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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릴 적에만 가보았던 고향 선산은 동요 가사처럼 시냇물을 끼고 살구꽃, 진달래꽃, 벚꽃, 가지각색 이름 모르는 꽃들이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답게 피어있었다.

결혼 후 내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친정 행사에 거의 얼굴도 비치지 않았는데도 괘씸하게 여기지 않고 일가 친척분들이 발 벗고 도와주셔서 아버지를 잘 보내드렸다.

병원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여주었을 때 그 모습이 마치 평소 주무시는 듯 고요하고 편안하셔서 한결 위안이 되었다. 아버지의 뺨과 이마와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작별을 하였다.

아버지 고생하셨어요.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내 어릴 적 아버지의 모습은 퇴근할 때 아버지 손에 들려있던 두툼한 봉투로 기억된다. 거의 매일 빠지지 않고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에게 먹을거리를 사다 주셨다. 엄마는 빠듯한 살림을 하시느라 식사를 정성껏 마련해주시기는 했지만 그 외의 간식은 전혀 사주지 않으셨다.

그것을 아는 아버지는 저녁마다 소소하게는 '센베'라고 불렸던 일본 과자, 그 당시에는 귀했던 귤, 나무 상자에 들어있던 중국집 야끼 만두, 전기구이 통닭까지 늘 무언가를 손에 들고 귀가하셨다. 철없는 마음에 아버지보다 손에 든 봉투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늘 궁금했다. 통닭의 다리만 먹겠다고 떼를 쓰다가 오빠에게 혼나기도 했다.

막내였던 나는 어릴 때 엄마 아버지와 같이 안방에서 잠을 잤는데 아버지가 자주 악몽을 꾸고 가위에 눌려 소리를 지르며 깨시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때는 무서운 생각밖에 안 들었는데 아버지가 퇴직 후에는 그런 증상이 한번도 없었고 젊었을 때 날카롭던 인상이 부드럽게 변하신 걸 보고 직장 생활에서 받았던 스트레스와 가장이 짊어진 무게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성품이 부드러우시고 남에게 싫은 소리를 잘 못 하시는 분이었는데 아버지의 직업은 본인의 성격과는 반대로 해야 하는 상황이 있는 일이어서 그것을 소화하지 못하신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퇴직하셔서 경제적으로는 우리 집이 타격을 받았지만 그 뒤의 아버지의 표정은 정말 부드러워지셨다. 괴로운데도 가족들 부양하느라 적성에 맞지 않는 직장에 그렇게 오래 다니신 아버지가 나에게는 영웅이다.

아버지는 예술적 감각도 탁월하셨다. 젊었을 때는 바빠서 못하셨지만 그때도 필체가 좋으셨는데 나중에는 제대로 서예에 집중하셨다. 여러 대회에서 입상하셨고 많은 작품을 남기셨다.

내가 진정한 효녀였다면 아버지 호인 '효재'의 이름을 딴 전시회를 열어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여유와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결국 생전에 해드리지 못했다. 그렇게 사랑을 주셨지만 자식들은 결국 이기적인 존재인 것이다. 자식들은 아버지 작품을 나누어서 집에 걸었을 뿐이다.

전시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명예와 찬사를 받게 해드리지는 못했지만 서예 활동이 만년 아버지의 시간을 충만하게 만들었다는 것에 위안을 받는다.

이제는 나와 아버지 둘만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부모는 모든 자식을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 하지만 부모가 각각의 자식들에게 개별적인 경험을 주는 것도 자식의 인생을 의미있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나는 학창 시절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는데 아버지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 때 퇴직을 하시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져서 과외나 학원을 보낼 여유가 없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셨다.

나는 튼튼한 편이 아니라 학교 수업 후 또 다른 교육을 받을 체력도 없고 학교 수업만으로도 정말 충분했기 때문에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진심으로 말씀드리고 싶다.

고3 때는 집에 공부방도 없었기 때문에 독서실을 다녔다. 독서실은 우리 집에서 큰길을 건너야 하고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밤 10시가 되면 독서실 정문 앞에 어김없이 아버지가 서 계셨다. 옛날 분이라 화려한 감정 표현은 없으셨지만 말없이 따뜻한 얼굴로 내 책가방을 받아 들으시고 집까지 나란히 걸으셨다. 1년 동안 한 번도 빠짐없던 루틴이었다.

지금도 초등학교 하교길에서 엄마들이 자녀의 가방을 대신 들고 아이와 나란히 귀가하는 모습을 볼 때 마다 아버지 생각이 나곤 한다.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피곤한 티 내지않고 아버지 팔짱이라도 끼고 도란도란 학교 이야기라도 해드릴텐데 지금은 아버지가 안 계신다. 단발머리 소녀였던 나와 책가방을 든 아버지의 나란한 뒷모습은 내 마음에 영원히 각인되어 있다.

연세가 드시고 노쇠해진 아버지를 잘 정성껏 보살펴드렸는지는 모르겠다. 아버지는 말 없는 분이라고 단정 짓고 부모님 댁에 가서 엄마와만 이야기를 하고 온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돌아가시기 전 몇 년간 아버지랑 이야기하고 손잡아드리고 손자들 보여드리고 했을 때 아버지도 과거 어느 때보다 이야기를 많이 하시고 많이 웃으셨던 것 같다.

'막내딸 안 낳았으면 어쩔 뻔했냐'고 주위 분들에게 말씀하셔서 기뻤다.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병원에 모시고 갔을 때 아버지 손이 차가워서 잡고 녹여드렸을 때 아버지가 내 손을 여러 번 꼭 잡았다. 그것이 작별 인사였던 것 같다.

모든 인간은 언젠가는 떠날 운명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식들이 살아있는 동안은 그 마음 안에 계신다.

태그:#아버지,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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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하여 글을 쓰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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