권고하고 교육하여 변화를 유도하는 식이다. 그런데 인천 학교구성원인권증진조례는 이러한 메시지조차 불분명하다.

물론 인천 학교구성원인권증진조례에 의해 설치된 '인권보호관'이나 '인권증진위원회'가, 또는 인천시교육감이 적극적 의지를 가지고 학생인권 개선에 기여할 수는 있다. 나도 그러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하지만 교육감이나 인권보호관 개인의 의지에만 좌우되지 않고 더 안정적으로 운영되기 위해선 시스템이 잘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조례 문구와 같은 법 규정은 시스템의 첫 단추이다.

더군다나 학생인권조례를 만들기 부담스러워서 내용과 의의를 후퇴시킨 학교구성원인권증진조례를 내놓은 인천시교육청이 과연 그런 적극적 행보를 보일지 의심스러운 것 역시 어쩔 수 없다. 결국 인천 학교구성원인권증진조례는 없는 것보단 나을지 모르고 학생인권 개선에 일부 기여할 수도 있으나, 학생인권조례를 만들지 않는 핑계거리로 쓰일 위험성이 크다는 점에선 없느니만 못할 수도 있다. 또한 학생인권조례보다 여러모로 부족하고 후퇴된 조례임은 명백하다.

학생인권을 보장하는 법은 더 많이 필요하다

2020년 충남과 제주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어, 학생인권조례가 시행 중인 지역은 총 6개로 늘어났다. 2021년 4월에는 강원도에서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운동이 재차 시작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인천 학교구성원인권증진조례와 같이 학생인권조례로서의 제대로 된 내용을 담지 않은 조례도 만들어지고 있다.

사실 충남, 제주의 학생인권조례 역시 상당 부분 먼저 제정된 학생인권조례들에 비해 내용이 누락된 등의 문제가 있다. 이에 더해 최근 여러 중·고등학교에 잔존해 있는 불합리한 두발·복장규제 사례들이 불거지며 학생인권조례가 시행 중인 지역에서도 인권침해가 근절되지 않고 있음이 드러났다. 학생인권이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보장되고 뿌리 내리고 있다고 결코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경기도를 시작으로 수년간 몇 지역에서 시행된 학생인권조례는, 두발이 자유화된다고 해서, 야간자율학습이 자유롭게 선택 가능하게 된다고 해서 별문제가 일어나지 않음을 보여 주며 한국의 상식과 감각을 바꿔 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학생인권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전국적이고 강력한 법적 기준이 없다는 이유로, 적지 않은 학교에서 불합리하고 자의적인 학생인권 침해가 이어지고 있다.

학생인권에 대한 부당한 편견과 공격 때문에 여러 지자체에서 학생인권조례를 만들지 못하고 있고, 인천처럼 학생인권조례라 할 수 없는 것을 면피용으로 내놓는 경우도 있다. 학생인권의 자리는 여전히 위태롭다. 인천에서 일어난 일은 지금도 여러 지역에서 학생인권조례가 필요한 이유를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국회와 교육부 역시 각 지자체에 맡겨놓기만 할 것이 아니라, 유엔아동권리협약의 규정대로 학교 규칙이 학생의 인권을 존중하도록 감독하고, 학생인권의 기준을 밝히고 지키는 법령을 마련하는 데 나서야 할 것이다.

태그:#학생인권, #학생인권조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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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인권활동가,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대학입시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등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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