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날이 따뜻해지니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아진다. 그 일 중의 하나가 냉장고 청소였다. 도통 엄두가 나지 않더니 막상 손을 대니 이것도 치우고 저곳도 닦아내며 욕심을 부리게 된다.

특히 겨우내 먹을 요량으로 이것저것 한가득 쟁여 놓은 채소 칸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싹이 잔뜩 난 감자, 쪼그려 터진 당근 꽁댕이, 바람 든 무... 살림 못 한 내 허물을 감추려면 제 본새를 상실한 그것들은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바람 든 무, 시든 당근, 싹 난 감자
 
우리 집 자랑 덩어리 '제라늄'은 분홍색 꽃이 핀다.
 우리 집 자랑 덩어리 "제라늄"은 분홍색 꽃이 핀다.
ⓒ 박진희

관련사진보기

 
작년 겨울, 곁에 두고 싶은 화초 몇 개만을 챙기고 대부분은 제대로 건사를 못했다. 매해 찬 바람이 불면 화분을 집 안으로 들여놨다가 날 풀리면 다시 밖에 내놨다 하는 게 너무도 고되어, 화초 몇 개를 포기한 탓이다. 분홍색 꽃이 예쁜 제라늄, 건강 관리해 줄 알로에, 빨간 열매 어여쁜 천냥금, 공기 정화 책임질 테이블야자는 뜨신 겨울을 보냈다. 

제라늄과 테이블야자는 이삿짐을 싸던 이웃집 할머님이 다 죽어가서 화분째 버리신다는 걸 "살려 보마" 자신하고 받아온 것이다. 큰 화분에 영양제 꽂아가며 정성 들여 키웠더니, 이제는 어디 내놔도 꿀릴 것 없는 자태를 뽐낸다.

귀동냥에 알로에는 피부 재생과 장운동에 탁월하다고 들어 근생엽을 얻어다 1m 넘게 키워 냈다. 천냥금도 돈 주고 사다 심은 건 아니었다. 집 근처 교회 목사님이 동네 분들과 꽃 화분을 나누며 선교 활동을 하시기에 받아왔다. 넓은 곳으로 옮겨 심고 틈틈이 물 주는 걸 잊지 않았을 뿐인데, 기특하게 땅속줄기를 잘 뻗어주고 있다.

사연 많은 집 안의 화초들과 달리 베란다에 방치했던 것들은 결국 명대로 못 살고 죄다 얼어 죽었다. 주인 잃은 큰 화분 몇 개는 달라는 이가 있어 소용 닿는 대로 가져가도록 했다.

그러고도 덩그러니 남은 화분에는 냉장고 채소 칸에서 찾아낸 묵은 감자, 시든 당근, 바람 든 무를 심어 보았다. 물론 물색없는 호기심 때문이지 무슨 큰 기대가 있어서 그리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뻔한 채소 몇 개는 냉장고 대신 화분에 새로이 둥지를 틀게 됐다.

빈 둥지에 새 생명이 움트다
 
바람이 잔뜩 든 무를 버리려다 무청 부분을 화분에 심었더니 꽃대가 올라왔다.
 바람이 잔뜩 든 무를 버리려다 무청 부분을 화분에 심었더니 꽃대가 올라왔다.
ⓒ 박진희

관련사진보기

 
날이 푹해지고 베란다 문을 자주 열어두게 된 어느 날이다. 바람 든 무를 심어만 놓고 잊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뜬금없이 그쪽으로 눈길이 갔는지 모르겠다.

'어, 저게 뭐야?' 

긴가민가 두 눈을 의심하며 다가가 살피니, 바람 든 무에서 꽃대가 올라와 있고, 꽃자루에는 꽃눈이 벙그러진 게 아닌가. 제대로 자라주리란 기대는 눈곱만큼도 안 했는데.... 훌쩍 커 준 게 어찌나 대견하던지.
 
무꽃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했다.
 무꽃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했다.
ⓒ 박진희

관련사진보기

 
다음 날 다시 살피니, 밤 사이에 꽃눈이 터졌는지 무꽃 한 송이(?)가 화알짝 피어 있다. 실물의 무꽃을 본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그런 만큼 예고에 없던 감동과 환희가 몰아쳤다.
 
빛의 양과 카메라 각도를 달리하니 더욱 예쁜 무꽃이 드러난다.
 빛의 양과 카메라 각도를 달리하니 더욱 예쁜 무꽃이 드러난다.
ⓒ 박진희

관련사진보기

 
며칠 전, 아는 분이 SNS에 자신의 밭에 핀 장다리꽃 사진을 31장이나 올려놓아 꽃 구경을 실컷 한 일이 있다. 예쁜 꽃 사진도 참으로 좋았지만, 해마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늘 가까이서 즐길 수 있는 그녀의 일상은 질투가 날 만큼 부러웠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우리 집에도 똑같은 무꽃이 벌어졌다. 비록 한 송이(?)에 지나지 않지만, 기대도 안 했는데 바람 든 무가 소리소문없이 새 생명을 데리고 왔다. 일부러 시간 내서 명소라고 이름난 데까지 가서 꽃구경할 때와는 또 다른 감회가 휘몰아쳤다.

이 세상에 쓸모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싹이 잔뜩 난 묵은 감자를 버리려다 심었더니 싹을 틔우고 줄기가 크기 시작했다.
 싹이 잔뜩 난 묵은 감자를 버리려다 심었더니 싹을 틔우고 줄기가 크기 시작했다.
ⓒ 박진희

관련사진보기

 
싹이 터서 먹지도 못하고 볼품도 없던 감자가 무꽃이 피기 전에 먼저 땅속에서 싹을 틔웠었다. 빼빼 말라비틀어졌던 당근도 기대 이상으로 싱싱한 잎을 키워내고 있다.

4월에 내린 서리로 일찍 심은 농작물은 냉해를 당했다는 소식이 들리는 가운데 우리 집 감자와 당근은 잘 자라고 있다. 그렇다 보니 하이얀 꽃도 서둘러 피어 주길 은근히 기대하게 한다. 조금 욕심을 부리자면 손톱만 해도 좋으니 수확의 기쁨도 맛보고 싶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해도 실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이미 쓸모없는 것들로 치부하고 내동댕이치려 했던 무, 당근, 감자를 통해 하루하루가 행복으로 충만하다. 게다가 다음 날의 별스러운 감흥을 기대할 수 있다. 분에 넘치는 특별한 봄날을 보내고 있는 나는 오늘도 제멋에 겹다. 

태그:#소일거리, #장다리꽃, #무꽃, #새봄, #감자심기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보고 듣고 느끼는 소소한 일상을 욕심껏 남기고자 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