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농구 안양 KGC 인삼공사와 부산 KT는 올시즌 최고의 라이벌로 꼽혔다. 정규시즌 6번의 맞대결에서 상대 전적 3승 3패로 호각세였고 이중 연장전만 무려 4번을 치른 데다 상대 득실차는 0이었다. 프로농구 역대 시즌을 통틀어도 이 정도의 용호상박 구도는 드물었다. 두 팀이 각각 정규시즌 3위와 6위로 6강 PO부터 매치업이 성사되자 많은 이들은 그야말로 역대급 명승부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자 소문난 잔치에 비하여 내용은 싱거웠다. 인삼공사는 KT를 단 3경기 만에 가볍게 스윕하고 3년 만에 4강 플레이오프(PO)에 진출했다. 정규시즌과 단기전인 플레이오프가 전혀 다른 무대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장면이다. 인삼공사는 준결승에서 정규리그 2위 울산 현대모비스를 만나게 됐다.

두 팀의 결정적인 차이를 가져온 선수는 제러드 설린저였다. 시즌 후반기 교체 외국인 선수로 인삼공사에 합류한 설린저는 늦게 가세했음에도 무서운 적응력을 선보이며 리그 판도에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설린저는 6라운드 8경기에서 평균 27.6득점 12.3리바운드를 기록하며 같은 기간 리그 전체에서 득점, 리바운드 모두 1위를 기록했고 라운드 최우수선수(MVP)까지 선정됐다. 많은 농구전문가들은 인삼공사가 4강직행에 실패했음에도 플레이오프에서는 '태풍의 눈'이 될 것이라 예상했고, 그 이유는 온전히 설린저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설린저는 6강 PO에서도 평균 28점 10.3리바운드 4.0어시스트로 종횡무진 활약했다. KT는 설린저를 막기 위하여 다양한 변칙수비를 준비했다. 설린저는 1차전에서는 19득점 야투율 33%로 비록 팀은 이겼지만 본인은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설린저는 두 번 당하지 않았다. 2차전부터 38점 6리바운드 6어시스트, 3차전에서는 27점 14리바운드 5리바운드로 맹활약하며 KT의 수비를 파괴했다.

설린저의 활약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득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수비에서는 자신의 매치업 상대는 물론 KT의 에이스인 허훈이나 양홍석의 돌파 시도 때마다 적절한 타이밍에 도움 수비를 들어가며 견제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됐다. 공격에서는 자신에게 몰리는 수비를 이용하여 패스를 내주거나 적극적인 스크린으로 우군에게 공간을 만들어줬다. 전성현-이재도-변준형 등 국내 선수들의 득점포 역시 활발하게 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다.

인삼공사의 또다른 강점은 수비력이다. 문성곤과 양희종이라는 리그 최고의 수비 스페셜리스트를 두 명이나 보유한 인삼공사는 다양한 수비 전술을 가동하는게 가능하다. 두 선수 모두 공격에서는 비중이 크지 않지만 KT의 강점인 양홍석과 김영환같은 포워드진의 득점력을 최대한 억제하며 승리의 숨은 주역이 됐다. 중요한 리바운드와 루즈볼 싸움 등 기록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흐름상 중요한 고비마다 소금같은 활약을 보여준 조연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인삼공사는 정규시즌에 고전했던 KT를 예상보다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반면 KT는 젊은 팀의 한계인 노련미와 뒷심 부족을 여실히 드러냈다. KT는 3경기 모두 1쿼터를 앞서고도 모두 역전패를 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흐름상 중요한 고비마다 어이없는 턴오버가 나오거나 손쉬운 자유투를 너무 많이 놓치는 등 기본에 충실하지 못했다.

KT가 정규시즌에서 인삼공사와 호각을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은 허훈이었다. 정규리그 6번의 인삼공사전에서 허훈은 평균 23.2점 8.7어시스트 3점슛 성공 2.7개 1.3스틸 야투 성공률은 52.6%으로 원맨쇼를 펼쳤다. 하지만 6강 플레이오프에서는 14.3점(7.6어시스트)으로 득점력이 뚝 떨어졌고 20점 이상을 기록한 경기는 한번도 없었다. 허훈은 설린저가 가세한 인삼공사의 트랩수비에 막혀 야투율이 부진했고 설상가상 1차전 이후 햄스트링 부상까지 겹치며 제 컨디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T에는 컨디션이 나쁜 허훈보다도 더 나은 활약을 보여준 선수가 없었다는 게 치명타였다. 허훈과 함께 리그 베스트5에 선정된 양홍석 역시 문성곤의 수비에 시리즈 내내 고전을 면치 못했다. 외국인 선수 브랜든 브라운은 설린저와의 맞대결에서 완패한 데다 2차전에서 심판 판정에 평정심을 잃고 패배를 자초했고 3차전에서는 4분여를 뛰는 데 그치는 등 전혀 제몫을 하지 못했다.

서동철 감독의 한계를 분명히 보여준 플레이오프였다는 평가도 나온다. 2018년 부산 KT의 지휘봉을 잡은 서 감독은 만년 하위권을 전전하던 KT를 3년 연속 6위(2019-20시즌은 코로나19로 인한 조기종료로 PO 진출은 무산)로 이끌며 꾸준히 플레이오프 진출권으로 올려놓았다. 유망주였던 허훈과 양홍석이 각각 리그 MVP와 베스트5를 다투는 선수로 성장한 것도 그의 재임기간에 남긴 최대의 업적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단계로 올라가지는 못했다. 허훈과 양홍석의 발탁은 조동현 전 감독의 유산이었고 이들은 이미 아마추어 시절부터 국가대표급 유망주로 주목받던 선수들이었다. 오히려 리그 최고 수준의 국내 주전들을 보유하고도 3년내내 외국인 선수 선발에서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팀전력을 극대화하는 데는 실패했다. KT는 팀내에서 외국인 선수 이상의 비중을 지닌 허훈의 컨디션과 결장 여부에 따라 경기력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모습을 끝까지 극복하지 못했다.

시즌 운용의 완급조절에도 실패했다. KT는 플레이오프를 앞둔 마지막 6라운드에서 2승 7패라는 극도의 부진에 빠지며 6위까지 떨어졌고 마지막까지 하위권팀들의 추격에 6강플레이오프 진출을 조기에 확정짓지 못하고 마음을 졸여야 했다. 이는 허훈을 비롯한 주전들이 시즌 막바지까지 매경기 체력안배 없이 35분 이상을 혹사당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좋지않은 흐름은 플레이오프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기선제압이 중요하던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허훈이 체력이 고갈될 조짐을 보이자 서동철 감독은 어쩔 수 없이 승부처인 4쿼터에 교체시켜야 했는데 재투입 시점을 잡기도 전에 경기흐름이 그대로 인삼공사 쪽에 넘어가버린 모습은 사실상 KT의 운명을 예고하는 복선이었다. 서동철 감독은 허훈-양홍석에 대한 인삼공사의 수비전술과 외국인 선수들의 부진에 대하여 끝까지 별다른 대안을 내놓지 못하며 완패를 받아들여야 했다.

KT는 창원 LG-인천 전자랜드 등과 함께 챔피언결정전 우승이 아직 한번도 없는 팀이다. 전성기에 접어든 허훈과 양홍석을 데리고도 여전히 우승권과 거리가 멀다는 현실은, KT로서 팀의 방향성에 대하여 다시 한번 점검이 필요해 보이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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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러드설린저 안양KGC 프로농구6강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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