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개봉 버전에는 삭제 되었던 동성애 코드와 관련 일부 장면들이 추가되어 27년만에 재개봉한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

1993년 개봉 버전에는 삭제 되었던 동성애 코드와 관련 일부 장면들이 추가되어 27년만에 재개봉한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 ⓒ 조이앤시네마

 
첸카이거 감독은 <현 위의 인생>(1991)과 <패왕별희>(1993)로 내 삶에 들어온다. 그는 나중에 <무극>(2006)이나 <매란방>(2009) 같은 영화를 연출했지만, 절정을 지나 낙화로 접어든 느낌이다. 장예모 감독과 함께 현대 중국영화를 대표하는 5세대 감독의 호칭을 부여받고, <패왕별희>로 제43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첸카이거.
 
아무도 없는 영화관에서 3시간 동안 지나간 날들과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파란만장한 중국 현대사의 소용돌이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영화의 시선은 아플 만큼 매섭다. <패왕별희>는 절제된 수미쌍관의 구성과 톨스토이 장막극의 정제된 6막 형식을 빌려온다. 개별적인 장면은 브레히트 서사연극처럼 그 자체로 완결된 전체다.
 
중일전쟁과 문화혁명 시대를 살아갔던 광대들의 이야기를 브레히트와 톨스토이의 작법에 기초한 영화로 풀어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더욱이 서사의 바닥에는 초 패왕 항우와 우희(虞姬)의 구슬픈 이야기가 자리한다. 한편으로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가 도도하게 흐르고, 다른 한편으로 역사에 치이기도 하고, 역사에 무너지는 인생들이 그려진다.
 
경극(京劇) 배우의 삶
 
 1993년 개봉 버전에는 삭제 되었던 동성애 코드와 관련 일부 장면들이 추가되어 27년만에 재개봉한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

1993년 개봉 버전에는 삭제 되었던 동성애 코드와 관련 일부 장면들이 추가되어 27년만에 재개봉한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 ⓒ 조이앤시네마

 
1924년 아름다운 여인이 사내아이를 데리고 경극단에 들어온다. 그녀는 가난 때문에 몸을 팔아야 하는 한낱 창녀로 아이를 더는 거둘 수 없는 처지다. 하지만 엄격한 경극 사부는 육손이란 이유로 아이를 받지 않는다. 이윽고 피투성이가 된 아이가 다른 아이들 틈에 섞여 생활하기 시작한다. 생모가 있음에도 졸지에 고아 신세가 된 소년 두지.
 
이 몸은 비구니요, 꽃다운 나이에 사부님께 머리를 깎였네.
나는 본디 계집으로서 사내도 아닌데, 어찌하여...
 

오직 사내들만이 무대에 올라 여성 배역도 남자가 맡아야 했던 경극. 거기서 두지는 남성으로 타고난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해야 한다. 두지가 고집스레 틀릴 때마다 고문처럼 날아오는 사부의 가혹한 매질. 그런 두지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지켜주려는 어른스러운 소년 시투. 그들의 삶은 그때부터 운명적으로 서로 엮이게 된다.
 
올해가 몇 년이냐? 민국 21년(1932년)입니다. 무슨 소리냐? 선통 24년이야!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의 내시였던 장 내관과 두지의 대화다. 장 내관은 경극단의 후원자이자 호색한이다. 두지의 공연에 장 내관이 알 듯 모를 듯 앓는 소리를 한다. 그의 침실로 붙들려가는 두지와 어쩔 줄 모르는 시투. 배우와 극단 후원자의 고금동서 예외 없는 관계를 그려내는 첸카이거. 배우의 삶은 언제 어디서든 신산하기 그지없다.
 
단샬루(시투)와 주샨, 원세경(원대인)과 청데이(두지)
 
 장국영 공리 주연의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

장국영 공리 주연의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 ⓒ 조이앤시네마

 
1937년 7월 7일 노구교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한다. 이제 북경 제1의 경극 배우로 성장한 시투와 두지. 그들은 단샬루(段小楼)와 청데이(程蝶衣)의 이름으로 <패왕별희>의 패왕과 우희를 연기한다. 일본군 장교들뿐 아니라, 친일파 거부 원세경(원대인)도 데이의 연기에 감동한다. 극단의 후원을 약속하며 데이에게 접근하는 원대인.
 
당당하고 늠름한 청년으로 성장한 샬루의 마음을 흔드는 여인 주샨(菊仙). 북경의 유명한 주루(酒樓)의 대표 미인 주샨을 따르는 숱한 남정네. 날로 친밀해지는 주샨과 샬루의 관계로 고통받는 데이. 그는 샬루에게 자신의 마음을 토로한다.
 
우리 평생 함께 노래하면 안 될까?
반평생이나 함께 노래했잖아.
아니, 평생 함께해야 해. 일분일초라도 모자라면 평생이 아니잖아.

 
경극의 우희처럼 샬루를 사랑하는 데이. 그는 경극과 현실을 동일시하지만, 샬루는 경극과 현실은 엄연히 다름을 인식한다. 경극을 대하는 그들의 관점 차이를 심화하는 인물이 주샨이다. 주샨과 데이의 갈등과 반목이 영화를 풀어나가는 주요한 원천 가운데 하나다. 원대인은 샬루의 부재로 인한 데이의 허무를 잠시 채워주는 대체재로 기능한다.
 
결정적인 파국
 
<패왕별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중일전쟁도 국민당 정부(1945)와 공산당 정부(1949)도 아니다. 그것은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이다. 반동적인 문화와 습속을 청산하여 사회주의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로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기존의 모든 권력과 관계를 붕괴시킨다. 공자묘가 파괴된 것처럼 중국의 전통적 연희인 경극도 파국을 맞는다.
 
열대여섯 살 먹은 홍위병을 중심으로 이뤄진 피어린 칼춤으로 마무리되는 인민재판의 서슬이 살벌하다. 우리의 주인공들도 어김없이 소환된다. 이 지점이 첸카이거가 매우 공들여 만든 장면이자 <패왕별희>의 절정이 아닌가 한다. 언젠가 데이가 측은지심으로 거둔 천애고아(天涯孤兒) 샤오쓰가 당대 홍위병의 면면을 대변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서로 고발하고, 부정하며, 손가락질하고, 비웃고, 찢어발기고, 할퀴면서 압살해버리는 기막힌 장면 앞에서 그들 각자는 망연자실 넋을 잃는다. 거기서 우리는 인간도 예술도, 우정도 사랑도 모조리 잃어버린 인간들의 처절한 막장을 확인한다. 살아남기 위해 상대방 바닥까지 파고 들어가는 인간군상. 단 한 줄기 희망의 빛도 보이지 않던 시공간.

이 자는 일본군 앞에서 노래한 매국노입니다.
국민당 병사들 앞에서도 노래했고,
악질반동 원세경에게 몸까지...

 
우희, 패왕과 작별하다
 
다시 세월이 흐르고 흘러 1977년. 1976년 9월 모택동 사망과 10월의 4인방 숙청 그리고 등소평의 복권이 실현된 시점. 패왕과 우희의 복장과 분장을 한 샬루와 데이가 퇴락한 극장으로 들어온다. 객석은 텅 비어있다. 그들의 공연은 오직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다. 데이가 아주 옛날 어렸던 시절에 읊었던 대사를 노래하고, 샬루가 맞받는다.
 
나는 본디 사내로서 계집도 아닌데...
틀렸어! 또 틀렸어!
나는 본디 사내로서 계집도 아닌데...
 

샬루가 나무라지만, 데이는 자신의 대사를 수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투의 칼자루에서 검을 꺼내 든다. 1924년부터 53년 동안 끊어질 듯 이어져 온 관계를 끊을 시각이다. 경극 <패왕별희>의 영원한 배우로서 샬루와 데이의 마지막 공연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사내로 태어나 계집이 된 데이가 마침내 사내로 돌아가는 장면은 처연하고 눈물겹다.
 
영화 <패왕별희>는 경극으로 결합한 두 사내와 한 여자를 둘러싸고 진행되면서, 너무도 많은 사건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된다. 인간적인 사랑과 정리는 물론, 사회-정치적인 격변과 역사적 격랑을 살아가야 했던 인물들의 신산한 세상살이가 숨 막힐 듯 펼쳐진다. 1993년부터 중국 공산당이 경극 공연을 다시 허가했다는 자막이 저 멀리 아련하다.
 
5세대 감독 이후

 
 1993년 개봉 버전에는 삭제 되었던 동성애 코드와 관련 일부 장면들이 추가되어 27년만에 재개봉한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

1993년 개봉 버전에는 삭제 되었던 동성애 코드와 관련 일부 장면들이 추가되어 27년만에 재개봉한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 ⓒ 조이앤시네마

 
첸카이거의 2000년대 행적은 1993년의 <패왕별희>와 거리가 멀다. 2009년 <건국대업>에서는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모택동의 게릴라 군대가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를 격파하고 사회주의 중국 건설에 성공한 이야기를 담는다. 2019년 10월 1일 중국 국경절을 기념하는 영화 <아화아적조국 (나와 나의 조국)>은 그야말로 국뽕영화의 정수다.
 
하기야 같은 5세대 감독인 장예모의 변신도 그리 놀랍지 않다. <붉은 수수밭>(1989), <홍등>(1992), <귀주 이야기>(1994), <인생>(1995)으로 화려한 영화 인생을 선보인 장예모. <타이타닉>을 능가하는 기막힌 소품 <집으로 가는 길>(2000)로 찬탄을 받은 그는 2003년 <영웅> 이후 국가주의, 대국주의, 중화주의로 급격하게 선회한다.
 
5세대 감독 이후 중국에는 체제나 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영화가 나오지 않는다. 세계의 영화 관객이나 영화제 역시 그런 중국영화를 더는 기대하지 않는 듯하다. 한국영화의 강세는 세계 영화계의 강력한 축이던 일본과 중국영화의 조용한 몰락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그래서 <패왕별희>의 빛나는 성취가 더욱 아쉽게 느껴지는가 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는 붓다의 유언처럼 세계도 중국도 나날이 변한다. 그래도 한때는 세상을 호령했던, 곤궁하고 힘겨웠던 시절의 중국영화가 그리울 때가 있다. 돈과 명예와 문화 권력으로 둔갑한 21세기 중국영화를 보게 되면 기쁨보다 짠한 느낌이 찾아든다. 어쩌면 그것은 올드팬으로서 나만의 고유한 감상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첸카이거 패왕별희 경극 문화대혁명 5세대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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